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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14화 (114/232)

114화

제법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였지만, 공간을 망처럼 짜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인이예의 선괘(線罫)를 피하진 못했다.

이제 점극일수(占戟一手)로 거미줄에 걸린 곤충을 죽이는 일만 남았다.

‘저자는 실력은 중하(中下)지만, 부리는 자가 없는 걸로 봐선 누군가의 신임을 얻고 있는 거야. 고민된다, 정말. 끝까지 추적하자니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그만두자니 다음에 또 상단으로 잠입시킬 것 같고. 하지만 용 공자님이 우평에서 아래쪽으로 향했다고 하니 서두르면 우연을 가장해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끙.’

언짢던 기분이 용연을 떠올리자 풀리는 것 같았다.

‘어?’

용연의 생각을 이어 가려는데 나무 아래에서 은밀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찡긋.

인이예의 미간이 좁혀지고 눈빛은 가라앉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만큼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다지 운이 좋은 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

쉬쉬쉬―.

담영호는 망량을 펼쳐 빠르게 지나쳤던 숲을 사선으로 관통하는 중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남궁산산의 표정이 굳은 걸 봤을 때까지만 해도 연기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상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을 듣자 느낌이 이상했다.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라면 굳이 이 근방까지 불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곧장 서쪽을 달려 숲을 관통했고,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사선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음?’

좌측에서 희미한 혈향이 느껴졌다.

신형을 직각으로 꺾어 속도를 냈다.

이십여 장 달리자 나무에 목을 맨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밧줄에 평온한 표정.

살수란 자가 저런 표정을 지은 채 죽었다?

상대는 훨씬 더 뛰어난 살수인 것이다.

바닥을 살피다 훌쩍 나무 위로 신형을 솟구쳤다.

나뭇가지 하나가 꺾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떠났을까?

남궁산산이 기다리는 주루?

고개를 돌렸으나 주루는 보이지 않았다.

남궁산산을 불러내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뭔가 억지 같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주루로 돌아가서 몇 가지 확인한 후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씰룩.

적어도 남궁산산이 자신의 관심을 끈 건 성공했다.

***

[……(중략)……강한 무공을 익히느라 시간을 손해 보는 것이 싫어서 만든 것이 신수, 낭각, 낭복, 낭견이다. 손, 발, 배, 어깨까지 웬만한 공격에는 흠도 나지 않으니 더더욱 무공에는 소홀했다. 그러다…….]

끼이―.

“응?”

책에 집중하던 용연의 귀를 익숙한 울음소리가 파고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꾸끼가 커다란 날개를 쫙 펼친 채 마차 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책은 나중에 봐야 할 것 같네.”

용연은 꾸끼를 본 것뿐인데 마치 인이예가 앞에 있는 것처럼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런데 낭인왕에 대한 소문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는 한 시대를 풍미한 장인의 삶을 읽은 것 같잖아?”

용연은 책을 덮으며 입맛을 다셨다.

삼분지 일 가까이 낭인들의 얘기나 낭인왕의 무공에 관해서는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낭인왕이 만든 기물들에 대한 설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은 용연의 품으로 들어갔다.

“꾸끼, 너 용 공자님 때문에 그렇게 혼자 가 버렸던 거야?”

마부는 용연이 내리자마자 다시 타느냐는 질문도 없이 곧장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용연은 조신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인이예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만 생각했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인이예의 노력에 맞장구는 쳐 줘야 하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은 잊지 않았다.

“용 공자님, 정말, 저엉말, 근처에 일이 있었어요. 우평 지부에서 용 공자님이 마차를 탔다는 보고를 받고 조금 서두르기는 했지만, 내려가시기 전에 한 번 더 만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용 공자님?”

인이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용연의 강제적인 동의를 구했다.

면사에 가려진 입술이 바싹 말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창피한 말들을 당당하게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와서 연습했던 말들이 용연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고백을 해 버린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잘하셨어요.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평 지부에 간 거거든요. 근처에 일이 있으셨다니 저는 너무 다행인데요?”

용연은 얼굴을 한껏 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인이예는 양손을 모아 가슴 언저리에 올리며 용연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맞춰 주는 용연의 배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객점은…….”

용연은 화제를 돌리려고 위쪽의 허름한 객점을 손으로 가리키다 걸음과 동작을 멈췄다.

“예?”

인이예는 용연이 말을 흐리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인 소저, 일행과 함께 오셨어요?”

“아니요. 혼자…… 왔어요.”

인이예는 용연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곧바로 호흡을 고르며 선괘의 방식으로 기를 확장시켰다.

그러자 희미한 기척이 우측 숲에서 느껴지는 것을 알게 됐다.

“일행이 계시면 함께 식사하자고 하려고 했죠. 꾸끼가 내려오지 않는 게 이상해서 물어봤어요. 올라가시죠?”

용연은 하늘을 올려다보곤 객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꾸끼 부를게요.”

휘이익―.

인이예는 짧게 휘파람을 불고는 허공에 대고 손을 빙글 돌렸다.

꾸우― 끼아―.

‘저기하고 저기.’

인이예는 꾸끼가 울었던 위치를 눈으로 기억해 두고는 마치 말을 듣지 않아 속상하다는 듯 양손을 허리춤에 올렸다가 내리며 용연의 뒤를 쫓았다.

“혹시 몰라서 통째로 빌 려뒀어요.”

용연이 객점 주위를 살피는 모습에 얼른 나섰다.

“괜찮은 방법인데요? 다음에 저도 한번 써먹어야겠어요.”

용연은 웃으며 객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돌아섰다.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요?”

“어느 쪽으로 가실 거예요? 저는 용 공자님의 반대쪽으로 갈게요.”

“……위치만 파악해 두세요.”

용연은 객점에 있으라고 말하려다 인이예의 표정을 보고 한발 물러섰다.

“그럴게요.”

인이예는 면사 위로 드러난 눈썹을 아래로 휘며 방긋 웃었다.

용연과 인이예가 동시에 객점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역시 끝을 봤어야 했어.’

용연에게 미안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이예의 눈엔 냉기가 흘렀다.

용연을 만난다는 생각에 주의를 소홀히 했던 것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은영루주가 뒤를 밟히다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창피해서 혀 깨물고 죽고 싶은데, 그들을 처리하는데 용연에게 수고까지 끼친다?

더욱 속도를 냈다.

‘마차를 타는 것이 아니었어.’

용연은 숨어 있는 자들이 자신을 쫓아왔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숨어서 지켜보기만 할 이유가 없잖은가?

비류가 둘러대는 데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힐끗.

뒤를 돌아봤다.

어느 쪽에 사야벌의 호법이 있을까?

모를 때는, 아주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발이 지면을 밟는 순간, 마지막 제의 원리를 운용해 땅을 뒤집었다.

콰콰콰!

***

우뚝.

“투신?”

용연이 만들어 낸 커다란 소리에 계곡 너머에서 신법을 펼치며 달리던 반백의 머리칼을 한 사내가 거짓말처럼 자리에 멈춰 섰다.

저 정도 굉음을 낼 수 있다면 상당한 고수고, 자신이 찾던 자일 가능성도 높았다.

어제 아침 자신의 수족 중 눈이 유난히 튀어나온 심량과 나눈 대화가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세 각주 중 홀로 살아남은 비류를 만난 뒤의 일이었다.

―……해서, 투신이란 자는 멀리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 호법님.

―그 결론은, 비류가 거짓 보고를 했을 경우의 일이겠지?

―비류각주 입장에선 진실을 말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놈의 정통 타령 때문에 죽이지도 못해.

―비류각주가 어떤 실수를 해야 벌주님께서 포기하실지 다른 호법들도 모르잖습니까?

―그게 더 짜증나. 그 얘긴 그만하고, 아까 어디라고 그랬지?

―이곳보다 더 깊이 내려가면 군림단과 부딪칠 테고, 섬서나 호북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우리 쪽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좋아. 내가 직접 내려갔다 올 테니 비류를 원율 호법에게 넘겨.

―예? 감 호법님,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원앙각과 금강각이야 비류각주만 경계할 정도의 허수아비를 구하면 그만입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들를 곳이 있었는데 그 동선과 겹쳐서 겸사겸사.

시선을 계곡 너머로 고정시킨 사야벌 십이호법 중 한 명인 감산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청허루 방향으로 꺾지 않길 잘했네. 군림단의 늙은 생강들에게 줄 선물이 늦겠네?’

도끼와 도가 교차된 문양을 사용해 귀암로로 연락한 횟수가 세 번이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잘 감췄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귀암로에선 이미 군림단 삼정의 서찰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해?

청허루를 없애고 그곳에 몇 명이 있든 모두 죽일 것이다.

당연히 저 투신일지 모르는 놈부터 처리를 한 후에.

***

용연이 만들어 낸 굉음에 반응한 사람은 또 있었다.

세 무리로 만들어 보낸 묵성자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다.

“일조 쪽이다. 어서 신호 보내!”

객점이 있는 산 아래쪽에서 외친 소리였다.

***

힐끔.

담영호는 하늘을 빙빙 도는 매가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다.

먹이나 마찬가지인 작은 새들이 낮게 무리지어 도망치는데도 그저 하늘만 돌고 있었다.

“신호예요!”

합류한 남궁산산이 산 중턱을 가리키며 뾰족한 소리를 냈다.

“산산,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네가 필요해서 넘어가 주지만 다음은 없다.”

담영호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붉은색 연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명심할게요.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다음엔 이번 같은 일 없어요.”

남궁산산은 담영호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런다고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쫓아가는 데 전력을 다했다.

물론 전부 진심은 아니었다.

이번에 담영호를 반걸음 움직이게 만들었다면 다음엔 조금 더, 그다음엔 더 많이.

자신만이 담영호를 움직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

“음?”

용연은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인영들의 옷차림을 보고 이채를 발했다.

어느 한 사람도 낭인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봤다.

예상대로 건너편에 있던 자들이 소리를 듣고 모두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낭인들의 옷차림은 아니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지?”

용연은 다시 돌아서며 머뭇대는 자들을 쳐다봤다.

질문이 착했던가?

조금 전 땅을 뒤흔든 사람이 자신이란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알려 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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