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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13화 (113/232)

113화

일 년여 전에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가 죽은 일과 관련돼 곽집을 도왔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담영호가 다쳐서 곽집이 움직여야 했다는 사실도.

절레절레.

모용세가는 철혈사자맹 소속이니 귀암로와 결부시켜선 안 된다.

그렇다면 몽외일까?

절레절레.

몽외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몽외와 세력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 교림님과 몽 선림님이라면 다른 신분 하나씩은 갖고 계시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일부러 다른 단원들이나 외부 식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피식.

용연은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외부 식구들이 담영호와 몽외를 적보다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났다.

특이함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 모두 정점을 찍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이제 인 소저 덕을 볼 시간인가?”

산을 내려오며 했던 생각 중 또 하나는, 이동 수단에 대한 고민이었다.

처음엔 금룡상단 지부의 마차를 이용해서 인이예가 신경 쓰게 되는 것이 미안했으나, 입장을 바꿔 생각하니 오히려 그편이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사야벌의 호법이란 자들이 쫓아온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움직이는데 무슨 수로 찾겠는가?

다른 단원들과 만날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것이 나았다.

***

“전부 죽었다고?”

남궁산산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돌아봤다.

얼마나 공을 들인 일인데 보낸 자들이 전부 죽었단 말인가?

보고를 올린 여인, 아상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직 보고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서 돌아온 자가 있기는 했다.

―기, 기다려…… 기웃거린 죄…… 한 명, 한 명…… 주, 죽…… 큭!

고작 한마디 남길 명줄만 이어 놓고 보냈던 것이다.

아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몇 번이나 얼굴과 모습을 바꾸어 이곳에 오게 됐다.

“아상?”

“역으로 우릴 공격한 자가 경고를 보냈습니다.”

아상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숨을 거둔 자와 관련된 얘길 꺼냈다.

“……너를 추적하겠다는 뜻이네. 야우(野雨), 좀 더 넓혀서 감시해.”

남궁산산이 허공에 대고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따르겠습니다.”

‘누가 있었다고?’

아상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살폈으나 사람의 모습은 찾아낼 수 없었다.

“금룡상단에서 고용한 자일까?”

남궁산산은 검지로 이마에 대며 혼잣말을 흘렸다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포기하긴 싫은데.”

아랫입술을 깨물던 남궁산산의 동공 속에서 아주 작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

화하의 아침 안개를 열며 일정한 보폭의 죽립인이 안평루(岸坪樓)로 들어섰다.

청소에 열중이던 점소이는 들어서는 손님을 보고 꾸벅 인사부터 하며 다가갔다.

“아침이라 되는 음식이 많지 않습니다.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늘 먹던 걸로.”

죽립인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말씀드렸…….”

척.

죽립인은 손가락으로 주방을 가리켜 점소이의 말을 끊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점소이는 입이 이만큼 나와서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죽립인을 무시하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살벌했기 때문이다.

“주방장님, 늘 먹던 걸로 달라는 손님이 왔습니다. 제가 안 된다고 계속…….”

점소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언제 나왔는지 주방장이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아 버린 까닭이다.

“하던 청소나 마저 해.”

“읍. 읍.”

점소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 정리하던 탁자로 달려갔다.

힐끗.

주방장은 보이지도 않는 이 층을 올려다보고는 조용히 안채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여인 한 명이 서둘러 나오며 죽립인 옆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죽립인이 일어나 안채로 향하자, 그림자라도 밟을세라 여인은 발소리를 죽이며 따라갔다.

안채 문이 닫혔고, 점소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주방 옆으로 고개를 내밀려 했다.

따악!

“기침도 안 한 루주님 방은 왜 기웃거려? 청소 안 해?”

주방장이 점소이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으악! 주방장님, 무슨 소리예요? 루주님이 그 기분 나쁜 손님 데리고 방금 안채로 들어가셨잖아요?”

“뭐? 손님?”

주방장은 점소이의 말에 깜짝 놀라며 주루 안을 둘러봤다.

어디에 앉아 있었느냐고 묻는 행동이다.

“저, 저…… 어? 분명 의자를 빼고…….”

점소이는 죽립인이 앉아 있던 곳을 손으로 가리키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쩍 벌렸다.

죽립인이 일어나며 뺐던 의자가 얌전히 탁자 안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미쳤나, 아침부터 흰소리나 해 대고. 빨리 청소 안 해?”

“예? 예, 예!”

점소이는 자신이 헛것을 봤다 확신하고 연신 고개를 흔들어 댔다.

쪼르르.

눈매는 가늘지만 코와 입가로 만들어 내는 표정이 무척 성숙해 보이는 삼십 대 여인, 아상이 죽립인 앞으로 다가와 차를 따랐다.

“무슨 일로 불렀나?”

담담한 목소리의 사내, 담영호는 찻잔을 잡았다.

“아가씨께서 금룡상단에 심어 두었던 눈과 귀가 며칠 만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상은 한 호흡에 말을 마치고 숨을 뱉었다.

엄청난 위압감에 숨을 쉬며 말을 했다가는 더듬을 것 같아 그런 것이다.

“접어.”

“저도 아가씨께 그리 조언을 드렸는데, 어제는 야우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가씨의 수족 중 한 명입니다. 심어 둔 자들과 단 한 번도 접촉한 적 없었는데…….”

“말이 길어. 네 아가씨는 어디 있지?”

‘네 아가씨?’

아상은 놀란 표정을 감춰야 했다.

담영호와 남궁산산의 관계를 알고 있기에 이토록 냉담한 반응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다.

“데려와.”

말을 마친 담영호는 찻잔을 입에 대며 눈을 감았다.

고개를 든 아상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남궁산산에게 연락하러 가야 하나?

남궁산산이 직접 오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인가?

일이 어그러진 책임을 물으려는 것일까?

“이 주루에 있는 자들 모두 네가 남궁산산과 일한다는 걸 알고 있나?”

아상의 눈꺼풀이 두어 번 감겼다 떠졌을 때, 담영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가씨는 멀리 계셔서 지금 연락을 해도…….”

“내가 질문을 어렵게 하나?”

“주, 주방장만 알고 있습니다.”

아상이 대답하자마자 담영호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상의 옆에 멈춰 섰다.

온몸을 욕망이 담긴 노리개로 채운 것 같은 남궁산산이 처음 보는 여자를 보냈다?

궁금해야 하는데, 성가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담영호는 고개 숙이고 있는 아상의 목을 내려다본 채 가만히 있었다.

“저, 정말입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상이 다급히 납작 엎드리며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그때였다.

“다행이다. 늦을 것 같아 아상에게 말벗 좀 해 주라고 했어요.”

살랑, 실바람에 싱그러운 향기를 먼저 흘려보내며 남궁산산이 창문으로 들어섰다.

“아, 아가씨?”

아상은 갑작스러운 남궁산산의 등장에 작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며 쳐다봤다.

“아상, 근방 오십 장 내에 아무도 없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남궁산산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아상을 쳐다봤다.

단지 표정 하나 바꿨을 뿐인데 아상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고, 곧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상은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담영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남궁산산의 등장이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염두에 둔 등장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루에 들어오자마자 점소이가 신경을 건드리도록 한 것도, 아무런 결정 권한 없는 자신에게 담영호를 응대하도록 만든 것까지 모두.

오싹!

그동안 남궁산산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가씨께 실망을 안겨 드렸다. 나를 믿고 묵성자님과 한 자리에 있도록 해 주신 건데, 그 작은 일조차 제대로 못 해내다니.’

질끈.

아상은 눈을 감으며 피가 날 때까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안 아줘요.”

남궁산산은 아상이 주루에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담영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짝!

“악!”

담영호의 품으로 달려들던 남궁산산이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칼에 가려 남궁산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일으킨 상체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와 잘록한 허리, 탐스럽게 오른 엉덩이.

흐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순종을 담은 포기였다.

담영호에게 사과와 용서를 구할 바엔 차라리 벌을 받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담영호가 자신의 몸을 탐할 때 가장 좋아했던 자세를 취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겨워.”

담영호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심이었으나 몸은 또 다른 진심을 실천에 옮기도록 만들었다.

손이 이미 남궁산산의 머리칼을 휘어잡아 뒤로 당긴 것이다.

***

‘놓쳤어, 내가.’

나무와 하나가 되어 몸을 감추고 있던 야우는 눈을 반만 뜬 채로 주위를 살폈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놈의 위치가 파악돼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중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놓치고 말았다.

나무 위의 새들이 보인다.

가지에 모여앉아 쉴 새 없이 목을 돌려 댄다.

뭔가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 발 달린 짐승들이 장애물 뒤로 몸을 숨기고 눈만 내놓고 있었다.

숲에 그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살기가 예민하게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해.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의 싸움이야. 감히 나, 야우에게 살법으로 싸움을 걸고 있는 거야.’

얼마만의 흥분인지 모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깔끔하게 죽여 줄 생각이다.

***

‘어쩐다? 우평으로 갈까? 아니면 좀 더 파고들어 봐?’

열흘이 넘도록 풍호와 관련된 자들을 쫓던 인이예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며칠이면 놈들의 수장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생각과 달리 수장은커녕 본거지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라면 더 시간을 끈다 해도 큰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은패로 마차를 탄 분이 계십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마차입니다.

―우평(右平) 지부.]

용연과 헤어진 지 보름도 안 됐는데 소식을 들으니 자꾸만 몸이 달았다.

생각만 했는데도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당연히 호흡도 가빠져야 하지만, 눈만 내놓은 인이예의 면사는 착 가라앉아 이불처럼 코와 입에 붙어 흔들리지 않았다.

은영루의 비기를 운용해 코나 입이 아닌 피부로 호흡 중인 까닭이다.

아래쪽엔 살수로 짐작되는 자가 은신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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