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투신을 막는 자는 죽는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지만, 일단 움직이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순다.
투신에 대한 소문이 이런 식으로 났으면 하는 용연의 바람이었다.
“거칠 것이 없군.”
비류는 용연의 망설임 없는 손속을 보고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 미미하게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용연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원하던 상황을 비류가 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들보다 저들의 부하들을 더 챙기는군. 이유라도 있나?”
용연은 비류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만영이나 반특처럼 자신을 보자마자 밑도 끝도 없는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묵 노야가 좋게 설명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나나 저들은 모두 낭인이고, 만영이나 반특은 벌주가 자리에 앉힌 자들이오. 내가 능력이 모자라 막아 주질 못했으니 내 책임인 것도 같고. 대답이 됐소?”
“어느 정도는.”
“그럼 나도 질문 하나 합시다. 왜 나를 살려 주는 거요?”
“왜? 음, 질문이 잘못됐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내 물건을 탐한 것도 아니고, 내 일을 방해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을 죽여야 하지?”
“나는 비류각주요.”
“그런데?”
“나를 살려 두면 돌아가서 벌주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것 아니오?”
“그렇겠지.”
“그, 그렇겠지? 내 보고를 들은 벌주는 호법들을 보낼 테고, 그럼 당신은 평생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될 거요.”
비류는 용연의 심드렁한 반응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열을 올렸다.
힐끗.
비류의 열 오른 얼굴을 보고 있던 용연의 시선이 들렸다.
“부하 중에 당신 수고를 덜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
“그, 그게 무……!”
비류는 차가워진 용연의 말투에 놀라 급히 하늘을 올려다봤고 이내 얼굴을 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금강각의 낭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누군가가 전서구를 날린 것이다.
“내가 하겠소.”
용연이 나서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비류가 몸을 날렸다.
***
“뭐하는 거야, 피목!”
금강각의 낭인들을 챙기던 대벽은 민머리에 찢어진 눈을 한 피목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피목은 손에 쥐고 있던 전서구를 날려 보낸 뒤였다.
“뭐하긴. 호법께 알리는 거지.”
피목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자신 역시 대장의 신분이다.
반특과 요손이 없는 자리는, 다른 각의 주인인 비류가 아닌 자신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미친놈.”
“각주님이 없으니 네가 내 위인 것 같으냐, 대벽? 여기서 한번 해볼 테냐?”
피목은 입 주위를 씰룩이며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대벽은 황당한 표정으로 피목을 노려봤다.
“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
피목도 지지 않고 대벽을 노려봤다.
“비류각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전서구를 날린 것이 네가 할 일이라고?”
“나는 금강각 사람이다. 비류각주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다.”
피목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벽의 말을 반박했다.
“그래?”
대벽과 피목의 기 싸움을 깨뜨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각주님, 뒤쪽을 살피다 피 대장이 전서구 날리는 것을 놓쳤습니다.”
대벽은 비류가 뒤쪽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피목은 비류와 눈을 마주한 채 대벽에게 말할 때처럼 입을 열었다.
“비류각주님, 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호법들께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피 대장? 내가 있는데 왜 호법들에게 보고를 하지? 나는 벌주님께 바로 알릴 생각이야. 그래서 말인데, 피 대장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마치 호법들이 달아놓은 꼬리처럼 보인단 말이지. 피 대장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있나?”
비류는 피목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금강각 소속 낭인들은 비류와 눈이 마주칠까 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금강각의 또 다른 대장 신분인 홍정은 아예 몸을 옆으로 틀기까지 했다.
“비, 비류각주님, 지금 금강각 식구들을 협박하시는 겁니까?”
피목이 눈을 부릅뜨며 비류에게 대들었다.
십이호법 중 한 명인 낭월 감산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였다.
반특과 요손이 죽은 이상, 다음 대 금강각주가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당연히 당당해져도 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아니.”
비류는 머리를 흔들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얼굴을 피목의 귀 옆에 댔다.
“이렇게나 조심성 없는 놈 하나 죽이는 것뿐인데 협박은 무슨.”
쑥―.
비류의 손이 피목의 옆구리를 뚫고 빠져나왔다.
“이, 이…….”
“네가 한 짓 때문에 금강각 식구들 전부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아니잖아.”
와득!
비류는 입을 열려는 피목의 목을 팔로 감싸며 부러뜨려 버렸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진짜 개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 이 모습을 본 다른 두 각의 부하들이 자신을 신뢰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저 투신이란 자가 나서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 모르기에.
***
‘좋은 사람이네.’
용연은 비류의 행동을 지켜보다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만영과 반특이 당할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더니, 반특의 부하 한 명이 일을 만들자 나머지 낭인들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신속하게 대처했다.
낭인의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되겠다. 이 정도면 사야벌이 내 뒤를 조사한다고 해도 동동마을은 제외시키겠지. 투신. 아주 좋은 걸 갖게 됐어.’
씰룩.
투신의 가면을 쓰니 행동은 과감해졌고 말은 단호하고 짧은 투로 바뀌었다.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군림단원 용연의 신분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투신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잖은가.
투신으로 이곳에 오길 정말 잘한 것이다.
사천 땅 저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을 군림단의 규칙에 얽매지 않고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언제고 싸워야 할 세력들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면?
이러저러한 생각을 이어 가려 할 때, 낭인들을 추스른 비류가 다시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 각주가 데리고 있는 대장 한 명이 전서를 보내긴 했지만, 내가 무마할 수 있소.”
비류는 용연과 마주하자마자 올라오면서 했던 결심을 꺼냈다.
“무마?”
“호법들에게 두 각주가 서로 싸우다…….”
“솔직하게 말하는 걸로 하지.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음?”
비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무도 태연한 용연의 반응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빤히 쳐다봤다.
‘일부러 드러낼 생각으로 투신으로 왔는데 그걸 숨기면 안 되지.’
용연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비류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설마 사야벌을 노리는 거요? 여우락을 노리는 그들처럼?”
“여우락? 그들?”
용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오히려 되물었다.
“묵성자.”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지?”
‘누구? 그들을 일부러 한 명인 것처럼 말하는 건가?’
비류는 용연의 가면 쓴 표정을 읽어 내려 눈도 감지 않고 살폈으나, 서서히 찌푸려지는 눈을 보고 얼른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나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정보는 없소.”
“그런데 나를 보고 묵성자의 일원이냐고 물었다?”
“내가 비류각을 맡은 뒤 다른 두 세력 외에 귀암로와 싸운 곳은 거기뿐이오. 나이도 많지 않으면서 두 각주를 몇 초 만에 제압해 버리는 투신이란 고수. 나로서는 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겠소?”
“일리 있네.”
용연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류 입장에선 묵성자란 집단이나 자신이나 같은 선상에 놓을 이유가 충분했다 여긴 것이다.
“다시 물어보겠소. 사야벌을 노리시오?”
비류의 눈빛이 묵성자에 대해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혀. 말했듯이, 나는 내 물건을 탐내는 자들에게 관대하지 않을 뿐이다. 사야벌이 이걸 노리지 않으면 나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용연은 손목을 들어 보였다.
비류가 낭수련이라 알고 있는 응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응아린을 바라보는 비류의 눈엔 복잡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신수, 낭각(脚), 낭복(腹), 낭견(肩). 낭인왕이 남긴 네 가지 보물 사구(四具) 의 존재 이유가 낭수련의 주인을 보좌하기 위함이란 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길 바랐다.
몇 십 년 만에 직접 만나게 된 낭인왕의 신물을 가진 자가 우연한 경로로 얻지 않았기를 바랐다.
이번에야말로 세력의 틈이나 메꿔 주는 역할이 아닌, 낭인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된 영역을 가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다음 대나 기대해야 할 것 같군.”
비류는 쓰게 웃었다.
“할 말 다했으면 이만.”
용연은 비류가 일부러 말을 늦게 하는 것을 알았으나, 시간을 더 끌기 싫어 돌아서려 했다.
“나중에.”
비류는 재빨리 말을 이으며 용연의 발을 붙잡았다.
“나중에?”
“낭수련을 물려줄 사람에게 이것도 전해 주면 안 되겠소?”
비류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물려줄 사람?”
“당신의 후계자 말고 두 번째나 세 번째쯤 되는 제자나 자식에게 낭수련을 전해 줄 때 이 책도 같이 주기만 하면 되오.”
‘후계자 말고?’
용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말로는 포기한 것처럼 버리듯 건네지만 표정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줄 사람을 못 찾으면 버려도 상관없소. 어차피 그쯤 되면 낭인왕이란 이름을 기리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테니까.”
비류는 용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책을 건넨 후 돌아섰다.
‘됐다.’
씨익.
돌아선 비류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그려졌다.
낭수련을 갖고 있으니 낭인왕의 뒤를 이어라?
낭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씨도 안 먹힐 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 말을 한 이유는, 용연이 그저 저 책을 한 번 정도 읽어 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읽은 후에 조금이나마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도 좋고, 아니라면 용연의 다음대로 넘어갈 때 낭수련과 낭인들의 역사가 같이 전해질 수도 있잖은가?
현재의 사야벌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몇 대 전부터 사야벌주에 오른 이들의 한결 같은 모습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함을 눈앞에서 봤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귀암로 암주 구왕 사도천.
전대 암주들은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을 살피기 바빴던 반면, 사도천은 그들이 귀암로를 살피도록 영역을 다지고 또 다져 놓았다.
그런 균형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발을 뺀다?
적어도 현 사야벌주는 그것이 자살하는 것과 다름 아니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류는 몇 걸음 옮기다 뒤를 돌아봤다.
“갔군.”
언제 떠났는지 용연의 모습은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날이 저물었다.
숲 안쪽은 간간이 희미한 빛에 반사된 나뭇잎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작은 동물들의 소리 외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거대한 바위와 바위 사이도, 계곡의 갈라진 틈과 틈도 건너뛰고 날듯이 유영하던 용연이 한순간 자리에 멈춰 섰다.
졸졸졸.
힘줄 것도 없이 훌쩍 넘으면 될 정도의 폭밖에 안 되는 개천 앞이었다.
“묵성자?”
용연은 돌아서서 산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꺼냈다.
내려오는 내내 그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류에게 들었을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