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콰콰콰―.
위쪽에서 폭음이 터져 나오자 길도 없는 산을 수직으로 오르던 십여 명의 낭인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늦었나?”
꾹.
머리칼을 뒤로 묶고 구레나룻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사십 대 사내가 위쪽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옷 이곳저곳에는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들어 올린 양손은 물에라도 씻은 듯 깨끗했다.
“각주님, 소리가 난 건 지금이 처음입니다. 서두르시면 원앙각주가 그자의 양팔을 자르기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군의 탄식이 안타까웠던 사내 한 명이 눈을 부릅뜨며 악을 썼다.
“……막효, 네 말이 맞다.”
사십 대 사내, 비류각주 비류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자신의 오른팔인 막효를 돌아봤다.
척.
막효가 한 손을 번쩍 치켜들어 보였다.
친구는 이래서 좋은 것이다.
“서두르자.”
호흡을 마셨다가 내뱉으며 그대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 뒤를 막효 등이 웃으며 뒤따랐다.
***
“젠장!”
계곡 건너편에서 폭음이 터지자 금강각주 반특은 얼굴을 구기며 돌아봤다.
거의 다 왔는데 원앙각주 만영이 조금 더 빨랐던 모양이다.
고작 계곡 하나 차이라니.
반특이 멈춰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건너편을 노려볼 때였다.
“각주님, 올라타십시오!”
반특의 오른팔인 요손이 아름드리나무를 오르며 소리쳤다.
그그긍―.
요손이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렇지!”
반특은 요손이 천근추로 나무를 휘는 것을 보자 곧장 올라탔다.
쉬아― 악!
반특과 요선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건너편 계곡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 짧은 곳을 찾아 건너!”
남겨진 사람들 중 한 명의 명령에 또다시 금각각의 무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
쩌쩡!
용연은 어깨와 가슴을 노리는 만영의 공격을 응아린으로 막아 내며 뒤로 물러났다.
응조칠식이 펼쳐지는 순간 어딜 노리는지 몸이 먼저 반응해서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쿠우우―.
충돌 여파로 인해 벽이 무너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용연은 밀린 것처럼 물러나는 동시에 몸을 띄워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 위로 내려섰다.
그 상태로 좌우를 살폈다.
먼저, 계곡을 날아서 건너오는 두 명이 보였고, 아래쪽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인영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막고 있던 보람이 있네.’
씰룩.
용연은 다가오는 자들이 금강각주 반특과 비류각주 비류란 것을 확신했다.
만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봤다.
“음?”
기세만으로는 당장 먼지구름 안을 휘저을 것처럼 굴더니 언제 돌아갔는지 마차에서 함께 내린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경계를 하고 있었다.
엄청 조심스러운 자가 아닐 수 없었다.
“만가야, 내가 왔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인영이 일대를 쩌렁하게 울리며 바닥에 내려섰다.
“이이…… 천한 종자, 비류!”
‘뭐야, 저 두꺼운 목소리가 저자 입에서 나온 거야?’
용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들었던 만영의 목소리와는 백팔십도 다른, 마초 성향이 가득한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우엑, 씨 없는 종자가 내 이름을 말했어. 재수 없다, 재수 없어! 퉷! 퉷!”
비류는 토악질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쭉 내밀며 좌우로 마구 침을 뱉었다.
‘비류? 저자가?’
용연은 비류를 보고 이채를 발했다.
사야벌주의 수족인 십이호법을 제외하고 가장 신임이 두텁다는 자의 행동거지 치고는 너무 가볍잖은가?
아무렇게나 뒤로 묶은 머리칼과 헐렁한 옷차림이 전혀 일각의 각주로 보여 지지 않았다.
그래서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비류, 낭수련은 내거니까 끼어들지 말고 꺼져.”
“낭수련이 왜 네 거야? 가진 사람이 임자 아냐?”
비류는 내밀었던 입을 원래대로 만들고는 히죽, 웃으며 만영을 자극했다.
그러자 만영은 곧장 달려들었다.
어떻게 하면 만영을 열 받게 만드는지 잘 아는 것이다.
“어?”
비류는 만영의 손톱이 아닌 손바닥을 노리고 출수했다가 뭔가를 보고 다급히 손 그림자를 만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쾅!
만영의 앙조가 비류의 손 그림자 하나를 부수자, 뒤이어 내려선 팔기가 나머지를 화려한 동작과 함께 지워 갔다.
콰콰콰콰―.
고수들의 싸움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씨 없는 종자야, 쟤네들까지 나서는 건 반칙이지!”
“흐으응, 팔기와 내가 한 몸이란 것을 잊기라도 했다는 소리로 들리네, 근본 없는 천한 종자 새끼야?”
“근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비류각을 만든 사람이야. 너처럼 뿌려도 싹을 못 틔우는 근본 없는 씨하고는 격이 다르지.”
“낭수련이고 뭐고 오늘 네놈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팔기, 비류각 잡것들이 오기 전에 포위해.”
차라락.
만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팔기라 불린 여덟 여인이 긴 천을 풀어 비류의 시선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자 비류도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흔들.
비류의 몸이 갑자기 십여 개로 늘어나며 팔기를 덮쳐 갔다. 정확히는 팔기들이 흘린 천들이었다.
쫘악! 쫙! 쫙!
십여 개의 비류가 찢은 천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질 때였다.
쉬악!
만영이 팔기들을 뚫고 곧장 비류의 목에 앙조로 난도질을 해 댔다.
팔기들의 천이 찢기는 것을 보고 비류의 본신을 찾은 것이다.
쾅!
만영의 앙조와 비류의 손에서 폭음이 터졌다.
흔들.
만영을 마주 보고 있던 비류의 몸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텁.
비류의 다른 손이 만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거기까지.”
규웅―.
허공에서 묵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덩치가 둘 사이로 떨어졌다.
쿵.
“반특!”
만영은 짜증을 내며 양손을 들어 이미 달려들고 있던 팔기를 막았다.
“비류각주, 오랜만입니다? 저 내시 놈은 신수(神手)도 못 알아보고 지 계집들을 다 죽이려고 하는군요. 흐흐흐.”
반특은 비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서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만영을 쳐다봤다.
“아아, 덩치 각주가 저 씨 없는 종자를 쫓아다닌다는 걸 깜빡했네. 잘 지내셨는가?”
“저 내시 놈이 좀 빨라야지요. 헌데, 비류각주께서도?”
“음? 아아, 낭수련? 얼마 만에 나타난 물건인데 관심이 없을 리가.”
“곧 우리 각 애들이 올 텐데 비류각주께선 평소처럼 가만히 계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건 그렇고. 씨 없는 종자, 아까 싸우는 소리가 났던데 그자는 어딜 간 거지?”
비류는 반특의 반 협박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 주고는 만영을 쳐다봤다.
용연은 세 각주가 좌우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찾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신형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턱.
일부러 소리를 냈다.
반특과 함께 계곡을 넘어온 요손이 물러나 있다가 곧장 달려들었다.
과웅―.
요손의 주먹으로 공기가 말려들어갔다.
평범한 주먹질 같아도 금강보 위에서 펼쳐진 일권이기에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좋질 않았다.
쾅!
요손은 용연을 때리기 직전 엄청난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세 각주의 눈이 커졌다.
요손이 주먹을 뻗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벽을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흐흥, 내 앙조를 맨손으로 받아 낸 자라니까? 아무리 주인을 닮아서 대가리로 들이받는 걸 좋아해도 그렇지. 저건 좀 아니지 않나?”
만영은 요손의 몸이 벽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며 혀를 차며 반특을 돌아봤다. 물론 비웃음을 싣는 건 잊지 않았다.
“요손! 일어나라, 요손!”
반특이 큰소리로 요손을 반복해서 불렀다.
하지만 이미 혼절했는지 요손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척. 척.
용연은 다시 세 각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장내는 침묵이 짙어 갔다.
용연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켜봤던 호위 다섯과 뒤쪽의 백수십 명의 낭인들은 요손이 당하는 광경을 보고 숨을 죽였다.
“대, 대형, 요손 대장이 어떻게 나가떨어졌는지 봤어요?”
“……못 봤다.”
“미, 미친. 저런 자인 줄도 모르고 제가 그 지랄을 떨었던 겁니까?”
“저 사람의 정체가 뭐죠?”
용연을 가장 먼저 발견했던 다섯 호위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저 당당함은 뭐야?’
다가오는 용연을 보는 비류의 눈빛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이곳까지 달려오는 내내 낭수련을 갖고 있다는 자가 지니고 있기만을 바랐다. 아니, 낭수련을 비싼 값에 팔려는 자이길 바랐다.
그런데 낭수련을 팔에 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까지 조절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많게 봐도 스물네다섯이다. 요 대장이 방심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방에 기절을 시켜? 나도 자신하지 못한다. 철혈사자맹이나 사혈명에서 보낸 자일까? 아니지, 그들이 알려질 일을 할 리가 없지. 그럼 군림단? 우리가 딱히 사천성을 헤집어 놓거나 한 것도 아닌데?’
비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용연의 목적을 알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특과 만영은 비류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덩치, 일단 저놈부터 조지고 낭수련의 주인을 가리는 게 어때?”
만영이 반특에게 먼저 제시했다.
“기꺼이 도움을 주마, 내시.”
반특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만영을 돌아봤다.
요손이 당한 것을 본 뒤라 눈이 뒤집힌 상태였기에 만영의 제안에 바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만 각주, 반 각주, 지금 제 정신이오? 요 대장이 저자의 한 방에 기절한 것 못 봤소?”
비류가 두 각주를 막아서듯 몸을 돌리며 인상을 썼다.
“나를 요 대장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거냐, 천한 종자?”
“나는 지금까지 내 부하를 건드린 놈들을 용서한 적이 없소, 비류각주. 그것이 지금의 금강각을 세운 원천이오.”
만영과 반특은 비류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비류는 양손을 들었다가 내리며 벽 쪽으로 물러나고는 신형을 뽑아 올려 자신과 앞으로 벌어질 싸움은 무관하다는 뜻을 전했다.
힐끗.
용연은 절벽 위로 올라가는 비류를 쳐다보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불그스름해지고 있었다.
곧 노을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모양이다.
이곳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일 대 다수가 싸움을 벌일 때 다수 쪽의 머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희생은 얼마나 될까?
만승서고에서 종 노야가 물어봤던 질문이다.
당연히 용연은 자신 있게 ‘한 명’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 노야는 특유의 ‘흘흘’거리는 웃음과 함께 답을 알려 주었다.
―한 명이 죽든 전원이 전멸하든 적의 머리가 이기는 정도까지 아닐까? 이기는 것이 목적인 자가 부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나선다? 흘흘. 개소리지.
용연이 종 노야와의 문답을 떠올릴 때, 만영과 반특의 움직임에 변화가 일어났다.
두 사람은 뒤로 빠지고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열을 갖추며 앞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종 노야, 조만간 찾아뵐게요.’
피식.
용연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한 번을 빗나가지 않는 종 노야의 수업이었다.
후웁.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곧 투신으로서의 첫 싸움을 시작한다.
용연이 아닌 투신.
가면까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