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09화 (109/232)

109화

용연은 먼저 팔각이 어디인지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주루 천장을 올려다봤다.

혹시나 팔각 모양의 표식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기둥과 기둥을 연결한 보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지형을 보기 위해 주루 밖으로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책에는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남자로 하여금 많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여인의 부드러운 음색이 계단에서 들려왔다.

용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서 있었다.

“신녀에 대해 아시나요?”

용연은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자마자 묵 노야가 보냈음을 알아봤다. 장원으로 안내해 준 여인과 똑같은 옷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여인은 용연의 질문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인 상태로 손만 들어 이 층을 가리켰다.

―투신과 한 공간에 있다면 너희들의 몸이 먼저 반응할 테니 걱정 마라.

어떻게 투신을 알아보느냐는 질문에 묵 노야가 서찰로 답을 준 내용이었다.

바르르.

용연이 약서루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 떨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몸이 먼저 투신을 알아본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이 떨림이 결코 두려워서 일어난 반응이 아니란 점이다.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용연은 질문부터 건네려다 여인의 떨림을 보고 말을 돌려야 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여인은 미미한 떨림을 담은 목소리로 움직였다가 계단 끝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먼저 올라가란 뜻이다.

성도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여인이 모습만 바뀐 것 같았다.

서둘러 여인의 앞을 지나칠 때였다.

“쯧쯧쯧. 요즘 여자들은 저래서 안 돼. 좀 괜찮게 생겼다 싶으면 부끄러움도 모르고 먼저 들이대지.”

“아따 선이 고운 처자네.”

“좋은데 왜 그래? 배 채우러 왔다가 아래쪽도 빡빡하게 채우고 가면 좋지.”

여인이 말을 건넸을 때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건넸다.

용연은 모른 척 서둘러 이 층으로 올라갔다.

막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여인은 재빠른 걸음으로 창가 쪽에 세워둔 병풍 앞으로 가서 서더니 용연이 자리에 앉자 병풍을 친 후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천한 것이 투신의 옥체를 배알합니다.”

여전히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러지 마세…….”

용연은 얼른 다가가 여인을 일으켜주려 팔을 잡았으나,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온몸에 힘을 줘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떨려서.”

여인은 마른침을 삼키고 호흡을 고른 후에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노야가 전해 드리라는 서찰입니다.”

여인은 숨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씹었다. 나름대로 떨림을 멈추게 할 요량이었으나, 어떻게 된 몸인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신녀의 자격이 없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

묵 노야는 자신이 신녀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투신 앞에서 이토록 못난 모습만 보이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용연은 여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조금 전처럼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서찰로 시선을 내렸다.

[귀암로에서 사야벌의 위치는 어정쩡합니다. 암주인 구왕 사도천은 한류천성부, 혈록, 어부하의 수장들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여 줍니다. 아무래도 사야벌, 여우락, 은자림에는 신물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낭수련을 그토록 원했던 거구나.’

서찰의 앞부분을 읽은 것만으로 왜 사야벌의 세 각주가 동시에 움직이는지 이해가 됐다.

왜 진즉에 연락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들 정도였다.

[또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한류천성부, 혈록, 어부하는 꽤 탄탄한 조직력을 갖고 있는 반면, 사야벌, 여우락, 은자림은 모든 힘을 열두 명의 호법들에게 집중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유야…….]

‘불안하니까.’

용연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떨려 나갈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투신의 연락을 받고 조사를 해 보니 사야벌의 세 각주가 동시에 움직였더군요. 사야벌주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언제든 낭인들을 데려와 자리에 앉히면 되는 정도의 위치이기 때문이지요. 한 명, 비류각주 비류란 자만 살려 두셨으면 합니다. 그는 강호에 퍼져 있는 낭인들에겐 정신적 지주처럼 여겨지는 자니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 정도가 되겠네요. 더 궁금한 것은 앞에 있는 소향이가 알려 줄 것이니…….]

“소향?”

“천녀 소향이라고 합니다.”

용연의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향이 일어나서 예를 갖췄다.

묵 노야가 철저히 교육을 시킨 모양이다.

이런 식의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용연으로선 조금 더 편하게 대하도록 풀어 주고 싶었으나, 소향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보고 지금처럼 거리를 유지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참려 쪽에 모여 있는 자들의 동향을 알아 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규모나 위치라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파악하고 있었나요?”

“사야벌의 원앙각주가 이백여 명의 무리와 함께 주둔해 있습니다. 움직이는 즉시 연락하라고 말해 놓은 상태입니다.”

“누가 가 있나요?”

“삼생일사회의 식구들이 멀리서 살피는 중입니다.”

“언제 연락이 온 거죠?”

용연은 이채를 발하며 소향을 쳐다봤다.

묵 노야에게 연락한지 오 일 됐는데 그사이에 이 정도까지 파악이 됐을 줄 상상도 못한 까닭이다.

“어제 받았습니다. 참려 근방의 투신께서 머무실 만한 주루에는 모두 전해졌습니다.”

‘대단하다.’

용연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삼생일사회의 식구들은 투신의 명령을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소향은 말을 마치고 양손을 모아 절을 올리듯 허리를 숙였다.

신이라도 모시는 것처럼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 소향의 모습에 용연은 한기를 느끼며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제 대신 묵 노야에게 고맙다는 말 좀 전해 주세요. 저는 참려로 갑니다.”

“투신의 말씀, 노야께 전하겠습니다.”

소향은 끝까지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묵 노야로부터 듣기만 했던 투신과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었다. 삼생일사회의 신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영광된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투신과 묵 노야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황홀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가져 보지 못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투신이 내려 준 것이다.

어느 순간, 떨림이 잦아들며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아, 가셨구나.”

발그레.

소향은 자신과 용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이어졌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

“흘흘. 소향이가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한 모양이구나. 교선아, 너도 이런 기분을 느꼈느냐?”

묵 노야는 소향이 보낸 서찰을 교선에게 보여 주었다.

교선 역시 용연을 안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감히 눈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교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투신을 마중 나갔을 때는 투신께서 가면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예?”

“투신께서 가면을 갖고 계실 때 소향이가 만났다는 뜻이다. 교선이 네게 신녀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흘흘.”

“아…….”

교선은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묵 노야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아주 간단한, 장난 같은 수법의 효과였다.

팔신녀들에게 꾸준히 복용시키고 있는 환단 안에 용연에게 준 가면의 재질과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음양쌍고(陰陽雙蠱)처럼 태어날 때부터 서로를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팔신녀들에게만 해당되는 효과이기도 했다.

‘투신, 압도적이어야 합니다, 암주의 귀까지 들어갈 정도로.’

묵 노야는 용연이 투신으로서 첫 활약하는 것을 직접 못 봐 아쉬웠다.

***

낭인 특유의 복장을 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이끄는 대로 십여 대의 마차와 이백여 명의 낭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사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경계인 우보산(牛步山)을 넘으려는 것이다.

중턱을 지나 굽잇길로 막 들어서려 할 때였다.

척.

말총을 쓰다듬으며 선두에 말을 탄 사십 대 사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웬 놈이냐!”

뒤쪽에 적의 등장을 알리는 외침부터 터트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행렬이 일제히 멈춰 섰다.

“대형, 무슨 일입니까?”

사십 대 사내의 뒤로 네 구의 말이 다가왔다.

“사천성으로 넘어오자마자 환영해 줄 사람이 온 모양이다.”

덥수룩한 수염뿐이던 사내의 입이 벌려지자 치아가 드러났다.

“응?”

다가온 사내 넷 중 한 명이 웃으며 새끼손가락으로 이를 쑤시다 와락, 인상을 썼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 쳐다봐도 인영 한 명 외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다른 사내들도 인영이 혼자임을 확인하곤 어처구니없어 했다.

“뭔가 있는 거 아닐까요, 대형? 매복이 안 끝나서 시간을 벌려고 나섰다거나, 하는?”

“큭. 둘째 형, 그런 건 모르는 척해 줘요.”

일제히 사내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건 저쪽 사정이고. 우린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된다. 둘째야, 앞쪽으로 사람을 보내서 매복이 있는지 확인해.”

대형이 사내들 중 한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미동도 없던 인영에게서 처음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슥.

인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음?”

다섯 사내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인영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 없다. 나 혼자니까.”

“허!”

대형의 입에서 허탈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갓 스물이나 됐을까?

“없다? 한참 어린놈이 입에 걸레를 물었네?”

사내 중 한 명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에 내리려 했다.

“자리 지켜.”

대형이 손을 뻗어 사내의 행동을 막았다.

“대형,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자리. 지켜.”

대형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누구냐?”

“저 마차에 탄 사람에게 전해. 찾고 있는 낭수련의 주인이 나라고.”

“나, 낭수련!”

다섯 사내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단어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덜컹.

가면 쓴 청년이 가리킨 마차의 문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흐응, 낭수련의 주인이라고?”

원앙각주 만영이 특유의 중성적인 비음 섞인 목소리를 내며 여덟 명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마차에서 내렸다.

만영의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시선이 가면 쓴 청년의 양손을 향했다.

척.

가면 쓴 청년, 용연은 만영의 탐욕에 불을 붙여 주었다. 양손을 들어 팔목에 차고 있는 응아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슷.

만영의 신형이 갑자기 길게 늘어나는 것 같더니 용연의 팔을 향해 손을 뻗어 왔다.

행렬을 호위하던 다섯 사내는 만영의 신기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떴으나, 이어진 용연의 반응을 보고는 신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헉!”

“끄음.”

용연이 만영의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만 물러난 뒤였기 때문이다.

‘이놈이!’

만영의 표정이 신경질적으로 변하며 재차 손을 뻗어 갔다.

카욱―.

손가락에 영앙기가 주입되자 손톱이 길어진 것 같은 형태로 조법이 펼쳐졌다.

앙조칠식(鴦爪七式).

만영이 영앙기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찾고 또 찾다가 익힌 무공이다.

영앙기가 만영의 길어진 손가락을 통해 용연의 우측 공간을 찢고 바닥을 난자했다.

콰콰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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