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무투 후보들은 다가오는 사내가 누군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엄청난 존재감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왔다. 너희들이 서 있는 곳은 가장 낮은 곳이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자격이 있다. 가라.”
용연은 묵 노야에게 눈앞의 서른여섯 명이 왜 모여 있는지에 대해 들었다.
뭔가를 줘야 한다면, 현재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강한 것을 줄 것이다.
머릿속의 수차를 돌려 장원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지령처럼 던진 말이다. 아마도 저들의 무공 수준이라면 지금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우오으아!”
누군가의 선창으로 아직은 어린 맹수들이 일제히 포효하듯 소리쳤다.
움찔.
영향을 받은 사람은 무투 후보들만이 아니었다.
묵 노야는 눈가를 떨었고, 뒤에 시립하고 있던 세 여인은 다리가 풀린 것처럼 휘청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버텼다.
‘혈교의 세가 순식간에 불어날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어. 너희들은 오늘 이후 투신을 위한 희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구나.’
묵 노야는 세 자매의 반응이 혈교주의 기록에서 봤던 그대로임을 떠올리며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결정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려 주는 것이다. 본 교주에게 그럴 자격이…….]
묵 노야는 읽다가 혀를 찼던 대목이었는데 막상 눈으로 목격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삼십육무투에겐 이미 용연은 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
후우, 후우.
달이 기우는 것을 보고 있던 용연이 뒤를 돌아봤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덩치 좋은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슷.
용연은 자리에서 사라지며 청년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까득.
청년의 목과 허리를 잡고 펴준 뒤 뉘여서 굳어진 관절과 자리 잡은 내장을 흔들어 놓았다.
그다지 큰 수고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만으로도 내공을 익힐 때 상당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투신…… 가, 감사 합…….”
청년은 용연이 이미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투신의 손길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기 때문이다.
용연은 새벽이 가기 전에 나머지 일곱 개의 구릉을 들렀고, 모두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 후 떠났다.
묵 노야는 구릉에 오른 여덟 명에게 무투로서 투신을 보게 해 주길 바랐으나, 사야벌의 움직임을 감지한 이상 더 머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류가 아직 성도에 머물고 있다면 동동마을과 관련된 일이니 자신이 마무리 하겠다고 하려는 것이다.
***
[사야벌에서 조사차 보낸 각주들이 살아서 돌아오길 바랍니다.
―교일(交一).]
도끼와 도가 교차된 문양이 찍힌 서찰이 둥근 탁자 위에 올려졌다.
둘러앉은 세 노인, 삼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교일.”
국진세가 나직이 보낸 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빚을 갚으란 소리네요.”
여벽은 교일이 이름이 아닌 거래 조건임을 알아차리고 노한 목소리를 냈다.
잠사우는 서찰을 노려본 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두 분?”
국진세는 여벽과 잠사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청허루를 폐쇄할 때가 된 것 같네요, 국 단정님.”
여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 단정님 말씀이 옳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연락을! 앞으로 다른 세력들도 같은 짓을 할 염려가 되는군요.”
잠사우가 여벽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국진세는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미미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는 아픈 손을 지울 때 그들의 손을 빌렸어요.”
“사야벌은 한 명이 아니라 세 각주와 부하들까지 전부 살려서 보내달라고 하잖습니까? 이건 교일이 아니라 협박 아닌가요?”
여벽이 곧장 국진세의 말에 반박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국진세는 여벽의 반박에 순순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안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여벽과 잠사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국진세를 쳐다봤다. 이런 식의 반응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봐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국 단정님?”
“저도 국 단정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여벽과 잠사우가 한마디씩 건넸다.
두 단정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국진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길게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사야벌의 각주들이 아직은 뭘 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괜한 분란을 만들어봐야 서로 안 좋을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청허루를 폐쇄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정도까지 선의를 베풀었다?”
“진 대교에게 전하기도 수월하겠네요.”
여벽과 잠사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국진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
[괜한 분란을 만들어 선림들의 수련을 방해하지 마시게. 들으니, 정체를 대놓고 드러낸 채 사천 땅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이 있는 것 같더군. 우리 세 늙은이는 그들이 넘어오기 전에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네.
―삼정.]
“으으으.”
진류는 눈으로는 웃으면서 입으로는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려 터트리고 싶은 짜증을 신음으로 뱉어 냈다.
자신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
지난번에 분명히 의논할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 달라고 했건만, 또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듯이 서찰을 보낸 것이다.
더구나 외부 식구들로부터 사야벌 소속 각주 셋의 움직임에 대해 보고를 받은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교님, 용 학림이 다시 왔습니다.”
진류를 돕는 가의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용 학림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밖에 있다고?”
“예.”
“여길 한 번 와 보고 찾아온 거야? 눈썰미 좋은데? 들어오라고 해.”
진류는 언제 삼정 때문에 짜증이 났느냐는 듯 얼굴이 확 펴졌다.
“학림 용연, 대교를 뵙습니다.”
용연은 들어서자마자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게. 며칠 동안 성도 근방에 있었던 건가, 용 학림?”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며칠 어딜 좀 들렀다가 내려가는 길인데, 외연 남회 대주로부터 동동마을 소식을 듣고 찾아뵙게 됐습니다.”
“동동마을? 아아, 거기. 음? 거긴 자네가 해결한 곳이잖아?”
“세 곳을 동시에 보낸 자가 혼구당을 핑계로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혼구당?”
진류의 돌아보는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이름이지만, 삼정의 서찰을 받은 뒤라 조금 더 민감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용연은 진류의 눈빛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혼구당 뒤에 사야벌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세 각주들이 사천 땅으로 들어오려는 거고. 헌데, 왜 동동마을이지?”
“그 부분이 저도 이해가 되질 않아 알아보려고 대교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진류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용연은 일부러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영이란 자가 사야벌의 세 각주들 중 한 명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흠, 충분히 용 학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네. 허나 그들을 추적하다 충돌이라도 나면 내가 곤란해져.”
“예? 대교님, 제가 뭘 놓치고 있는 겁니까? 전에도 모용세가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아, 그때도 자네였던가?”
“……예.”
‘맞네. 기억났다.’
진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용연이 말하는 임무가 무엇인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삼정의 서찰을 받은 뒤였다.
“이번 일은 조심스럽게 파 봐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사안이 사안인 만큼 교림 둘을 보내 자세히 파 봐야 할 것 같네. 용 학림은…….”
“동동마을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괜찮겠나?”
“저까지 움직이는 건 교림 두 분을 번거롭게 만들 것 같습니다.”
“그래? 하긴, 몇 백 명을 이끌고 사천 땅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을 조용히 타일러서 돌려보내려면 교림 둘이 움직이는 것이 낫지.”
“저는 그럼 그렇게 알고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용연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교림 서열 일위인 진류와 오랫동안 군림단의 장로 역할을 담당해 온 삼정의 기 싸움에 낄 필요는 없었다.
묵 노야를 만나고 오길 잘했다.
투신이란 또 다른 신분을 떠올렸기에 쉽게 물러선 것이다.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봤던 모양이다.
“아네, 알아. 뿌리째 뽑고 싶겠지. 이번만, 이번만 참자, 용 학림.”
진류는 용연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를 건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연의 대답으로 더 미안했는지 진류는 다음 임무 때 보자며 배웅까지 해 주었다.
***
[낭수련의 행방을 물었다는 자들에게 흘려 주세요. 낭수련을 가져왔던 사람이 위쪽으로 가겠다며 마을을 떠났다고.
―용연.]
[묵 노야, 귀암로의 사야벌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요. 참려 쪽으로 이동 중이니 그 근방 주루에서 받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투신.]
용연은 진류의 거처를 벗어나는 순간, 동동마을의 육초백과 묵 노야에게 서찰을 보냈다.
군림단 외부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마음이 바빠졌으나, 묵 노야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기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참려로 가는 동안 노숙 대신 주루나 객점에 묵으며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고, 이동 수단은 마차를 선택해 무인이나 거친 왈패들 사이에 끼어 탔다.
그렇게 오 일을 움직이니 참려까지 마차로 반나절 정도 거리에 도착할 수 있게 됐고,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루를 찾았다.
마을이 크지 않아선지 주루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중 커 보이는 약서루로 들어갔을 때였다.
“한 분 더 들어오셨네? 어흠, 다시…….”
점소이가 인사도 건네기 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용연을 먼저 아는 척해 주었다.
“아, 벌써 몇 번째야! 내가 말해 줄 테니까 하던 얘기나 이어 가요! 이보게, 투신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신녀가 어디에 사는지 아는가?”
뒤쪽에서 기웃거리던 중년인 한 명이 짜증을 내며 돌아서서 용연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팔각. 뭐라고?”
“예?”
“내가 뭐라고 했느냐고.”
“팔각?”
“그렇지. 이제 와서 들으면 돼. 대단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 올 때마다 물어. 킁.”
중년인은 콧방귀를 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용연은 목 뒤로 소름이 쫙,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거구나!’
천무박투란 책이 주루를 통해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적휘를 통해 알게 됐으나, 정보와 연락까지 주루에서 맡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 이야기꾼은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사람들이 주루로 들어올 때마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책이 잘 팔릴 거라고 했을까? 아니면 투신이란 이름을 팔았을까?
피식.
용연은 묵 노야가 어떤 수완을 부렸는지 궁금해 하며 조금 전 중년인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투신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신녀가 팔각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