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인이예는 추영영이 진심으로 걱정했던 두 번째 조언은 평생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번 만남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용연의 무공은 이미 인이예가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사부님, 방금 헤어졌는데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려고 그래요. 어쩌죠?”
―이 사부는 우리 단주님이 정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비영(秘影)들이 위험신호를 날리길 기다려. 그렇게라도 달려가고 싶거든.
“아니요. 저는 용 공자님이 위험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싫어요. 그랬다가는 평생 기다리기만 할지도 몰라요.”
인이예는 눈을 반짝였다.
추영영의 조언대로 했다가 용연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을 뽑아야겠어.”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뭔가 한 고비를 넘긴 느낌이 든다.
“이제 사부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인이예는 웃으며 본단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
달주에서 성도 쪽으로 가장 가까운 금룡상단의 지부는 고붕지부로 꼬박 이틀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용연은 마차에서 내려 함께 온 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기지개를 켰다.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던 만영이란 자에 관한 정보입니다.
사야벌 예하 조직―비류각, 원앙각, 금강각.
비류각주 비류, 원앙각주 만영, 금강각주 반특.
강호 전역에 퍼져 있는 낭인들을 취합하거나 움직이기 위해 존재함.
중복되는 인물들이 있어서 한 각이 움직이면 다른 각들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음.
강호에 알려진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며칠 전, 육 노야께 마을 사람들이 제보한 것이 있는데, 수상한 자들이 마을에서 있었던 싸움에 대해 묻고 다닌다고 합니다.
만영과 나머지 두 각이 움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남회.]
어젯밤, 노숙하다 받게 된 쪽지 두 개 중 하나로, 남회의 정확한 일처리가 새삼 듬직하게 느껴지는 쪽지였다.
꼼지락꼼지락.
용연의 손엔 아직 읽지 않은 쪽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묵(嘿).]
묵 노야가 보낸 쪽지다.
[구산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나머진 어쩌란 말인가? 자네 때문에 고심해서 키운 인재들만 폐기처분하게 생겼네. 성도 근처에 있으니 만나세.]
“끙.”
용연은 성도 쪽으로 난 길을 보며 신음을 뱉었다.
어차피 지나는 길이지만, 전처럼 시간을 쪼개서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마치 소작농들이 벼가 익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도 결국은 대부분의 수확물을 땅 주인이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공심회와의 싸움에서 묵 노야를 붙잡은 사람이 자신이란 것을 떠올린 것이다.
“내 땅이 아닌 줄 알면서 씨를 뿌려 놓고 후회는.”
절레절레.
구산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괜한 짓을 해서 번민을 자초하고 말았다.
“묵 노야, 갑니다.”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
스스스―.
선선한 바람이 머리 위를 지난다.
구릉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촌로에겐 이 시간이 매우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평범한 성도 외곽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촌로의 눈엔 전혀 다른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촌로가 서 있는 구릉 아래쪽엔 작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주위로 울룩불룩 그리 높지 않은 구릉들이 부채 살처럼 빙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일부러 길을 내길 잘했어. 크고 높고 험한 곳이 아니니 사람들은 편해진 길만 신경 쓰고 지형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촌로, 묵 노야는 인근의 조잡한 문파들을 끌어들여 금전적인 이득을 약속하며 이곳에 길을 냈다.
구릉 아래에 터를 잡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다.
“팔각(八角)에 오르면 팔각(八覺)의 눈 중 하나를 얻을 수 있다? 흘흘. 괜찮은 말인데? 얘들아, 무투들이 투신께서 지정하신 여덟 곳에 오르면 너희들은 뭘 해야 한다고?”
묵 노야는 즉흥적으로 꺼낸 자신의 말을 흡족해 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래쪽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 셋이 다소곳한 자세로 묵 노야의 뒤로 다가오더니 왼쪽에 선 여인이 입을 열었다.
“노야께 받은 정(精)을 이용해 팔각에 오른 무투를 투신체로 바꿔 주는 것입니다.”
“잘했다. 너희들이 일대신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완수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노야를, 투신을 위해 목숨 바쳐 완수하겠습니다.”
교선이 무릎을 꿇자, 교진과 교미도 무릎을 꿇으며 복창했다.
이로써 세 명의 팔천무녀는 완성됐다.
나머지 다섯도 몇 달 후에는 채워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버려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내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과거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고난의 시련일 뿐이었던 것이라면? 그렇게 믿어 버리면서……(후략)…….]
스승이었던 풍우선생의 유품에 섞여 있던 혈교주의 자서전이었다.
무공 몇 가지와 대법 두 개.
귀암로에 몸담고 있을 때는 누군가가 알아보면 해코지 당할 수도 있어서 사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세 자매는 모두 환희대법(歡喜大法)을 익혔다.
묵 노야가 복용시킨 영약의 효용을 환희대법으로 무투에게 전해줌으로써 투신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 이제 무투가 될 인재들을 만나 보러 가 보자꾸나.”
묵 노야는 흐뭇했다.
각지에서 보낸 무투 후보들이 곧 도착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
마차에서 내리는 용연에게 한 여인이 다가와 다소곳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묵 노야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이쪽으로.”
여인은 허릴 숙인 채 길 쪽이 아닌 숲을 가리키며 걸음을 옮겼다.
‘내 얼굴도 확인하지 무작정 안내를 하는 건가?’
용연은 아주 잠깐 의문이 들었다.
일다경가량 소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던 여인이 몸을 옆으로 비키며 앞쪽을 가리켰다.
그리 넓지 않은 장원이 용연의 눈에 들어왔다.
막 장원으로 들어서려 할 때, 여인이 손에 무언가를 건넸다.
눈과 콧잔등까지 가릴 수 있는 가면이었다.
“뭐죠?”
“장원 안의 그 누구도 투신의 얼굴을 봐선 안 된다는 노야의 명이 있었습니다.”
“소저는…….”
“못 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용연은 왜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고소를 지었다.
왠지 놀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었지만, 이 모든 걸 만든 사람이 묵 노야라면 결코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여인에게 받아 든 가면을 쓰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겉에서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화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묵 노야가 머물 것 같은 앞쪽 안채와 양옆의 숙소가 차례로 보였다.
‘ㄷ’자로 지어진 장원 내부의 방은 모두 불이 켜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투신.”
예상했던 안채의 문이 열리며 촌로의 모습을 한 묵 노야가 두 미녀를 거느리고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묵 노야.”
“투신, 앞으로는 회주라고 불러 주세요. 곧 강호를 쩌렁하게 만들 삼생일사회의 수장이거든요. 흘흘.”
“삼생일사? 책 이름이 아니라 묵 회주님이 만든 조직 이름이었나요?”
용연은 진류와 만났을 때 적휘가 가져왔던 책을 떠올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투신, 놀랄 일은 많이 있어요. 일단 안으로 드시죠. 이 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천무박투를 익힌 무투 후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투 후보?”
“구선이와 같은 인재들이 최종 목표로 삼는 신분이라고 해야겠네요. 총 서른여섯 명으로 제한할 생각입니다. 아! 이 아이들은 무투들에게 길을 제시해 줄 무녀들입니다. 다섯은 다른 곳에서 역시나 노력하는 중이지요.”
묵 노야는 방으로 들어가며 세 여인의 소개와 용연이 궁금해 할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삼생일사회의 주력은 그럼 서른여섯의 무투와 여덟의 무녀가 되는 건가요?”
“흘흘. 그 정도로 언감생심 그들과 싸울 수 있을 리 없지요. 시작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허나 나중엔 각 지역마다 삼십육무투와 팔천무녀들이 존재하게 되겠지요. 끊임없이 투신의 무공을 수련해야만 자리를 지키도록 할 생각입니다. 앉으세요.”
묵 노야는 가장 상석을 가리키며 바로 옆에 앉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용연은 선 채로 묵 노야를 쳐다봤다.
그러자 묵 노야는 웃으며 세 여인을 밖으로 물렸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투신?”
“묵 노야, 이런 건 영 어색하네요. 저는…….”
“삼생일사회와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쪼르륵.
묵 노야는 찻잔에 차를 따라 건네며 용연을 빤히 쳐다봤다.
용연은 묵 노야의 눈빛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행동으로 결정을 알려 달라는.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죠. 허나, 저에게 묵 노야가 하려는 일을 보고하듯 말해 주실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용연은 찻잔을 받아 들며 입에 댔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묵 노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무박투를 만든 사람이 누구죠?”
“……저죠.”
“천무박투 최소 단위를 알려 준 사람은요?”
“……그것도 저네요.”
“저는 투신이 준 재료로 판을 짰습니다. 검토해 보는데 일 년밖에 걸리지 않더군요. 한 문파가 박살나자 삼생일사란 책을 구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주루를 이용해 퍼뜨렸더니 책으로 익힌 천무박투로 골목이 난리가 났습니다. 누구나 익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투신이 만들었다는 것. 천무박투를 익힌 사람들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라고 합니다.”
묵 노야는 목소리에 강약을 실어 지난 이 년 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제가 뭘…….”
“투신을 만나는 것.”
“예?”
“양쪽 숙소에 머물고 있는 서른여섯 명의 꿈입니다. 오직 투신을 만날 수 있다는 염원으로 이 년 동안 죽어라 천무박투를 수련한 자들이에요.”
“……그렇겠네요.”
뒤늦게 입을 연 것은 망설여서가 아니었다.
서른여섯 명 무투들의 각오를 알 것 같아서였다.
‘저들의 가슴에 투신의 모습을 새겨 주세요.’
묵 노야는 속으로 부탁을 건네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줬음에도 용연은 삼생일사회와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묵 노야로선 새삼 용연의 대쪽같이 굳은 의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평생 명령을 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오, 투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투신 같은 사람을 위해 제대로 한번 만들다 가야겠소.’
이 년여 동안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마다 용연과 나눈 대화를 기준으로 선택했고,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자신의 올바른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용연을 의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용연이라면 자신이 만든 판에 제대로 우뚝 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 만나면 됩니까?”
용연은 결심이 섰는지 문 쪽을 돌아봤다.
“투신이 원할 때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예.”
덜컹, 덜컹.
서른여섯 개의 문이 열리며 서른여섯 명의 무투 후보들이 마당에 시립했다.
안채의 방문이 열리고 얼굴에 가면을 쓴 사내와 묵 노야가 걸어 나왔다.
움찔. 움찔.
무투 후보들은 투신으로 짐작되는 사내가 다가올 때마다 몸을 떨었다.
투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