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구산이가 독 장주의 개를 박살 내면 제대로 한몫 챙길 수 있습니다.”
“대인에게 연락드려라. 개는 준비됐으니 싸울 장소 정해 달라고.”
“장주님, 이번엔 우리가 다 먹는 거 어떠세요?”
장익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사방에서 이 마칠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겠다는 놈이 난리칠 때, 한물간 내게 기회를 준 분이 노야시다. 한 번만 더 예전처럼 굴면, 네 속에 뭐가 들었는지 배 따서 확인할 거야.”
마칠은 천천히 장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헤, 헤헤. 농담이죠, 농담.”
눈이 마주친 장익은 뜨악한 표정으로 꼬리를 만 개처럼 헤죽거렸다.
‘대인? 묵 노야와 연결된 사람인가? 일단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용연은 벽에 붙어 둘의 대화를 들었다.
대인과 노야란 호칭이 나온 걸 보니 둘 중 한 명이 묵 노야로 추측된다.
대인이란 자와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시간은 낼 수 있었다. 아니, 그 정도의 시간이면 구산이란 소년에게 각벽의 숨겨진 변화를 알려 주기에 충분했다.
***
툭툭.
“우웅.”
구산은 몸을 옆으로 구부렸다.
톡톡.
설핏 잠이 깬 상태에서 다시 느껴진 건드림.
눈을 번쩍 뜬 상태에서 빠르게 주위를 눈동자만 돌려 확인했다.
‘수, 숲!’
구산은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 깨닫자마자 일어나려 했으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깬 거 안다. 일어나 봐.”
‘손보다는 발이 가까워.’
구산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대략적인 거리를 가늠했다.
이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흔들려고 조금 더 다가올 수도 있다. 그때를 노려야 한다.
“시간이…….”
목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마자 구산은 누운 채로 몸통을 비틀며 최대한의 회전을 만들어 냈다.
휘릭―.
턱.
‘뭐, 뭐지?’
누운 채로 각벽을 시전했던 구산의 얼굴을 뭔가가 덮으며 시야를 가려 버렸다.
“각벽을 일격 필살처럼 사용하면 멀쩡한 손으로 익힌 조아와 조벽이 왜 있겠냐? 놔줄 테니 이번엔 양손을 사용해 봐. 알았으면 끄덕이고.”
‘누구지? 장주님이 말씀하시던 대인이신가? 일단은 살고 봐야 해.’
끄덕끄덕.
구산은 열심히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휙, 데루르르.
맞다, 얼굴을 잡은 손의 주인은 가만히 놔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구산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자신을 던진 자의 모습을 보려 했다.
그러나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평범한 체구만 볼 수 있었다.
“시간 없다.”
“하!”
기합과 함께 구산은 달려들었다.
손가락을 쫙 폈다가 마디 끝만 구부려 긁었고, 양손을 겹쳐서 힘을 한곳에 모아 휘둘렀으며, 피할 방향을 예측하고 한 발을 축으로 삼아 다른 발을 힘껏 내질렀다.
턱.
“아…….”
조아와 조벽은 피하고 각벽은 다시 잡혔다.
“이 상태에서 몸을 틀면.”
“으어억!”
다리를 뻗은 채로 상체가 들리자 구산은 비명을 질러 댔다.
“손을 뻗어 봐.”
“사, 살려 주세요.”
“뻗어 봐. 안 죽어.”
바르르.
구산은 전신이 떨리는 와중에도 담담한 목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스륵.
‘어?’
힘이 담기진 않았으나 황당하게도 몸이 옆으로 꺾어진 상태에서 손이 뻗어졌다.
“각벽이 왜 나머지 세 수법보다 중요한지 이제 알겠니? 다른 수법은 각벽을 동반할 수 없지만, 각벽은 펼친 뒤에 다른 수법과 병행할 수 있어서야.”
“아, 아…….”
구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어’거리다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 용연이 혼혈을 짚어 옆구리에 낀 채 자던 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
구산이 도착한 곳은 증혁과 마찬가지로 인파가 몰려 있는 거리 안쪽의 골목이었다.
‘꿈이 아니었어.’
구산은 아직도 뻐근한 옆구리를 만지며 어젯밤의 경험을 떠올렸다.
연기처럼 사라지다 얼굴을 잡던 검은 손.
지금까지 장익에게 들었던 것과 전혀 다른 각벽에 대한 설명.
이곳까지 오는 동안 두 가지를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너냐?”
벽에 기대 딴생각을 하고 있던 구산 옆으로 온 건장한 체구의 소년이 같잖다는 듯 턱을 슬쩍 올리며 내려다봤다.
“꺼져.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구산은 대거리도 귀찮아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건장한 체구의 소년이 턱을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나 하상이다.”
‘아, 이놈이?’
―다른 놈들은 상대도 안 되겠지만 독 장주가 키우는 하상이란 놈은 꼭 밟아야 한다. 너처럼 각벽까지 간 놈이니 지치기 전에 끝내.
마필이 장원을 떠나기 전에 주의를 줬던 놈이다.
덩치도 큰 데다 오른쪽까지 점했다.
신호가 떨어지기 전에 중앙으로 가야 했으나 구산은 자리를 지켰다.
어젯밤 황당한 특훈을 받고 나니 하상의 행동이 우습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휘이익!
휘파람 소리가 골목을 울리는 순간 모여 있던 소년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팍, 파바박.
벽을 차서 거리를 벌리려던 소년이 뒤쪽에 있던 소년에게 맞아 땅을 굴렀고, 서 있던 소년은 다시 다른 소년에게 발이 걸려 자빠졌다.
구산과 하상의 싸움도 시작됐다.
쾅!
골목 안의 소년들이 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터졌다.
모든 것이 유리한 조건이었던 하상은 구산이 왼발만 올려서 자신의 각벽을 막아 내자 놀라서 발을 거둬들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구산은 하상의 모습에서 어젯밤의 자신을 봤다.
빙글.
하상의 열린 몸으로 돌며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하상은 머리를 뒤로 젖혀 구산의 손을 피하려 했다.
꽈득!
“헉!”
머리를 들은 하상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빈 몸통에 구산의 팔꿈치가 작렬하며 갈비뼈를 부러뜨린 것이다.
퍼벅!
복부에 구산의 주먹 두 방이 재차 꽂혔다.
무너지는 하상을 다시 떠오르게 만든 것은 구산의 오른발 정강이였다.
털썩.
하상은 일어나지 못했다.
“후우, 후우.”
구산은 흥분된 표정으로 엉겨 붙어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소년들을 둘러본 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다른 소년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투신. 그분은 투신이셨어. 나를 선택하신 거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그는 자신보다, 사범인 장익이나 장주인 마필보다 각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투신.
그래야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설명된다.
오로지 투신을 만나겠다는 꿈 하나만 꾸며 일 년을 수련했다.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가르쳐 주신 것을 완전히 익히면 그때 다시 와 주시겠지?’
투신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자 저절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용연은 앞쪽 건물들 중 한 곳의 지붕 위에 서서 구산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번 가르쳐 준 동작을 응용해 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괜히 나서서 미련만 생겼네.”
용연은 쓰게 웃었다.
자신이 만든 무공을 익히고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뿌듯함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구산을 도와주고 말았으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구산의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지금, 강호삼대세력을 향해 판을 짜고 장을 마련해 한 명, 한 명이 톱니바퀴처럼 제 역할을 하도록 조율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묵 노야이기 때문이다.
묵 노야는 복수를, 자신은 복수할 수 있도록 필요할 때 창이 되어 뚫어 주는 것을.
서로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다.
“묵 노야가 내 또 다른 신분을 투신이라고 했으니 내게 도움을 청할 때까지 있으면 만날지도 모르겠다.”
용연은 훌쩍 지붕을 넘어 사라졌다.
구산 덕분에 묵 노야와의 관계를 다시금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묵 노야는 동료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나는 관계란 것을.
***
[노야, 기가 막힌 녀석을 발견했습니다. 구산이라고 마 장주가 교육시킨 녀석인데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각벽을 응용해서 하상이란 녀석을…….]
“음?”
탁자 위로 수북이 쌓인 쪽지들을 읽어 나가던 묵 노야의 시선이 멈췄다.
각벽을 응용?
지난 일 년여 동안 ‘응용’이란 단어 자체를 처음 들어 봤는데, 조아나 각지, 조벽이 아니라 가장 익히기 힘들어하는 각벽의 응용?
“구산? 몇 살이지, 교선?”
묵 노야는 옆을 돌아봤다.
“열다섯입니다, 노야.”
교선이라 불린 여인은 장부를 넘겨 확인 후 허리를 낮춰 대답했다.
갸름한 얼굴에 목선이 드러난 옷을 입고 머리를 올린 삼십 대 여인이었다.
“올려 보내라고 전해 주게.”
“예, 노야.”
“교진과 교미에게 한 명이 추가됐다고 알려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노야.”
“너희 세 자매를 얻은 건 내게 있어 최고의 운이 아닌가 싶다.”
묵 노야는 교선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교선은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양손을 배꼽에 댄 채 다가갔다.
“은하소수의 성취는 어때?”
“노야의 은혜로 언니와 동생 모두 삼 성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삼 성? 흐음.”
묵 노야는 교선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교선은 동공을 떨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천녀와 두 자매의 자질이 미흡하여 노야께 근심을 드렸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아무래도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그 정도 성취로는 대업에 방해만 될 뿐이야. 오늘부터 너희 세 자매는 나와 지내자꾸나. 투신께서 폐관 수련을 끝내고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무공보다는 너희들 몸부터 완성해 놓아야겠다. 삼십육박투와 팔천무녀는 투신의 손과 발이나 다름없거늘.”
묵 노야의 목소리에 짐짓 노여움이 실렸다.
“흐흑. 노야께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천녀들을 거둬 주신 은혜, 목숨으로 따르겠습니다.”
교선은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바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셋은 됐고. 나머지 다섯도 곧 준비가 끝난다. 몸만 완성되면 비전대법은 언제든 펼칠 수 있다.’
묵 노야는 바닥에 엎드린 교선을 내려다봤다.
그 눈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며칠 후.
구선은 마필과 함께 묵 노야의 앞에 섰다.
더벅머리에 순진한 눈을 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소년이었다.
살짝 묵 노야의 표정에 실망이 묻어났다.
“잘 싸웠다고?”
“예.”
구선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신이나 마찬가지인 투신을 만난데 이어 신의 대리인이라는 묵 노야까지 직접 보게 됐기 때문이다.
“각벽을 응용하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지?”
“노야, 이놈이 그런 걸 배웠을 리 없습니다. 저와 장 사범이…….”
마필은 묵 노야의 첫 질문에 사색이 되어 대신 나섰으나 교선의 향기가 밴 부채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투신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