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모오는 인이예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재빨리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
그제야 인이예는 웃으며 창고를 나섰다.
“둘째 아가씨, 만세!”
일꾼 중 한 명이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나머지 일꾼들도 환호로 답했다.
“아가씨, 거처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창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인이예의 시중을 드는 비녀가 다가왔다.
“왜?”
“지부에서 보낸 사람이 아가씨께 드릴 서찰을 갖고 왔답니다.”
“지부?”
인이예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
[눈에 들어온 것부터 살피시면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이 문양은 은패로 찍은 거야. 용 공자님이 서찰을 왜 보내셨지? 눈에 들어온…… 음?’
인이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찰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 일단 쉴 생각으로 눈을 뗐다.
그때, 방을 두리번거리는 풍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풍호는 방 안의 구조를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뒤쪽 벽부터 훑다가 서서히 창가로 시선을 옮기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서찰 심부름을 한 사람 중에 저런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것. 서찰을 가져온 저 사람밖에 없잖아?’
인이예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용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핵심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아! 이름이…….”
인이예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풍호를 쳐다봤다.
“예? 풍호. 외자를 씁니다.”
풍호는 얼른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상단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요?”
“이 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년. 그러시구나. 처음 보는 얼굴이라 이상하다 싶었어요. 지부로 다시 돌아가시나요?”
“지부장님이 따로 기별을 준다고 했습니다.”
“기별?”
“추천해 준다고…….”
긁적긁적.
풍호는 자신의 입으로 목영태가 해 준 말을 꺼내기 쑥스러워 말끝을 흐렸다.
“기별이 올 때까지 머물 곳은 있어요?”
“지난달에 파견돼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며칠 머물면 됩니다.”
“알았어요. 이건 제가 기다리던 서찰을 가져다준 보답이에요.”
턱.
인이예는 탁자 위에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놓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꽤 많은 금액임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서찰이었어요. 가져가세요.”
“그,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풍호는 주머니를 집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인이예가 소문과 달리 점괘를 이토록 추종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안채로의 잠입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풍호가 방을 나가자 인이예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눈이 밝은 자는 셈도 밝지. 저자의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해서 보고해.”
“명을 받듭니다.”
창문 위쪽이 불룩해지는 것 같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제가 위험한 자를 옆에 둬야 할지도 모르는데 주의만 주시고 직접 오시지는 않고. 흥, 실망이에요.’
인이예는 입술을 삐죽이며 하늘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창문에 양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댔다.
용연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상함에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
꿈틀.
적휘는 어제 오늘 용연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말 수도 적어진 데다 돌아볼 때마다 미간은 찌푸리고 있어서 말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용연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해도 뻗을 정도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다.
“용 선배님,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음?”
용연은 갑자기 사과하는 적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만 화 푸세요. 다음부터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습니다.”
“……아.”
용연은 다 듣고 나서야 적휘가 왜 자꾸 쭈뼛댔는지 이해가 됐다.
진류의 소집 명령 때문에 인이예와 했던 약속을 또 지키기 힘들어져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적휘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음에 나와 합을 맞출 때는, 안가에서 얻은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예? 당연하죠!”
“그거면 돼. 내가 같이 있어서 안심하고 마신 것일 테니 내게도 책임이 있지.”
“걱정하지 마세요.”
적휘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가에서의 연공법은.”
“안가에서의 연공법이라뇨?”
적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놀란 표정으로 되묻다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입술을 따라 주욱 그었다.
진류의 거처는 이전에 갔던 곳이 아니었다.
엄청난 인파와 복잡한 길, 셀 수 없이 많은 골목.
성도(成都)의 한복판이었다.
“이쪽입니다, 두 분.”
성도로 들어서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십오륙 세 소년은 기억하기도 힘든 골목길을 거침없이 움직이다 막다른 곳에 멈춰 섰다.
딱! 딱!
소년은 소매에서 꺼낸 바둑돌 비슷한 돌멩이로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장한 한 명이 나와 용연과 적휘를 반겼다.
“고람의 가의 대주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용 학림, 적 학림. 들어가시지요. 대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소년에게 뭔가를 말하고 보낸 뒤,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텅 빈 집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의는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간 후 문을 열었다.
‘길?’
용연은 문으로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여러 가지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이 마을로 들어온 뒤 자신과 적휘를 한참 동안 데리고 다녔지만 결국은 얼마 안 되는 직선거리였던 모양이다.
피식.
방향감각과 걷는 속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쉽게 알 수 속임수였는데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 이게 뭡니까, 가 대주님?”
적휘는 문이 열리고 시끌벅적한 거리가 나오자 황당해하며 가의를 쳐다봤다.
“저야 대교님께서 시키신 일이라.”
가의도 난감한지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용연이었다.
가의가 서 있는 곳을 지나치자마자 바로 양손을 모으며 허릴 숙였다.
“용연이 진 대교님을 뵙습니다.”
돌아선 곳엔 거리를 내려다보며 부채를 흔들고 있는 진류가 있었다.
“저, 적휘가 진 대교님을 뵙습니다.”
적휘는 얼른 다가와 용연 옆에 서며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이네? 용 학림, 적 학림?”
진류는 용연과 적휘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봤다.
정확히는 용연을 쳐다봤다는 것이 옳았다.
가의가 안내하기도 전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챈 녀석.
‘그새 또 달라졌어. 이러니 용 학림이 보고 싶지 않겠냐고.’
진류는 즐거운 기분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자세를 바로하던 용연은 진류의 표정을 보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용 학림, 조일근과 구안을 혼자서 처리했다며? 보고에는 자네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안 적혀 있어서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진류가 곧바로 훅 치고 들어왔다.
“기본삼공으로만 싸웠습니다.”
“그랬군. 기본삼공만으로 검사의 경지에 오른 둘을 상처 하나 없이 처리했어.”
진류는 용연을 빤히 쳐다보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좀 더 빠르거나 느리게, 한 번을 두 번이나 세 번으로. 둘을 상대하며 약간의 변화를 줘 봤습니다. 결과는 보고드린 대롭니다.”
용연은 진류의 시선이 전신을 옭아맸으나 저항하지 않고 말을 마쳤다.
거짓은 하나도 보태지 않았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꿈틀.
진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 온 것 같구나. 수련에 박차를 가해 기본삼공의 응용을 좀 더 정밀하게 조정해 보게. 말은 좀 거창해도 별것 아니네. 속도나 횟수에 약간의 변화를 줘 보라는 것이니까. 그럼 다음 단계로 올라갈 준비가 어느 정도 됐다고 자신해도 좋네.
자신이 학림들에게 해 주던 덕담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이미 실천에 옮겨서 성과까지 냈을 줄이야.
“끙.”
진류는 낮게 신음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혼자서 조일근과 구안을 처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긴 했지만, 용연은 남들 십 년 공부를 이 년여 만에 따라잡은 모양이다.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는 용연을 보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서 거기까지 간 사람에게 더 해 줄 말이 없네.”
“예?”
“도움을 주려고 불렀더니 이미 용 학림은 스스로 깨우친 뒤라 이 말일세.”
“……아, 죄송합니다.”
용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사과를 건네는 쪽을 택했다.
‘뭐야?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러니까, 대교께서 도움을 주려고 불렀는데, 용 선배는 이미 알아서 깨닫고 실천까지…… 한 거야?’
바르르.
용연과 진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적휘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새삼 용연과 자신의 거리가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자, 하나는 해결됐고. 자네 둘을 부른 또 다른 이유로 넘어가지. 저기, 골목 안이 보이나?”
진류는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키며 용연과 적휘를 번갈아 쳐다봤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적휘는 눈을 번쩍 뜨고 진류의 손을 눈으로 좇아갔다.
진류가 가리킨 골목 안엔 사내 십여 명이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다.
‘음? 저건!’
용연은 골목 안의 싸움을 지켜보다 이채를 발했다.
사내들의 동작이 낯익은 것 같아 지켜보니 자신이 묵 노야에게 전해 줬던 네 가지 무공 중 조아와 각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대교님, 저 골목 안의 사람들을 봐야 하는 겁니까, 아니면 싸움을 봐야 하는 겁니까?”
용연은 진류를 돌아봤다.
“사람들도 그렇고 싸움도 그렇고 유심히 볼 정도는 아니야, 그렇지 않나?”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적 학림?”
용연은 멋쩍게 웃으며 적휘를 돌아봤다.
“저도 잘…… 어? 아! 저게 그건가?”
적휘는 고개를 가로저으려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진류가 적휘의 반응에 흥미를 보였다.
“삼정일사(三定一死).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삼정일사?”
“주루에서 들었던…… 용 학림과 합류하러 동동마을로 갈 때 주루에서 논쟁을 펼치던 치들 얘길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논쟁?”
진류는 저 정도 체술을 공부씩이나 하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도 그들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황당했습니다. 헌데.”
“음?”
“넷인가 다섯의 손에 모두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책? 저런 동작을 책으로 익힌다고?”
“아까 말씀드렸던 삼정일사란 책입니다. 하나 구해 올까요?”
적휘는 진류의 반응이 진지해지자 되물었다.
흥미를 느끼고 있던 진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적휘는 곧장 밖으로 나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서 책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종이 몇 장을 쥐고 올라왔다.
‘그 책이다.’
용연은 적휘의 손에 들린 책을 보자마자 묵 노야가 일 년여 전에 보여 줬던 이야기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 봐라?”
책을 읽던 진류의 눈이 반짝였다.
처음 몇 자는 대수롭지 않게 읽어 나갔으나 한 문장이 눈을 못 떼게 만들었다.
[넷은 셋이 돼야 한다. 하지만 여섯이라도 무엇을 익혔느냐에 따라 하나나 둘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다른 하나나 둘과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