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탁, 휘릭―.
한동안 뒤를 돌아보며 일직선으로 달리던 조일근은 용연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청해성 쪽으로 가기 위해 방향을 꺾었다.
구안을 맨손으로 날려 버린 놈이다.
자신이 구안보다는 강하다고 해도 용연 정도는 아니었다.
불리할 때는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에서 살아남은 지혜였다.
“후우.”
오랜만에 전력으로 달리자 입은 바짝 마르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으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살아났기 때문이다.
“분명 그 노인의 이상한 수법이었어.”
이십 년 전에 만났던 노인.
살려 줄 테니 동동마을을 떠나라고 해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몰랐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도 불쌍하게만 쳐다봤지 경계는 전혀 하지 않던 재수 없는 늙은이.
평생 그때보다 긴장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청도문주가 이번 일의 뒤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물론 허락은 했다. 구안이 마을에서 수확한 물건의 반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어. 이번에 가면 절대로 사천 땅은 죽을 때까지 안 밟는다.”
조일근은 진저리를 쳤다.
안전하다 여겼기에 딴생각까지 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때였다.
“넌, 못 가.”
‘헉!’
오싹!
속도를 줄였던 조일근은 사색이 되어 눈을 부릅뜬 채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텅!
길 쪽이 아닌 벼랑 쪽이었다.
휘릭.
조일근은 숲을 벗어나자마자 용연을 찾았다.
손에는 이미 도가 들려 있었다.
허공이라도 이대로 떨어진다면 손목에 묶어 놓은 천잠사가 있어 몸을 추스르는 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제 곧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그 전에 용연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나란했던 벼랑이 서서히 눈 아래로 내려갔다.
“하아…… 읍!”
조일근은 안도의 숨을 내쉬다 다급히 위를 올려다봤다.
다다다―.
위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아니, 뛰고 있었다.
툭툭,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치지도 않고 평지처럼 내달리던 인영이 한순간 고개를 들었다.
용연이었다.
그리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씰룩.
용연이 조일근을 향해 입가를 비튼 것이다.
고오오―.
조일근은 호흡을 삼키며 아래쪽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쿠콰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간 암석들이 튕겨 나왔다.
타다닥.
조일근은 튕겨 나온 돌조각들을 밟아 속도를 줄이는 동시에 용연을 향해 십자멸겁을 펼쳤다.
콰우―.
이전보다 배는 강한 위력의 예기가 용연과 절벽을 잘라 버릴 듯이 날아갔다.
힐끗.
용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양쪽 예기가 아닌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조일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콰콰콰콰!
거대한 괴물의 이빨이 용연과 절벽을 삼켜 버리며 엄청난 굉음을 메아리까지 데려와 일대를 울려 댔다.
끄드드드― 콰콰콰콰―.
‘아니야, 아닐 거야.’
튀어나온 돌멩이를 밟고서 허공에 멈춰 선 조일근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십자막도 최후 초식 십자천벽의 마지막 일식이 떨어지고 있었다.
쩡!
“아…… 너무 강해.”
조일근의 입에서 허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연이 먼지를 뚫고 솟구치며 자신의 도기를 엮어 만든 도인(刀刃)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휘리릭―.
조일근은 천잠사를 벽에 박고 매달렸다.
턱.
용연은 천잠사가 박힌 곳에 발끝을 대고 섰다.
―……다시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이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용연은 할아버지의 모든 기록을 봤다.
왜 그리 모든 것을 담으시려 했는지 잘 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 군림단주에 오를 기회가!
그런 분이 이런 자의 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조일근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이십 년 전, 할아버지께선 치명상을 당해 마을에서 치료를 하고 계셨다. 그 연세에도, 그 몸 상태에서도 꿈을 향해 정진하셨던 분이지. 그런데 운 나쁘게 당신을 만난 거야. 오늘, 당신처럼.”
드드드드―.
용연의 목소리가 격앙될수록 주변 벽들이 진동을 일으켰다.
차라락― 차락―.
응아린이 상체를 금빛으로 감쌌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며 진동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사, 살려…….”
쿠콰콰콰!
조일근의 말을 굉음이 먹어 버리며 위쪽의 벽들이 절리(節理)처럼 쪼개지며 그대로 쏟아져 내려왔다.
번쩍!
용연의 손에서 금빛이 일렁였다 사라졌다.
그러자 조일근의 머리 위로 먼지가 쌓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로서, 단의 까마득한 후배로서 꿈을 이어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당신은 편하게 죽어선 안 돼.”
스르―.
용연의 손짓에 공포로 의식을 잃은 조일근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용연은 그의 뒷덜미를 잡고 곧장 위로 솟구쳤다.
***
땅!
봉과 도가 부딪치며 뭉툭한 소리를 냈다.
쩔륵!
봉을 든 자의 동료가 도를 쥔 자의 허리에 비도를 박고는 날다람쥐처럼 곧장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곽승의 오른팔인 궁궁은 아우들을 구하기 위해 벌써 한 시진째 죽어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팔을 올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과욱―.
아우를 도와주고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궁궁의 목을 노리고 칼날이 날아왔다.
“윽!”
궁궁은 막을 힘이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퍽!
“아악!”
비명이 지나가고 억센 손이 궁궁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정신 안 챙겨? 이제 곧 낭수련이 우리 손에 들어오는데 다 와서 뒈질래?”
철썩!
곽승은 번쩍 들어 올려 세운 궁궁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정신 챙겼습니다. 당주님이 저 빼고 다른 놈들과 주색잡기를 하게 둘 수는 없지요. 헤헤.”
궁궁은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메마른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들어가자.”
곽승은 만도(彎刀)를 허리띠에 끼우고 돼지털 같은 머리칼을 양손으로 쓸어 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청도문도들과 부딪친 직후 곽승은 똘똘한 아우 십여 명을 데리고 마을의 담을 넘었으나, 그때는 이미 적휘와 남회가 밖을 정리하고 마을 전각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당연히 충돌이 일어났고, 지친 곽승은 몇 합 부딪쳐 보지도 못하고 적휘의 흑백이반도에 밀려 만도를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 육가 놈…… 낭수련으로 유인해…….”
곽승은 군림단 외부 식구들 뒤쪽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육초백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적 학림, 저자에게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육초백은 적휘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마을 밖에서의 활약에 대해 듣고 낭인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자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적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육초백은 멍한 표정으로 손으로 곽승을 가리켰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물러나세요.”
적휘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강해졌다.
“예, 예…….”
육초백은 머쓱해져서 있던 자리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리자 육문의 인상 쓴 얼굴이 보였다.
‘용 공자는 왜 아직 안 오고 있는 거지?’
용연이 오는지 마을 입구를 먼저 보고 용추루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온다! 옵니다, 숙부님!”
육초백은 환하게 웃으며 용추루 쪽을 가리켰다.
육문과 육방 등은 용추루 쪽을 돌아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용연은 용추루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나와 곧장 곽승에게 다가왔다.
“누구?”
용연이 적휘를 돌아봤다.
“혼구당이란 곳의 당주라고 합니다. 담을 넘어오는 걸 잡아 두었습니다.”
“잘했다. 남 대주님, 제가 알아야 할 게 있나요?”
“도적 떼들은 삼분지 일만 달아났고, 낭인들은 이곳에 있는 자들이 전부입니다.”
남회는 자신이 참여한 싸움에 대해서만 보고했다.
“용 공자, 곽 당주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네. 자네도 알아야 할 일일세.”
육초백이 다시 큰 소리로 용연을 부르며 앞으로 나섰다.
용연은 곽승과 제압된 일행들을 눈으로 훑고는 돌아서서 육초백에게 다가갔다.
“뭐죠?”
“이상하잖은가?”
육초백의 습관적인 말투였다.
용연은 말이 이어지길 기다려 주었다.
“내가 저들을 찾아간 날짜는 제각각일세. 그런데 저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날 왔다는 거지. 분명 저들 뒤에 누구…….”
“하탄루주님.”
“음?”
“제가 처리할게요.”
용연은 육초백의 말을 자르며 슬쩍 거리를 두고서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릴 키웠다. 그러고는 육초백을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신호를 주었다.
“백아, 용 학림이 일을 하도록 두자꾸나. 이리 오거라.”
용연의 신호를 먼저 알아들은 육문이 나섰다.
육초백이 뭐라고 또 한마디 꺼내기 전에 손목을 잡고 뒤로 끌었다.
그 모습에 용연은 육문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곽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곽승은 용연이 자신을 향해 돌아선 것을 봤을 뿐인데 몸을 떨었다.
꿀꺽.
마른침을 채 삼키기도 전에 용연의 발이 떨어졌다 닿았다.
꾸― 웅―.
‘윽!’
거대한 종이 머릿속을 때리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구토가 일고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재빨리 손을 들어 양쪽 귀를 막았다.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용연이 멈춰 선 것을 보고 이번엔 온몸의 털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쿵쿵쿵쿵.
곽승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릴 들었다. 아니, 이미 펄떡이고 있었는데 이제야 느끼게 됐다는 말이 옳았다.
“오, 오지 마.”
곽승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고개를 흔들며 용연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꾸― 웅―.
용연은 무심한 눈으로 한 걸음 다가섰고,
꾸― 웅―.
굉음이 더욱 커져서 곽승의 뇌를 흔들었다.
“으으…… 그, 그만!”
용연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곽승은 양손을 귀에서 떼어 머리칼을 쥐어뜯음과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왜 귀를 막는 거지?’
적휘는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엇갈려 잡았다.
곽승과 달리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누구도 소리에 반응하는 자는 없었다.
용연이 곽승에게만 들리도록 뭔가를 한 것이다.
적휘는 천천히 용연을 돌아봤다.
곽승 앞에 선 용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용연의 걸음에 뭔가가 있는 것일까?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오직 곽승에게만 가하는 무형의 압박 같은?
그러나 학림이 그런 신기를 펼칠 수 있는 건가?
적휘가 만나 본 최강 학림인 무묵과 양안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용 선배가 이미 학림 수준을 벗어났다는…….’
적휘는 생각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이라며 다짐을 했는데, 저 모습을 보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