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조일근의 동공이 작게 수축됐다.
이십 년 전에 자신이 죽였던 유령의 흔적을 다시 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 저놈입니다, 조 대협!”
고양이 경악한 표정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조일근과 구안은 고양이 가리킨 곳을 돌아봤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양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인영.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반응한 사람은 구안이었다.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기를 실처럼 뽑아 인영에게로 보냈다.
심안기(心眼氣)란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기를 실처럼 풀어내 상대의 내공 정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수법이다.
틱.
움찔.
구안은 내보낸 기사(氣絲) 한 가닥이 끊어진 줄 알고 눈을 떴다가 모든 실이 끊어졌음을 깨달았다.
“좋네, 좋아.”
구안이 자신도 모르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조일근을 돌아봤다.
‘청도문 사천왕들보다 강한 자가 둘이라. 둘 중…… 당신이군.’
용연은 구안의 몸에서 발산된 기가 접근하자 바로 차단시킨 후, 흰 눈썹 노인, 조일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구안은 검을 차고 있었고, 조일근은 도를 쥐고 있었다.
“조일근?”
용연의 입에서 대뜸 조일근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일갈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영과 청도문 무리들이 눈을 크게 치뜨며 일제히 몸을 뒤로 뺐다.
“나를 아는가, 젊은이?”
조일근은 용연이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지.”
용연은 조일근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으며 조일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머릿속에는 조일근과의 만남에 대해 적어 놓은 할아버지의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내 일수를 받고서 낙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나를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라 여겼다.
그만 돌아가라고, 그만한 무공을 익힌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타일러 보내주려고 했다.
빨리 동굴로 돌아가 연구할 욕심에 대거리하는 것이 귀찮았던 것이겠지.
그래서 그자에게 거리를 허용하고 말았다.]
“사천은 초행이거늘 나를 어찌 안다는 건가?”
조일근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며 용연에게 다가갔다.
고영의 부하들은 두 사람이 만나도록 양옆으로 길을 내주었다.
십 장, 칠 장, 사 장.
먼저 걸음을 멈춘 쪽은 조일근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군. 대답을 했던가? 듣질 못해서 말일세.”
조일근은 여전히 너그러운 말투를 유지했다.
“이십 년 전에 온 곳을 잊은 걸 보니 나이를 먹은 건 맞는 것 같네.”
“음?”
“이쯤이면 되지 않나?”
용연은 이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러자 조일근의 눈에 아주 잠시 이채가 번득였다 사라졌다.
용연이 말하는 거리의 의미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십 년 전에 만났던 무시무시한 노인의 후손인 것이다.
―내가 다치긴 했어도 이 장 정도의 거리라면 그자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슥.
용연은 조금 더 움직여 조일근과의 거리를 일 장으로 좁혔다.
‘그 노인이 죽은 건가?’
조일근은 지난 이십 년간 단 한 번도 용잠의 죽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눈앞의 애송이는 지금 객기를 부리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복수라도 할 요량인 것 같지만, 조일근에겐 이러저러한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쾌액!
인상 좋은 얼굴로 웃고 있던 조일근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지며 현란한 빛과 함께 용연을 노리고 경력이 폭사됐다.
용연의 손이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쩡!
용연은 조일근의 경력이 담긴 도를 손등으로 때렸다.
“제법!”
조일근은 도신을 통해 전달되는 용연의 묵직한 내공에 놀랐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선공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힐끗.
용연의 눈동자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걸 보자 조일근은 버럭 일갈을 터트리곤 공격을 이어 가려 도를 흔들었다.
그러나 용연은 조일근이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곧장 떨어졌다.
쾁. 쾁. 쾁.
형체도 없는 무형의 칼날이 바퀴처럼 회전하며 용연의 몸을 노리고 쇄도해 왔다.
“놈! 이미 늦었다!”
조일근은 그 와중에도 용연의 집중력을 흩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곧 십자풍운에 잘리게 될 용연의 모습을 보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순간, 용연의 손이 흔들렸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십자풍운은 그대로 용연의 몸을 덮쳤다.
쩡!
“……!”
조일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십자풍운을 막고도 용연은 한 손을 뻗은 채 옷자락만 펄럭일 뿐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그극―.
충돌 여파가 뒤늦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울룩불룩 땅거죽이 일어난다 싶더니 사방으로 엄청난 양의 흙이 암기처럼 뿌려졌다.
콰콰콰콰―.
“피, 피해라!”
“으아아아악!”
고영의 부하들이 소리를 지르며 흙더미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차라락.
십자풍운을 부순 용연의 손에서 금빛이 걷혔다.
응아린이 팔찌 형태로 돌아간 것이다.
용연은 두어 번 손을 쥐었다 폈다.
어깨가 덜컥거리긴 했지만 내상을 입힐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응아린이 아니었더라도, 조일근이 멈춰 섰을 때 이미 닿은 상태이기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삼제의 세 번째 원리로 부숴 버렸을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은 조일근을 보자마자 들었다. 그냥, 이 정도쯤 될 것 같다는.
슥.
용연은 조일근을 향해 손을 들어 까딱였다.
이게 전부냐는, 이대로 끝낼 거냐는.
“어이쿠, 이런 주책이 있나. 청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노인일세. 젊은 나이에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구만. 이분은 십자막도란 별호의 주인이신…….”
구안은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조일근의 표정이 저토록 굳은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주려는 것이다.
“조일근. 알고 있다.”
용연은 구안의 말을 자르며 앞으로 한 발 크게 옮겼다.
조일근에 대해 알고 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에 놀라 구안은 손을 들어 용연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구안.”
“……!”
구안은 너무 놀라 손을 든 채로 굳고 말았다.
말을 시켜 조일근에게 시간을 벌어 주려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조일근도 구안을 보고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군림단 학림 용연이다. 사천 땅에서, 그것도 군림단이 보호하는 동동마을을 공격한 죄를 지금부터 묻겠다.”
불룩.
말을 마친 용연의 턱에 근육이 튀어나왔다.
“군림단?”
구안은 이채를 발했다.
군림단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천성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 가지 일에 끼어들어 푼돈이나 탐내는 곳.
이것이 구안이 알고 있는 군림단의 정보였다.
물론 몇 가지 더 있다.
총 인원은 스물아홉 명이고, 그중에 학림은 가장 아래 서열이라는 것 정도.
“아! 그럼, 죽여도 되겠네.”
쉬악!
구안은 사악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검신이 드러나자마자 강렬한 기파가 광채를 더해 사방으로 퍼졌다.
용연의 시야를 막아 놓으려는 허초였다.
추추추.
커다란 빛을 주름처럼 접어 뿌린다는 태문일휘(太紋一麾)였다.
일 장이 약간 넘는 거리에서 펼친 검이기에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상은 입힐 자신이 있었다.
콰과과광!
충돌은 일격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해서 굉음을 이어 나갔다.
드드드드―.
“……!”
구안은 소리가 이어질수록 흔들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였다.
턱.
누군가 구안의 뒤를 잡아끌었다.
쾅!
푸카학―.
구안이 서 있던 자리가 폭발하며 반경 일 장은 족히 될 웅덩이를 만들었다.
쉬쉬쉬―.
구안을 구해 낸 조일근은 자신을 따라오는 소리를 듣고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조, 조 형, 감사…….”
“인사는 나중에. 일단 저놈부터 처리하세.”
“예.”
구안은 조일근의 몸을 축으로 회전하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쉬아악!
검기가 일 장 가까이 뻗어 나가다 변화를 일으키며 용연의 하체를 노리고 늘어났다.
스윽―.
검기가 다가오자 용연의 하체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동시에 용연의 상체가 주욱 늘어나 구안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미친.’
조일근은 구안이 검을 뻗는 속도보다 빨리 용연이 다가오자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물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구안의 행동을 지켜본 것은 당연했다.
구안이 검을 가슴 쪽으로 당기는 것이 보자마자 조일근은 몸을 돌려 무작정 도망쳤다.
“나, 나는 아니야…….”
구안은 검신을 방패처럼 앞에 세우고 크게 치떠진 눈으로 용연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자신은 조일근과 한패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용연의 눈에 그 모습은 참으로 구차해 보였다.
턱.
용연은 내민 손을 구안의 검신에 댔다.
구안이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용연의 손이 닿았다는 의미를 모르기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쾅!
“크아아악!”
구안은 벌린 입으로 피를 토하며 실 끊어진 연처럼 수 장을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으으으.”
“사, 살려 주…….”
겁에 질린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중에는 고양도 끼어 있었다.
용연이 무슨 수법으로 태문검 구안을 날려 버렸는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다.
저런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곳을 털겠다고 이 먼 길을 왔던 것이다.
전의를 상실한 청도문도들은 항복의 자세를 취한 채 용연의 선처만을 기다렸다.
“다시는 사천 땅을 밟지 마라.”
용연은 고양을 쳐다봤다.
끄덕끄덕.
“매, 맹세합니다. 펴, 평생 사천 땅은 쳐다보지도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고양은 고개부터 끄덕여야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하는 내내 쉬지 않았다.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으나 이미 용연은 조일근을 쫓아간 뒤였다.
***
쉬쉬쉭―.
용연은 아래쪽 숲을 내려다보며 바위 위를 달렸다.
조일근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놓칠 수도 있기에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파악하며 쫓는 것이다.
‘음?’
한순간, 용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예상하던 위치가 아니라 좌측의 나뭇가지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텅―.
곧장 몸을 숲으로 떨어뜨리며 가파른 경사에 솟아 있는 돌들을 징검다리처럼 톡톡 디디며 속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