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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96화 (96/232)

96화

“컥!”

상진은 자신의 얼굴 가득 퍼지는 고통과 선명하던 용연의 모습이 뿌옇게 번지는 것까지만 볼 수 있었다.

혼절해서 비명도 지를 수 없게 됐다.

용연은 상진의 광대를 함몰시킨 주먹을 든 채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으면 이렇게 된다.”

용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분한 음성이 끝나자 백여 명이나 되는 상진의 부하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질 행동에 집중했다.

고작 주먹 한 방에 상진이 기절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대 어린 시선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빡!

용연의 주먹이 상진의 얼굴을 뭉개며 둔중한 타격음을 퍼뜨렸다.

한쪽으로 날아가는 상진을 보는 용연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상진의 부하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으, 으, 으…….”

“도, 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자들의 진저리와 신음은 순식간에 뒤쪽까지 공포를 퍼뜨렸고, 먼저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이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퍼펑!

우뚝.

막 도망치려던 자들의 발이 바닥에 붙었다.

서너 명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내는 거친 소리 때문이다.

쓰러진 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용연의 시선이 천천히 앞쪽에 있는 자들에게로 옮겨 갔다.

순간, 공포로 인해 머릿속이 하얘진 자들은 용연의 경고를 잊은 채 조금 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동료의 옷자락을 잡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놔!”

동료는 옷을 매몰차게 뺐지만 다른 손들이 달려들었다.

“야 이 개자식아, 너만 살겠다고…….”

퍽!

누군가가 동료의 등을 가격해 쓰러뜨렸다.

순간, 도망치기에 급급해진 청도문도들의 눈이 독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용연은 그들이 만든 상황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발을 들었다 내렸다.

꾸― 웅―.

발 구름에 의한 묵직한 소리는 상황을 극한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끄악!”

“놔, 내가 먼저…… 아아악!”

한 걸음이라도 더 용연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뒤에 있던 자들은 앞에 있는 동료의 등을 베고 찌르며 도망쳤다.

그 모습까지 보고나서야 용연은 시선을 들었다.

적휘가 상대하고 있는 인원도 이 정도쯤 될 것이다.

도움부터 주고 이전에 멈춰 세운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

훙―.

고개를 돌려 피한 뒤 옆으로 찔러오는 칼날을 허리의 회전으로 흘린다.

빡!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다른 손을 뻗어 악조궁을 펼친다.

텅―.

조금 전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쿵.

발을 굴러 물러나며 흑도를 어깨높이에 두고 백도를 허리높이에 둔 채 회전했다.

콰웃, 쾃!

흑백이반도의 길이는 다른 도의 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진기가 주입되니 회전반경이 석 자가량으로 늘어났다.

흑백이반도로 만들어 낸 돌풍이 지나간 자리엔 수많은 죽음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훅, 훅.”

적휘는 숨을 빠르고 간결하게 뱉고 마시며 다음 목표를 찾아 눈을 빛냈다.

쩡!

뒤쪽에서 격돌이 일어났고 누군가가 튕겨져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 대주님!”

적휘는 외침과 함께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남회를 튕겨 낸 자는 한쪽 눈을 치켜떠서 적휘를 쳐다보곤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리고는 뒤로 물러섰다.

적휘의 무위를 지켜봤기에 정면 대결은 피하려는 것이다.

“비겁…… 음?”

이를 악물며 물러나는 자에게 욕을 하려던 적휘는 급히 상체를 들어 속도를 줄였다.

그런 적휘를 보며 물러서던 중년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청도문 사천왕 중 한 명인 흑천도 배무는 적휘가 속도를 줄인 이유를 지쳤다는 뜻으로 여기고 웃었다.

“너도 사천왕 중 한 명이냐?”

턱.

“누, 누구…….”

흑천도 배무는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닿자, 온몸의 털이 일제히 서는 것을 느꼈다.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적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겁먹은 개처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누군지 물은 것이다.

“군림단 학림 용연.”

“군림단? 군림단이 왜 우릴?”

배무는 의아해서 혼잣말로 되물었다.

군림단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사천성을 드나들 때 항상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척을 진 적도 없는데 왜 남의 뒤를 잡는단 말인가?

“동동마을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으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윽!”

배무는 신음을 흘리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용연이 쥐고 있던 배무의 머리를 눌렀기 때문이다.

“사천 땅으로 이만한 인원을 세 무리나 끌고서 동동마을로 왔다. 회합이라고 믿기엔 문파 전원을 데려온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오해를 했지?”

용연은 질문을 던졌으나, 이미 그 어떤 대답도 소용없음을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그러자 고개도 들지 못하는 배무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고작 한 명, 그것도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군림단원이라는 자에게, 자신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부르르.

적휘의 몸이 전율로 인해 떨렸다.

‘뭐, 뭐야? 전부 용 선배에게 집중하느라 싸움이 멈췄어.’

단순히 한 사람을 제압한 정도의 장면이 아니었다.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형도준 교림이 한 공간을 장악할 때 보여 준 신위에, 한 번은 담영호 교림이 등장만으로 일대를 침묵시켰을 때, 그리고 지금이다.

그동안 혼자서 용연과 경쟁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저 모습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가를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서두르면, 조금 더 노력하면, 조금 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건가?’

적휘는 용연의 자리에 자신이 서 있다고 가정해 봤다.

그것만으로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절레절레.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계획이 서 있나?

절레절레.

자신에겐 없는 두 가지를 용연은 갖고 있었다.

아주 불편하지만 그 시작이 용연에게서 일어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외감.

용연을 보며 떠올린 이 감정은, 앞서 형도준과 담영호에게서 느꼈던 것과 일치한다.

적휘는 배무에게 튕겨져 나갔던 남회를 돌아봤다.

일어난 남회는 용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픽.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이번 임무에선 자신이 할 일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으니 정리나 도와야 할 모양이다.

우뚝.

남회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적휘의 발이 멈췄다.

‘가만, 대교께서 알리라던 태문검 구안과 십자막도 조일근은 오지 않은 건가?’

적휘는 동동마을로 눈을 돌렸다.

그들 둘이 이곳을 거치지 않고 곧장 마을로 갔을 수도 있잖은가?

“여긴 적 학림에게 맡길 테니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마을로 가서 기다려.”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적휘는 깜짝 놀라 돌아서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예.”

용연은 적휘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마을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음? 용 선배님은 마을로 가지 않으십니까?”

적휘는 다급하게 물었다.

“아직 남았다. 정리하고 갈 테니 서둘러.”

“저도…….”

“마을을 돕는 것을 우선으로.”

용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적휘의 말을 자르곤 창천비를 펼쳐 서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

흔들.

백의와 연하늘색 옷을 입은 인영 둘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을 물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영하듯 소리 없이 지나쳐 갔다.

“기대됩니다, 조 형.”

늘어뜨린 반백의 머리칼이 산발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흔들리도록 한 태문검 구안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냈다.

얼굴형은 갸름했고 시선은 좌우로 향하지 않고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서 저 눈매밖에 보이질 않네. 흐흐흐. 집요한 성격이 어디서 나오나 했다.’

십자막도 조일근은 구안을 슬쩍 돌아보곤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주 잠깐 동공이 확장됐다 원래 형태로 돌아갔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눈동자가 반응을 한 것이다.

“나도 이십 년 만이라 어떻게 변했을지 기대된다오, 구 아우.”

“그때는 어쩌다 오시게 된 겁니까?”

“음? 이십 년 전 말이오?”

“예.”

“허허허. 이유가 따로 있으려고. 그냥…… 재미 삼아?”

히죽.

조일근은 이십 년 전 일을 떠올리는지 활짝 웃었다.

‘쪽을 올린 흰머리와 광대까지 내려온 흰 눈썹만 보면 영락없는 성인군자인데 말이야.’

구안은 조일근의 웃음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저 얼굴뿐만 아니라 대화를 해 봐도 전혀 소문의 학살자로는 안 보이는 까닭이다.

***

고양은 움직이지 않은 채 상진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긴 했지만, 다른 연락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나서 움직이고 싶었다.

여전히 겁먹은 부하들은 자신을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들을 다독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사람이 그렇듯이 고양은 자신의 생각에 갇힌 채 판단을 닫아 버렸다.

“안 움직이나?”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을 데려온 기억이 없으니 돌아봐야 하지만, 고양은 그런 기억이 없기에 돌아보지 않았다.

“다들 귀신이라도 봤나? 왜들 얼어 있는 거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고양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젖을 울럭거리며 돌아봤다.

동공 안으로 두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조, 조 대협! 구 대협!”

강제로 입을 닫아 두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양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졌다.

“아!”

“두 분이 와 주셨다!”

고양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청도문 제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자신의 머리칼을 쥐며 바닥에 엎드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이것들이 뭐하는 거야?’

조일근은 교주라도 본 것 같은 자들의 반응에 미간 찌푸렸다.

“누가 설명 좀 해 주지 않겠나? 문주 말로는 먼 길 다녀올 만하다고 하던데 말이야.”

구안은 고양이 아닌 앞쪽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고양의 부하들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청파도가…….”

고양은 재빨리 나섰다.

그러나 고양의 말을 막는 손짓이 있었다.

구안이 뭔가를 발견하고 돌아보자 조일근이 손을 든 것이다.

“가서 보고.”

“조 대협, 보통 놈이 아닙니다.”

고양이 조일근을 따라 움직이며 말을 덧붙이려 했으나, 역시나 이번에도 조일근의 손짓에 입을 닫아야 했다.

“조 형, 누가 이들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바닥에다 경력을 쏟아 냈네요.”

구안은 길이를 눈으로 가늠하고 알려 주듯 양손을 벌렸다.

그 모습에 조일근은 눈을 빛내며 구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곧장 훌쩍 경사면을 뛰어내려 만들어진 흔적을 올려다봤다.

“허어…….”

조일근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저 흔적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이 근처에서.

‘놈이 살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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