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왁! 왁왁!
오른쪽 너머에서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에 말과 비슷한 덩치의 감산박 두령 오구대는 얼굴을 일그러졌다.
“두령, 낭인 놈들이 내는 소립니다.”
둘째 모량이 걸걸한 목소리를 뱉고는 팔뚝으로 수염을 쓸었다.
“안 돼! 우린 보이고 저것들은 안 보여! 우리가 먼저다. 뭐라고?”
“우리가 먼저다!”
와와와와!
둘째 모량이 복창하자 감산박 식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동동마을로 내달렸다.
***
혼구당과 감산박의 움직임을 감지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움직이던 검은 무복 이백여 명을 이끄는 사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냄새나는 족속들이란 하여간. 쯧.”
청도문 사천왕 중 한 명인 절명도 고양은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리며 혀를 찼다.
청도문주이자 사천왕 중 한 명인 감백은 이십 년 전에 한 번 턴 적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동안 금고를 다시 채워 가져가 달라고 왔으니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두 곳의 사냥감들은 덤이라던가?
피식.
내리는 결정마다 마음에 드는 문주가 아닐 수 없었다.
힐끗.
고양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공격 명령을 내리기로 한 사천왕 중 악파도 상진의 전서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슥슥.
말을 쓰다듬으며 우측 먼 곳을 쳐다봤다.
안개인 것 같던 연기가 꽃처럼 피어나듯 몽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천도가 움직였으니 곧…… 왔군.”
푸드득.
시선을 동동마을 뒤쪽으로 던진 그사이 전서구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주군!”
수족 중 한 명이 고양을 부르며 다가왔다.
척.
손을 들어 자리에 멈춰 세운 후 부하들을 죽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앞쪽의 냄새나는 족속들 사냥을 시작한다.”
사악.
고양의 혀가 입술을 핥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사사삭.
이백여 명의 부하들이 빠르게 좌우로 퍼지며 동동마을을 향해 움직였다.
***
탁.
어디선가 던진 표창에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퍼져 있어 대략적인 수치만 전합니다. 낭인 백오십여 명 빠르게 마을로 접근 중.]
받아 든 손이 바쁘게 붓을 놀려,
[도적 떼들 백여 명. 정문으로 접근.]
자신이 쓴 쪽지를 겹쳐 돌돌 말아 표창에 매단 뒤, 부하에게 건네며 눈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부하는 전력을 다해 움직여 정문이 보이는 위치에 다다르자마자 표창을 날렸다.
팍.
동동마을 입구에 선 장승목에 표창이 박혔다.
남회는 표창에서 회수한 쪽지를 용연에게 건넸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용연의 입에 맞췄다.
용연의 손이 한 장을 넘겼을 때, 활시위라도 당긴 것처럼 팽팽한 긴장이 주위를 감쌌다.
‘음? 뭐, 뭐야, 이 분위기는?’
용연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보던 적휘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고개를 돌려 양옆을 번갈아 쳐다봤다.
주위를 둘러싼 외부 식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용연의 손짓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전을 앞둔 전장의 막사 안에 있기라도 한 것일까?
숨이라도 크게 들이마시면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이라니.
지금까지 다른 선배들과 많은 임무를 수행해 봤지만, 그 어디서도 느껴 본 적 없는 분위기였다.
외부 식구들의 각오가 그만큼 단단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후우.”
적휘는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곧 시작될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쪽지를 읽은 지 일각이 지날 때까지 용연은 텅 빈 허공을 바라본 채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힐끗.
허공을 향해 있던 용연의 시선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마을 동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용 학림, 적이 보입니다.”
남회가 앞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적 학림, 뒤쪽을 맡아. 머리를 처리하면 좋고, 아니더라도 적 학림을 쫓아오게 만들어.”
용연은 남회가 아닌 적휘에게 먼저 명령을 내린 후 앞쪽을 돌아봤다.
“남 대주님, 정면 돌파 후, 적 학림과 만나세요.”
“아!”
적휘는 이어진 용연의 명령을 듣고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창천비를 펼쳐 허공에 떠오른 직후, 고개를 돌려 용연을 돌아봤다.
허리를 숙였다 편 남회가 외부 식구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연은 어디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군처럼 지시만 내리는 건가?’
조금 전에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이 스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적휘와 남휘 등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리에 선 용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전의 임무 수행 시와 마음가짐이 달랐다.
어떻게 움직여야 빠른 중재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제압할 수 있을까?
이전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내려서 움직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시는 저들이 동동마을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도문은 내가 맡아야 한다.’
적휘와 외부 식구들의 싸움을 동동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동안 청도문과의 싸움을 끝내야 한다.
십자막검 조일근.
경도방 때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면 그를 부르지 않더라도 소식만 전하면 된다. 전해 들은 그의 성격상 오지 않고는 못 버틸 테니까.
그때, 멀리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다가왔다.
팟.
용연은 날아온 표창을 검지와 중지로 잡아챘다.
[청도문으로 추정되는 무리 세 곳이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텅―.
용연의 신형이 서쪽을 향해 곧장 솟구쳤다.
동시에 세 곳이 움직일 정도의 인원이라면 청도문일 것이다.
***
사악.
앞쪽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는 백여 명 정도의 무리를 보자 절명도 고양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피어났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눈으로 보는 광경은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척.
들어 올린 손을 내리기만 하면 피와 비명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기대감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몸 안을 휘도는 진기를 단전에 모았다.
“모…….”
막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고양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급히 몸을 멈춰 세워야 했다.
콰웃.
고양은 자신의 일 장 앞 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틱.
반응은 땅이 아닌 앞서 움직이던 부하들의 몸에서 시작됐다.
팔과 다리가 잘려진 몇몇이 고양을 돌아보며 비명을 지르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고양은 그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콰콰콰콰―.
고양의 일 장 앞 땅이 벌어지며 부하들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무려 오 장여에 달했다.
고양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사방을 빙그르 돌며 이어질 암습이 어디서 올지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암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
고양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리려다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떠는 부하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암습이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일단 암습한 자의 무공 정도를 파악해 두기로 했다.
***
힐끗.
용연은 방향을 틀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사천왕 중 한 명이란 자의 반응을 보고 마무리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움직인 것이다.
부하들에게 암습에 대비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고 흔적부터 살피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저런 자는 암습이 없다는 확신을 스스로 갖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쉬쉬쉭―.
속도를 더 냈다.
또 다른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의 무리들과 다를 바 없이 정문을 향하는 도적 떼들을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됐다.
달리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먼지구름이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저쪽으로 가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이곳부터 처리해야 한다.
선두의 몇몇이 보였고 한 명이 지시를 내리는 손짓을 하자 양쪽으로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일어났다.
‘악조궁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용연은 선두에 선 자의 자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적당히 한두 수 섞어서는 나머지 자들의 발을 묶어 두기 힘들 것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시선이 서서히 떨어지며 한순간, 선두에 선 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텅―.
용연은 지면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양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며 손안으로 들어온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아 쥐었다.
공기는 곧 진기로 변해 손을 빡빡하게 만들었고 그 상태 그대로 선두에 선 자의 좌우를 향해 던지듯 내밀었다.
고오―.
소리만 남겨두고 용연은 신형을 앞으로 쭉 잡아 뺐다.
기폭(氣爆).
용잠의 기록에 적혀 있던 수많은 응용 수법 중 한 가지로, 진기를 가둬 원하는 곳에서 터지도록 조종할 수 있었다.
쩡!
용연의 손날과 선두에 선 자의 도신이 강렬하게 부딪쳤고,
쿠콰콰콰콰―.
거대한 폭발은 악파도 상진의 부하들 앞쪽에서 일어났다.
힐끗.
용연은 폭발이 어느 정도 길이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다. 마치 눈앞의 상진은 신경도 쓰지 않다는 듯이.
“갈!”
상진은 일갈을 터트리며 자신을 무시하는 눈앞의 미친 애송이를 도에 매달아 들어 올리려 했다.
그 순간, 상진의 도를 잡고 있던 용연의 손을 금빛이 휘감았다.
용연은 여전히 고개를 뒤쪽으로 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도가 만근 거석에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 무슨…….’
상진은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올리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때, 상진의 귀로 이해하기 힘든 말이 들려왔다.
“여전히 말을 안 들어.”
어느새 고개를 돌린 용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말을 안 들어? 무슨 뜻이지?’
“이놈이 나올 정도일 줄은 몰랐어.”
용연은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한참 어린놈에게 평가받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꿈틀.
상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곳은 처음인가?”
“뭐?”
상진은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아니군. 그럼 끝내지.”
용연은 상진이 이십 년 전에 온 적 있다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없음을 깨닫고 도에서 손을 뗐다.
순간, 상진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쉬악!
상진은 도를 번쩍 들어 그대로 내리그었다.
꽈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