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혈지자(血池者)가 남긴 일화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맞나요, 소저?”
용연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듯이 툭, 뱉듯이 말하며 인이예를 돌아봤다.
“구하기 힘든 책인데 읽어 보셨네요, 공자님?”
인이예는 환호성이라도 지를 것처럼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모용기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동안 고서점에서 지내게 됐는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다 보니 그중에 그 책이 있었네요. 그건 그렇고, 소저에게 다른 걸 물어보려고 한 것 아니었소?”
용연은 별것 아니란 듯 멋쩍게 웃어보이고는 모용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요?”
인이예는 용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모용기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흠흠, 맞소. 평소엔 할 수 없는 얘길 여기선 해도 되니까.”
“이제 규칙에 익숙해진 모양이네요. 해 보세요.”
“얼마 전에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께서 돌아가신 일이 있었소. 강호에서의 죽음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전의 사건과 맞물려 파장이 커졌소.”
모용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용연을 쳐다봤다.
‘이전의 사건?’
용연은 모용기가 자신의 얘기를 제삼자의 얘기처럼 꺼내자 피식, 웃었다.
기다려 준 보람이 있었다.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와 활동 시기가 비슷한 무인이 얼마 전에 타계하신 일이 있었는데 시기가 겹치자, 철혈사자맹에서도 간과할 수 없었던지 모용세가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방으로 범인을 수소문했지요.”
이번엔 심각한 표정으로 인이예를 돌아봤다.
인이예 역시 흥미가 생긴 듯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은 건 얼마 전이었소. 한 명이 의심스럽다고. 군림단이라는 사천성에 기반을 둔 무력 집단의 교림이란 신분을 가진 자인데 상처를 입고 도주하는 것 같다고.”
모용기는 다시 말을 멈추고 용연을 쳐다봤다.
‘정황상 담 교림님이 분명한데, 도주하는 것 같다고? 그분이 도주를?’
픽.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웃어? 지금 내 말에 웃은 거냐?”
모용기는 얼굴을 벌게져서 눈을 치떴다.
하지만 더 이상의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들은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늘어놓으니 웃을 수밖에.”
“같은 교림이다, 이건가?”
“음?”
용연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모용기를 쳐다봤다.
“같은 교림으로서 동료를 보호하겠다고 대신 의창으로 가는 것 아닌가 말이다!”
모용기는 큰 소리로 외쳤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모습에 용연보다 더 황당해 하는 사람 둘이 있었다.
남회와 묵 노야였다.
“이보시…….”
남회는 더는 침묵하고 있기 힘든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푸헐! 이보게, 강호 세가의 자제. 자네, 군림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묵 노야가 남회보다 먼저 나섰다.
“또 당신이오?”
“내가 저 젊은이들에게 군림단 사람들이라고 했나, 안 했나?”
“…….”
모용기는 입을 꾹 다문 채 인정하지 않았다.
“기억이 났군. 나보다 더 모르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는 거니 고깝게 듣지 말게. 내 알기로, 군림단은 학림, 교림, 선림 세 가지 신분이 있네. 당연히 학림이 제일 낮은 서열일 테고 선림이 제일 높은 서열이겠지.”
“들어 본 적 없소.”
“뭐, 사천성 외의 지역에선 군림단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조금 전에 저 젊은이를 보고 교림이라고 했잖은가? 뭘 보고 그랬던 건가?”
“당연히…….”
모용기는 용연에게 잡혔던 손을 들어 보였다.
자신을 제압할 정도면 당연히 중간 서열은 될 거라는 뜻이 담겨 있는 손짓이었다.
“소저, 먼저 양해를 구해야겠네요.”
용연은 이쯤에서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인이예에게 포권을 취했다.
“규칙을 제안한 이유는 괜한 다툼에 상관없는 사람이 다칠까 봐 꺼낸 거예요. 이미 깬 사람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인이예는 밝은 목소리로 모용기를 돌아봤다.
규칙을 먼저 깬 사람이 모용기란 것을 알려 주려는 행동이었다.
“모용 공자, 나는 의창에 먼저 가 계신 교림님을 보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그리고 단에서 내 신분은, 학림이오.”
용연은 모용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신분을 밝혔다.
“하, 학림?”
모용기의 얼굴을 해쓱해졌다.
조금 전에 묵 노야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림이 제일 낮은 서열이고…….
고작 학림에게 제압당해 무릎까지 꿇었단 말인가?
그럼 교림의 무공은 어느 정도고, 그런 고수가 몇이나 있다는 건가?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쫓던 상처를 입었다는 교림에게로 이어졌다.
흔적만 쫓았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꿀꺽.
모용기는 마른침을 삼키며 용연을 쳐다봤다.
“정말, 하, 학림이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어떤 상태임을 잘 알려 주고 있었다.
“학림이오.”
용연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후로 배가 사만 나루에 도착할 때까지 모용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강만 하염없이 쳐다보다 내렸다.
***
“인 소저, 매 이름 좀 알려 주세요.”
배에서 내리자마자 용연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인이예가 슬쩍 다가와 용연이 올려다보는 곳을 까치발로 서서 쳐다보다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 저는 꾸끼라고 불러요.”
“아, 그런 이름이었군요. 우는 소리하고 이름이 같네요?”
용연은 훅, 끼쳐 오는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슬쩍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렇죠? 사부님은 ‘송’이라고 부르라시는데 저 녀석도 꾸나 꾸끼로 부르는 걸 더 잘 따라요.”
“저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죠. 꾸끼가 용 공자님을 잘 따르잖아요?”
“제가 육포 인심이 좋기는 하죠. 아! 쉼터로 가게 되면 어떻게 연락을 해야 될까요?”
“제가 패를 드렸잖아요? 그걸 보이시면 돼요.”
“아니요, 소저에게 연락을 드리려고요. 금룡상단 본단으로 가면 소저를 뵐 수 있나요?”
“아, 그건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할 일이 있어 본가엔 갈 수 없거든요. 어쩌죠?”
“괜찮습니다. 저도 해를 넘긴 뒤에나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허락부터 구하려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 기간 동안 소저 역시 자리를 비우신다니…… 다행이네요.”
용연은 말을 마치고 멋쩍게 웃었다.
인이예의 대답에 안도했던 것이 쑥스러워진 것이다.
“흐음, 그럼 이번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밝은 목소리와 기대 어린 눈빛이 함께 용연을 향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히. 그럼 그 말만 믿고 저는 돌아갈게요. 사부님 말씀이, 인연이든 악연이든 어느 한쪽이 꾸준히 노력하면 닿게 되어 있대요. 갈게요.”
인이예는 빠르게 자기 할 말만 하고서 훌쩍 몸을 날렸다.
“저, 저, 소저, 또 보세.”
묵 노야는 인이예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돌아가실 건가요?”
용연은 다가온 묵 노야의 어깨를 부축해 주었다.
“천무박투(天武搏鬪). 내가 쓴 책의 주인공 별호인데, 사람들에겐 편하게 투신이라고 부르게 하려고. 어떤가?”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자네 별호가 될 건데 당연히 중요하지. 이런, 자네 부하가 오는군. 다음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라고 해 주면 안 되겠나?”
“과정에 있습니다. 완성이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용연은 이어질 말을 삼키는 대신 담담한 눈빛으로 묵 노야를 바라봤다.
“흘흘. 세상을 뒤집으려다 죽더라도 전해 줄 사람이 있으니 다소 안심이 되네.”
“제자를 받으셨습니까?”
“아니. 아까 그 소저. 똑똑하던데? 가네.”
흐느적흐느적.
묵 노야는 마치 잘 아는 길이 있는 것처럼 유유자적하게 나루 아래쪽으로 걸어서 사라졌다.
***
방 안에 홀로 앉은 곽집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괜한 일 만들 필요 없다고들 하시는군.]
사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류로부터 온 전갈을 받았다.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물어볼 게 있다니 가서 몇 가지 질문에 답만 해 주고 오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서찰의 첫 글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류에게 누군가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미이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삼정뿐이기 때문이다.
“선림들께선 왜 아무 말도 없는 건지.”
곽집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 도착해서 하루를 머물렀다.
벌써 지루해지려고 하지만, 오늘 중으로 용연이 도착한다는 말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나아지고 있다.
학림 시험 때 본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객지로 떠나보낸 막냇동생을 오랜만에 보게 된 것처럼 기다려진다.
안가나 오가며 만난 단원들로부터 용연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들을 듣기는 했으나,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군림단 특성상 임무를 홀로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단원에 대한 소문은 외부 식구들에게서 나온다고 보면 틀림없다.
곽집이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과연 용연은 군림단이 원하는 일원으로 성장을 했을지 기대된다. 물론 만나서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것이다.
‘음?’
창밖으로 묘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백여 명은 될 것 같은 무리가 곽집이 묵고 있는 주루 주변을 대놓고 포위하듯 감쌌다.
만나기로 한 자들의 일행인 모양이다.
풋.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저 정도 인원으로 망이라도 치려는 걸까?
사람과 시간의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저런 걸 준비하는 자들과 무슨 얘기를 할지.
“곽 교림님, 용 학림이 곧 이곳으로 온다고 합니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계시죠.”
방문을 열고 구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갑시다.”
곽집은 곧 방을 나섰다.
“여깁니다.”
구선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여섯 명의 모용세가 무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신분을 밝히라는 뜻인가, 구 향주?”
곽집은 모용세가 무인들이 멀뚱히 자신을 보고만 있자 덤덤하게 구선을 돌아봤다.
“그런 모양입니다.”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해서 온 곽집이오.”
곽집은 이름을 밝히곤 자리에 앉았다.
“어험.”
“큼. 이 무슨.”
모용세가의 오십 대 중년인들은 곽집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곽집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셨다.
“이보시오, 곽 무인, 강호 동도라 하잖소? 지켜야 할 예의는…….”
“이름이 뭐요?”
곽집은 말을 꺼낸 삼십 대 사내의 말을 자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내게 한 말이오?”
끄덕.
대꾸도 귀찮아져서 곽집은 고개만 까딱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앞에 앉은 여섯 명이 동시에 혀를 차며 힐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어디에 몸담고 있는, 신분과 이름을 말하는 것은 상식이오.”
“청한 사람이 왔으면 일어나 맞이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야지. 그랬다면 나도 거기에 맞췄을 테고. 긴말하지 말고 후배가 온다고 하니 들어오면 얼른 끝내고 마칩시다.”
곽집은 거침없이 할 말을 하고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후후후.’
한쪽으로 비켜서 있던 구선은 나오는 웃음 때문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곽집이 아닌 다른 군림단원 아무나 저 자리에 앉혀도 조금 전과 백이면 백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의전 따위 개나 줘 버리고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
군림단의 방식으로 거친 강호를 헤치며 살아온 포식자들.
구선이 아는 군림단원들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