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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90화 (90/232)

90화

용연은 받은 게 있으니 바로 묵 노야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어 주었다.

묵 노야가 끼어든 이유가 인이예의 감정을 자신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묵 노야는 입가를 비틀고 고개를 끄덕이며 헛기침 몇 번 뱉은 후 입을 열었다.

“아는 지인이 최근에 책을 하나 집필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사방팔방 닿는 곳마다 필사본을 뿌렸다네.”

묵 노야는 필사본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필사본? 내게 주려고 가져오신 건가?’

용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이내 의아해지고 말았다.

저렇게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보자고 할 것이 아닌가?

“제가 한번 봐 드리지요.”

모용기가 책 얘기에 반색을 하며 나섰다.

용연과 인이예의 유치한 대화에 슬슬 짜증이 나던 터였는데 잘됐다 여긴 것이다.

“흘흘. 강호 세가의 자제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아닌데도 괜찮겠나?”

“강호 세가? 후후, 그것도 방법이네요. 강호 세가에서 자랐다고 해서 무공서만 읽겠습니까? 줘 보세요.”

모용기는 무공뿐만 아니라 학문적 성취에도 자신이 있기에 손을 뻗었다.

“그렇지. 좋은 말을 했네. 책은 책일 뿐이지. 그럼 자네에게만 주는 것도 그러니 다들 받아서 읽어 보게. 불은…… 이거면 되겠군.”

묵 노야는 품에서 두터운 책자를 꺼내 내려놓고 선실로 들어가 횃불 하나를 들고 나왔다.

모용기는 얇은 책의 두께에 픽, 비웃음을 흘렸고, 인이예는 애매한 고갯짓을 했고, 남회는 읽지 않고 슬쩍 옆으로 치워 두었다.

용연만이 눈을 빛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봐도 모를 내용이지만, 내게는 묵 노야가 얼마나 많이 고심을 했는지 보인다.’

책의 내용은 우화(寓話) 서너 가지를 엮어 놓은 것이지만, 앞으로 실행할 계획의 큰 그림들이 이야기에 담겨 있었다.

“노야, 이거 재미있는데요? 조아, 각지, 조벽, 각벽? 실재하는 무공들인가요?”

인이예가 첫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흘흘. 소저, 무공에 대해선 나도 모르니 이야기가 어떤지나 말해 주게.”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네 명은 세 명이 되지만, 여섯이 모이면 어느 걸 익히느냐에 따라 하나나 둘도 될 수 있다? 재미있는 방법이에요. 좀 더 손봐서 훈련 교법으로 써도 좋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체계를 잡기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 같네요.”

인이예는 묵 노야의 말에 대답을 해 주면서도 눈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뜬금없이 모용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 두 번째 얘기가 더 재미있어요. 첫 번째 주인공과 다른 주인공인데 밑도 끝도 없이 대로에 나가 모이라고 하니까 주루, 포목점, 마굿간에서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제 주인들을 두들겨 패고. 큭큭큭.”

모용기의 말에 인이예는 물론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 다들 이미 이야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척.

용연은 가장 먼저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묵 노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주인들이 부리는 사람들의 반란을 누르지 않고 서로를 힐난한다는 건 억지 같은데요, 노야?”

“저도 마지막 얘기는 읽으면서 불편했어요.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만 넣으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인이예가 용연의 말에 바로 동의하며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었다.

“흘흘. 억지와 불편이라. 자네들의 감정을 건드린 것 같으니 성공이군.”

묵 노야는 승부에서 이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 책, 대단하네요.”

마지막으로 끼어든 사람은 모용기였다.

두 번째 이야기를 읽을 때만 해도 비웃음을 머금고 있더니 책장을 덮은 지금은 꽤나 심각해져 있었다.

“그렇지! 강호 세가의 자제는 뭔가 다를 줄 알았지. 어떤 점이 특히 좋던가?”

묵 노야는 용연과 인이예에게 말할 때와 달리 적극적으로 물었다.

“……마지막 얘기를 책으로 쓸 줄은 몰랐네요. 정말이지 대단한 배짱을 가진 지인을 뒀네요. 누군지 알고 싶을 정도예요.”

모용기는 거친 말투와 공격적인 눈빛으로 묵 노야를 노려봤다.

“다음에 보면 강호 세가의 자제가 엄청 칭찬했다고 전해 주지. 그런데 어느 부분이 그리 격하게 좋던가?”

묵 노야는 눈이 먼 사람처럼 모용기의 성난 눈빛을 보며 되물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내 말은, 그자가 누구냐고 묻는 거야!”

쉭―.

모용기의 손은 이미 묵 노야의 목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기보다 늦게 움직인 손에 잡히고 말았다.

쾁.

“보기 싫은 것 억지로 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보여 달래서 보여 준 분에게 이런 짓을 하면 안 되지.”

용연은 화난 표정으로 잡은 모용기의 손목에 힘을 가했다.

끄득!

“윽!”

모용기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해야지, 무작정 덤비기만 하면 쓰나. 쯧.”

묵 노야는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빼며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용 공자가 거둬들이지 못한 검극현천의 날들을 튕겨 냈다는 거야?’

인이예는 너무 놀라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은 단순히 용연이 모용기의 손목을 제압한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추영영에 비하면 모자라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검극현천이지만, 그 성취만으로도 웬만한 고수들은 언제든 목숨을 거둬들일 자신이 있었다.

모용기만 해도 배에 올랐을 때 손을 썼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런 검극현천의 칼날들이 남아 있는 공간을 용연은 거침없이 파고들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모용기의 손목을 잡아 냈다.

인이예는 용연을 쳐다봤다.

달빛에 닿은 용연의 옆얼굴이 반짝거렸다.

배시시.

인이예의 가려진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지어졌다.

일 년여의 기간 동안 자신의 성장이 무색해질 정도로 강해진 용연의 모습은, 당장 달려들어 목에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있었다.

무공의 고하 때문이 아니다.

‘사부님, 제가 용 공자님에게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인이예는 떠나기 전에 만났던 추영영의 말을 떠올렸다.

―이예야, 이젠 너도 알겠지만, 검극현천은 살법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 아니라, 예(藝)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검무(劍舞)다. 감각을 공(空)의 상태로 올리면 체(體)는 그 뒤를 쫓기만 하면 되는 경지. 검극현천의 완성이며 현현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검극현천을 익힌 네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추영영의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서둘러 용연을 만나러 온 것이다.

조금 더 지나면 추영영이 말한 대로 될까 봐, 용연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게 될까 봐.

결과는 우려였다.

용연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다시 보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인이예의 성장보다 월등하게 높아져 버린 실력에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사부님, 검극현천을 익혔음에도 여전히 판단이 서질 않아요. 아니, 오히려 용 공자님이 제게 실망했을까 봐 걱정이에요.’

인이예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때의 추영영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모용기의 신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놔라.”

모용기는 이를 악문 채 용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독문심법인 구천경(九天勁) 중 육천경까지 내공을 끌어 올려 뿌리쳤으나, 용연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규칙은 규칙이니. 허나, 노야를 위협한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시오. 그렇게 하겠다면 손을 놓겠소.”

용연은 규칙이란 말을 꺼낼 때 인이예를 돌아봤다.

그 모습이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는지 인이예는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용연의 손이 모용기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모용기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전부 엉망이야. 사십 대라고?”

모용기가 용연을 돌아보며 꺼낸 혼잣말이었다.

군림단에서 보내겠다고 한 단원이란 자에 대해 물었을 때 모용세가에서 보내온 쪽지엔 사십 대의 사내란 말 외엔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연이 의아한 눈으로 모용기를 쳐다보자 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곳을 왜 쉬쉬하고 내버려 두는지 알 수가 없네. 아무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형님과 숙부님들의 표정을 생각하니 통쾌하긴 하군. 큭큭.”

모용기는 군림단의 일개 단원이라면 자신이 제압당했을 리 없다고 믿었다. 당연히 용연을 군림단에서 보내기로 한 자라고 여긴 것이다.

혼잣말을 하다 갑자기 웃던 모용기가 묵 노야를 향해 돌아서서 포권을 취했다.

“오해였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노야. 오해였다면.”

“자네, 뒤끝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그래. 당연히 오해일세.”

묵 노야는 모용기의 집요한 태도에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씀은, 지인이란 분이 어느 특정 문파를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음? 그 이야기에 나온 대로 망한 문파가 있다는 뜻인가?”

묵 노야의 눈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본 모용기는 그제야 묵 노야를 믿게 됐다.

아는 얘기였다면 저런 눈빛을 감추려고 했을 테니까.

“……친구의 육촌누이가 벽풍문이란 곳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책에 적힌 일이 실제로 일어났소.”

“문주의 직속 기관!”

묵 노야의 입에서 확신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 죽었소. 친구의 육촌누이까지. 그래서…….”

“저런, 저런.”

묵 노야는 혀를 차 모용기의 말을 자르며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으나, 한 사람만은 묵 노야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실험을 하셨구나.’

용연은 묵 노야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책에 적은 계획의 한 예로 벽풍문이란 곳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이다.

실망시키지 말라는 용연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오싹!

기분 좋은 소름이 등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힐끗.

우쭐한 표정의 묵 노야가 눈동자만 돌려 용연을 쳐다봤다.

어떠냐는, 이 정도면 실망시키지 않은 것 아니냐는 말이 담겨 있었다.

끄덕.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정해 주었다.

상황이 배 위만 아니었다면 진심을 다해 감사의 뜻을 전했을 것이다.

첫 만남에서 나눴던 내용을 고작 몇 장에 불과한 책 한 권에 집어넣었고, 그걸 읽은 모용기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 만승서고의 종 노야에게 받은 무완주슬을 용연만의 해석으로 만든 네 가지 무공까지 고스란히 책에 적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아, 각지, 조벽, 각벽을 기초로 쓴 책이란 뜻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니 실감이 안 난다.’

용연이 감회에 젖어 책을 쥐락펴락 할 때였다.

“소저, 그 규칙은 만든 건가요, 아니면 원래 있던 건가요?”

모용기가 인이예에게 말을 건넸다.

“몇 백 년 전, 세력의 사활을 걸고 싸우던 수십 명의 고수들이 지진으로 땅속에 파묻히게 된 일이 있었어요. 그중 한 명이 쓴 책에 나온 규칙이에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알려지면 곤란한 얘기였던 것 같아요. 야사들 속에 끼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몰랐던 거군요?”

모용기는 인이예가 해 준 얘기를 몰랐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머쓱해했다.

그러자 인이예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그 규칙 덕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죠?”

용연은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내며 두 사람의 얘기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인이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봤고, 모용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용연을 노려봤다.

“읽어 봤다고? 그럼 누가 그 책을 썼는지도 말할 수 있겠네?”

모용기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용연에게 턱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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