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용연의 눈이 반짝였다.
꾸끼이― 끼끼―.
그 녀석이다.
공심회에서 도망치던 묵 노야를 발견하고 알려 주었던 매.
혹시나 다른 매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어서 자세히 쳐다봤다.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는 것을 보니 마차 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일 년도 더 전에 한 번 봤을 뿐인 용연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피식.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매에 주인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주인이 누군지는 진류 덕분에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금룡상단의 인이예.
징계를 받고 만승서고에 머물러 가는 길에 매와 관련된 생각을 해 봤다.
매가 나타났던 시점과 사라진 시점을 양쪽에 두고 그 안에서 연관됐던 사람들을 추려보았다. 대부분 죽거나 군림단과 연관된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인이예는 용연과 두 번이나 만났다.
한 번은 직접 만났고, 한 번은 진류를 통해 서찰로.
‘이번엔 어떻게 찾았을까? 둘 중 하나겠지. 금룡상단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대단하거나, 인이예 소저를 돕는 곳이 따로 있거나. 뭐, 말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는 소저이니 놀라울 건 아닌 건가?’
용연은 쓰게 웃었다.
인이예가 자신을 찾고 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 대주님, 육포 말린 것 좀 갖고 계세요?”
“육포요? 물론 있습니다. 얼마나 드릴까요?”
남회는 얼른 소매에서 두툼한 육포 두 덩이를 꺼내 건넸다.
노숙이 생활인 남회에게 비상식량은 필수였다.
“그거면 되겠네요.”
용연은 육포를 받아서 반을 잘라 네 조각으로 나누더니 입에 넣지 않고 쥐었다.
남회가 먹을 것도 아니면서 왜 달라고 했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용연은 모른 척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마차가 굽잇길을 돌고 돌아 산을 넘었고 평지로 들어섰을 때였다.
“음? 용 학림, 육포는 어쨌습니까?”
남회는 마차에서 내리다 용연의 손이 빈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오물거리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육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먹었죠.”
저 어딘가에 있을 매가.
용연은 뒷말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육포를 던질 때마다 낚아채더니 배가 찬 모양인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
달의 위치가 해시(亥時,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로 접어들었다.
“찾았다!”
인이예는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채를 발했다.
당연히 나타나야 할 매, 꾸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용연을 발견하고 그 주위를 맴돌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야 뵙겠네요, 용연 학림. 군림단의 가장 낮은 서열 중 한 분을 뵙는 것이 강호삼대세력의 각주급 인사를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줄 몰랐네요.”
인이예는 일 년여 전보다 한 뼘 이상 키가 자랐고 면사 위로 드러난 눈에는 기품이 어려 있었다.
빙글 돌아서자, 두르고 있던 비단 옷이 사르르 몸에 감기며 아름다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더니, 그 상태 그대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다 한순간 공간을 열고 들어가 버린 것처럼 사라졌다.
스스스―.
남아 있던 희미한 환영들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살수에게 그 순간은 영원과도 같을 수 있다.
은영루 비기 환영비.
인이예가 펼친 신법의 이름이었다.
***
힐끗.
용연은 마차에서 내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용 학림, 뭘 그렇게 보세요?”
남회의 표정이 진지했다.
용연이 뭔가를 느꼈다고 여긴 까닭이다.
“아니에요. 별이 많은 걸 보니 내일도 덥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따라오던 매가 보이지 않아 찾던 중이었다.
더위 때문에 마차까지 준비해 준 용연이기에 남회는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더운 게 나아요. 내일이면 사만에 도착할 텐데, 비가 와 강물이라도 불면 곤란하죠.”
“그러네요. 내일이면 사만에 도착할 테니.”
‘음? 무슨 기척이라도 느끼신 건가?’
남회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난 후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용연의 반응이 평소와 다른 것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해 주려는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왜 그러세요, 남 대주님?”
“예? 아니요, 그냥.”
“근방에는 우리 외엔 아무도 없어요.”
“아.”
“내일도 종일 움직이셔야 하니 어서 쉬세요.”
“……별일 없는 거죠, 용 학림?”
남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모습에 용연은 의아해져서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하늘을 살피느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구나.’
용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척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 대주님, 어제 저녁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결론을 내지 못해 종일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제가 외연 식구들 대하던 버릇대로 한 것 같아 오히려 죄송하네요.”
남회는 얼른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입을 집게처럼 누르고는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구선이 항상 강조했던 말을 잠시 잊고 말았다. 아니,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단원들은 우리와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다르다. 합을 맞춘다고 해서 전부를 맞추려 들어선 안 된다.
민망함이 가시가 되어 온몸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구선의 저 말은 이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남회는 지금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살짝 땅을 고른 후 그곳으로 들어가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잠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식.
용연은 돌아누운 남회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후임 시절 자신의 모습을 나이도 많은 남회에게서 보았다면 실례일까?
담영호의 무덤덤한 반응에 혼자서 많은 결정을 내리던 그때의 모습이 남회에게서 보였다.
뒤쪽의 나무 아래를 밟아 평평하게 만든 후 기대앉았다.
담영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괜히 궁금해지는 용연이었다.
날이 밝았고 용연은 남회와 나란히 마차에 탔다.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졌으나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모른 척했다.
여전히 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부가 부지런히 말을 몬 덕택에 오후 끝 무렵에 나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회가 삯을 주고 몇 가지 당부하는 동안 용연은 나루로 내려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공자?”
육십 대로 보이는 사공이 곰방대를 입에서 떼어 내며 돌아봤다.
“가는 곳보다…… 다른 배는 없습니까?”
용연은 사공이 모는 배 좌우를 둘러보며 당황해서 되물었다.
“클클. 이 시각에 누가 배를 탄다고 기다리겠소?”
“예? 이 배는 그럼 뭐죠?”
“나야 미리 선금을 받고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니 기다리는 거고. 방향 맞으면 한두 명 더 태워도 괜찮을 것 같아 물어본 거라오.”
“손님을 기다린다고요? 그럼 당장 출발할 수 없다는 건가요?”
“안 되지, 선금 낸 손님이 와야 출발할 거요. 아! 목적지는 사만이라오. 클클.”
“우리가 두 배로 내겠소. 당장 출발합시다, 사공!”
남회가 나루로 내려오며 외쳤다.
그러나 사공은 물가에 침을 뱉으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 배 내겠소.”
남회는 사공의 반응을 조금 더 쓰라고 읽은 모양이다.
“클클. 열 배를 내도 소용없소. 선금 낸 손님이 와야 출발하니 기다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구려.”
사공은 단호했다.
“남 대주님, 사만까지 가신다고 해요. 기다렸다가 함께 가시죠.”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남회도 사공의 완고함에 흥정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저물어 강 저편이 붉게 물들었다.
남회는 마음이 급한지 나루를 오가다 몇 번이고 사공을 돌아봤으나, 사공은 태연하게 곰방대의 재를 털어 내고 연초를 채워 넣었다.
그때였다.
“사공!”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나루 위쪽에서 들려왔다.
‘아!’
용연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하마터면 탄성을 터트릴 뻔했다.
사공에게 선금을 주고 배를 대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묵 노야였기 때문이다.
“매번 이 시간에 일이 끝나서 어쩔 수가 없었네, 사공. 자, 어서 출발하세.”
묵 노야는 용연을 지나쳐 사공의 배로 향했다.
“클클. 노야,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사공은 묵 노야가 서두르자 조금 전에 보였던 단호한 태도는 사라지고 연신 굽실거리기 바빴다.
“말동무가 있으면 나야 좋지. 나는 괜찮으니 자리만 남겨 주게.”
묵 노야는 사공의 곤란함을 이해해 주며 배에 올랐다.
그러자 사공은 얼굴을 펴며 용연과 남회를 향해 오른손가락 세 개를 펴고 왼손으로는 타라는 손짓을 했다.
한 명당 철전 세 닢씩이란 뜻이다.
남회는 얼른 품에서 여섯 닢을 꺼내 사공에게 건네고는 용연과 함께 배에 올랐다.
“자, 출발합니다요.”
사공이 밧줄을 풀고 노로 배를 밀려 할 때였다.
“사공, 잠시만 기다리세요.”
용연은 다급하게 사공의 행동을 막았다.
“공자,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물길이 달라져서 제때 못 가니 안 갈 거면 당장 내리시우.”
사공은 노를 든 채 나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노야, 한 사람이 더 오는 모양입니다. 잠시만 지체해 줄 수 없겠습니까?”
용연은 얼른 묵 노야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그러자 묵 노야는 이채를 발하며 용연을 쳐다보다 눈동자를 남회에게로 향했다.
남회 한 명도 곤란하다는 눈짓이었다.
“이런, 저 강호 여걸을 기다렸던 거요, 공자?”
사공이 나루 뒤쪽을 가리켰다.
‘강호 여걸?’
묵 노야는 사공의 손끝을 눈으로 좇아갔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표홀한 신법을 펼쳐 나루로 다가오는 여인이 보였다.
“클클.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자질이 다분하구려. 저 여걸이 오는 걸 어찌 안 거요?”
사공의 질문에 묵 노야와 남회의 시선이 용연을 향했다. 두 사람 역시 궁금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저런 매는 흔하게 볼 수 없는 종이라서 지레짐작 해 본 겁니다.”
용연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봤다.
“저게 매라고요? 아니, 그게 여기서 보인단 말이오? 공자 혹시…….”
사공은 말끝을 흐리며 두려운 눈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자신의 눈엔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 새를 용연이 한 눈에 매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인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공자, 저 새가 매라고 합시다. 허면, 저기 달려오는 여인이 저 매의 주인이란 건 어찌 아셨소?”
묵 노야는 한쪽 눈을 치켜 뜬 삐딱한 표정으로 용연에게 되물었다.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알기는요.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긁적긁적.
용연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는 여인이다? 누구지?’
묵 노야는 용연의 반응을 보고 둘이 아는 사이임을 확신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여인은 백의 무복을 입었고 면사로 코와 입을 가려 얼굴을 볼 수 없게 했다.
“하나는 뱃삯이고요, 하나는 기다려 준 몫이에요.”
짤랑.
여인은 은자 두 냥을 사공의 손에 떨어뜨리고는 배로 올라와 묵 노야, 남회, 용연의 순으로 짧은 목례를 건넸다.
“소저, 저야 횡재를 해서 좋지만 먼저 타신 분들이 계셔서…….”
사공은 얼른 주먹을 쥐어 여인이 은자 두 냥을 줬다는 걸 다른 손님들이 못 보게 하고는 슬쩍 묵 노야를 돌아봤다.
“어머, 사만 가는 배 아닌가요?”
여인은 손으로 면사 위의 입을 가리며 놀란 눈이 되어 사공을 돌아봤다.
“사만 가십니까? 아구야, 이거 늘그막에 이 늙은이에게 횡재수가 붙은 모양이오. 자자, 더 늦으면 곤란하니 출발합니다.”
사공은 은자 두 냥을 품에 넣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으며 힘차게 노를 밀었다.
이런 배에 은자 두 냥을 내고 타는 손님이라니.
딴소리할까 싶어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