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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85화 (85/232)

85화

사락―.

용연의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첫 번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실험을 해 봐야 됐지만, 열 번째 책부터는 전부가 아닌 몇 개를 선택해서 몸에다 실험을 해 보거나 대상을 정해 일어나는 변화만 지켜봐도 됐다.

이렇게 될 때까지 무려 한 달이 지났다.

만승서고에서 책을 읽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부라 집중하는 데에 엄청난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우뚝.

책장을 넘기던 용연의 동작이 멈췄다.

몇 장만 보고 나간다는 것을 그새 잊은 것이다.

“늦었겠다.”

용연은 서둘러 석실을 나섰다.

며칠 전, 남회로부터 임무에 관해 연락이 와서 다녀와야 한다.

밖으로 나가자 신시(申時, 오후 4시경)가 아직 지나지 않았다.

용추루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딱히 방향을 정한 것은 아닌데 소로를 벗어나자 남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 학림, 여깁니다.”

‘역시.’

용연은 남회를 웃으며 맞아 주었다.

용잠이 남긴 기록들을 공부하며 생긴 이상한 현상 중 하나가 일어났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걸으면 꼭 그 사람을 만났다.

‘몽외 선림께서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이런 건가?’

며칠 전에도 숲을 걷다 남회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남회가 나타났다.

육방과 육문에게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는데, 특별한 무기나 무공을 갖거나 익히신 것도 아니었다고 하더구나. 위험을 감지하는 특출한 능력까지 있으셨다니…….

몽외가 해 준 말이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특출한 능력.

두 가지는 같은 말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만날 것이란 예측이 아니라, 누군가가 용연의 감각에 닿았다?

위험 감지 역시 같은 맥락일 테고.

피식.

어떤 해석이라도 용연은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지는 느낌 때문이다.

한 달 전만 해도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웠으나 이제는 자랑스럽고 닮고 싶은 분이 됐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참 간사한 것 같다.

“용 학림, 좋은 일 있었나요? 왜 그리 웃으세요?”

남회는 용연의 웃는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며칠 전에 봤던 용연의 퀭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임무를 빨리 마치고 돌아올 곳이 생겨서요.”

“이곳으로 다시 오려고요?”

“예.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제게 말씀하시면…….”

“개인적인 일이라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에요. 아! 아니에요, 정말로 개인적인 일이에요.”

용연은 말하다 말고 손을 흔들었다.

남회가 이번 일도 털보 아저씨를 도와주는 정도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야 했다.

“단원으로서의 저와 용연이란 이름을 가진 저. 둘 다 저인데, 책임에 대한 부분은 많이 다르죠. 그걸 어떻게 구분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음, 확실히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긴 하네요.”

남회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연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 까닭이다.

“아무튼 그래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가시죠?”

용연은 남회까지 심각해지려 하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예? 예. 안내하겠습니다. 헌데…… 용 학림,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려 주실 수는 있을까요?”

남회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요.”

“알겠습니다. 이제 가시죠.”

남회의 표정이 풀리며 앞장섰다.

당장 투입될 임무보다 용 학림의 고민이 더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번 임무에서 남 대주가 할 일은 어떤 거죠?”

용연은 앞서가는 남회를 따라잡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가면서 말씀드리려 했어요. 강정(康定)의 문파들이 충돌 직전이라 중재를 해야 하는데…….”

남회는 외연 식구들과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용연이 이번 임무를 잘 지휘할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빼놓지 않았다.

‘강정이라면 오가는 시간만 삼 일, 머무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오 일은 잡아야 해. 어디서 시간을 줄여야 할…… 아!’

한 사람의 얼굴이 벼락처럼 머릿속에 꽂히며 용연은 생각에서 튕겨 나왔다.

움직일 수만 있으면 무조건 봇짐을 메고 길을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

계절마다 달라지는 해 길이를 감안해서 산길을 오르내리셨고, 늦으면 용연이 굶고 잘까 봐 돌아오는 길엔 험한 지름길을 오르셨다.

아버지 옷 위로 몇 번이나 배어 나온 피를 본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어려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하루를 온전히 용연을 위해 사셨다.

왜 이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자 왈칵, 올라온 눈물이 번져 걸음을 멈췄다.

돌아서서 남회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뿌연 시야 안으로 동동마을이 들어왔다.

“흐어…….”

용연은 소리 나지 않게 숨과 함께 그리움을 뱉어 냈다. 몇 번이고 뱉어 냈다.

***

사락― 사락―.

하루에 적게는 십여 개 많게는 수십 개의 보고가 올라오는 진류의 탁자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제는 서찰 한 장 정도는 넘기면서 다 훑어볼 수 있게 됐다.

“이쪽은 곽 교림이 가 있고, 여기하고 저기는…… 우 교림…… 학림들은 이렇게, 이렇게 보내 놓으면…… 응? 용 학림이 여길 갔다고?”

진류는 서찰을 넘기다 다시 가져와 앞에다 펼쳤다.

[……(중략)……진 대교님의 우려와 달리 용연 학림은 네 문파와 마주앉아 대화만으로 충돌을 막아 냈습니다.

용연 학림은 동동마을로 돌아갔고, 남겨 놓은 은타 식구들이 며칠 동안 네 문파를 지켜본 결과,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뢰받은 비용은…….

은타 좌경.]

톡. 톡. 톡.

진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탁자를 두드렸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매우 성공적인 임무 수행의 내용이 담긴 보고였으나, 묘하게 한 사람의 이름에 시선이 갔다.

용연.

매 임무마다 사고를 치다가 갑자기 능숙하게 임무 수행을 하는 단원으로 탈바꿈했다?

일부러 쉬운 임무를 배정하긴 했지만, 용연이라면 이번엔 어떤 신박한 말썽을 부릴지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진류는 붓을 들었다.

[좌 향주, 용연 학림과 만난 적 없는 대주 중 한 명을 보내서 용연 학림이 동동마을에서 뭘 하는지 알아봐 주게.]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진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사천성 곳곳에 퍼져 작고 큰 싸움을 벌이는 교림들 챙기는 것만으로도 손이 부족한데, 용연이란 이름을 보자마자 최우선 순위로 올려놓았다.

지난 세 번의 임무 모두 후폭풍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 대견하게도 이번엔 아무런 문제없이 임무를 마쳤다?

히죽.

진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용연이 임무보다 중요하게 여길 만한 일이 동동마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용 학림, 거기서 뭘 하는 거야?’

***

긁적긁적.

동동마을 백이루 이 층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던 삼십 대 사내, 은타의 호강 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대주들은 교림들과 합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는데 나는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끄아암.

하품까지 늘어지게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좌경의 명령을 받자마자 손님으로 위장해 동동마을에 온 지 벌써 보름째였다.

그동안 용연을 세 번 봤다.

매번 뒤따라갔으나 마을 촌장이 운영하는 용추루라는 곳은 아무나 출입을 시켜 주지 않아 되돌아와야 했다.

―진 대교께서 용 학림이 동동마을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하신다. 안 들키게 지켜보다 보고해라.

“흐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향주님.”

호강은 옷을 여미며 심드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호강을 백이루 총관이 쳐다보다 점소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점소이는 곧장 밖으로 나가 옆 주루의 총관에게 호강이 오늘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고 전했고, 그 소식은 주루를 건너고 건너서 용추루까지 전해졌다.

“흘흘. 용 공자에게 알려 줘야겠구나.”

육문은 용연을 만날 명분이 생기자 신이 나서 동굴로 갔다.

호강에 관한 얘길 들은 용연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음? 어떻게?”

육문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려 주더라고요. 제가 게으름피우는 것 같아 보낸 모양이에요.”

“누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그런 사람이 우리 마을에 왔었다고?”

육문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당연한 것이, 용연이 동굴에서 나와 만난 사람은 자신이 다 알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이 아니라 숲에서 따로 만난 사람이에요.”

“숲? 아아.”

육문은 그제야 용연이 마을 외곽은 혼자서만 돌았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타 좌경 향주님이 보냈을 리는 없고. 진 대교님이 가 보라고 하셨을까?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사람을 보낼 정도로 신경 쓰이게 만든 모양이네. 모른 척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용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동굴 입구로 향했다.

“어딜 가나, 용 공자?”

“그분을 만나려고요.”

“음? 왜?”

“제가 들은 지 열흘이 지났어요. 그 이전부터 와 있었다면 보름쯤 됐을 텐데, 저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하잖아요? 차라리 제가 여기서 뭘 하는지 보여 주는 게 낫겠어요.”

“여, 여길? 용 사부님의 석실까지 보여 주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석실 앞까지만 보여 주고 용추루로 가서 얘기 좀 나누다 보낼 거예요.”

용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잠의 석실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됐지만, 육문이나 다른 두 사람에겐 성지나 다름없는 공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손자라고 해도 석실의 공개 여부를 혼자서 결정 내릴 권한은 없는 것이다.

육문의 표정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내가 뭘 도와줘야 하나, 용 공자?”

“제가 그분에게 이곳을 보여 주고 나갈 때까지 모른 척해 주시면 됩니다.”

‘사람 참.’

육문은 용연이 자신을 배려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아는 사람에게 말을 더하는 것은 잔소리나 마찬가지다.

“알겠네.”

육문의 대답을 듣자마자 용연은 곧장 백이루로 향했다.

호강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백이루 이 층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호강에게 다가갔다.

“앉아도 될까요?”

“아…… 이렇게 자리가 많은데 굳이 합석을 하시겠다고요?”

호강은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대로 말씀드릴게요. 호강 대주님, 보름 동안 힘드셨죠?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알 텐데 말이에요.”

“……!”

“우리 언제고 같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잖아요. 일어나세요. 제가 머무는 곳을 보여 드릴게요.”

“어, 언제부터…….”

호강은 말도 잇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누가 알려 주더라고요. 은타의 호강 대주란 분이 여기 와 있다고요.”

“누구죠?”

“이곳에 할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세요. 마을 사람들과 친하셨던 모양이에요. 제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많은 편의를 봐 주시더라고요.”

용연은 호강의 반문을 웃음으로 넘기고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뒷문 쪽으로 갔다.

호강은 그쪽에도 길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쫓아가다 뒷길을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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