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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83화 (83/232)

83화

“루주님, 큰 어르신과 촌장님께서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사각 모자 뒤로 땋아 내린 머리칼이 등에 닿은 오십 대 총관이 육초백에게 허리를 숙였다.

“매 총관, 그 말하려고 직접 온 겁니까?”

육초백은 매 총관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마을 촌장이자 숙부인 육문의 용추루(龍追樓)를 총괄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조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매 총관은 자신이 할 말만 다시 꺼냈다.

“한 가지 지시만 내리고 가지요.”

육초백은 하탄루의 총관을 불러 용연이 돌아오면 곧장 매 총관에게 알리라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묻는다고 대답해 줄 매 총관이 아니기에 조용히 따라갔다.

힐끔.

옆을 돌아보니 하늘이 붉은빛을 사방으로 뿌려 대고 있었다.

어느새 노을이 질 때가 된 모양이다.

용추루에 도착하자 붉은 빛은 흔적도 없고 어둠이 곧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 총관은 육초백을 거대한 석문 앞까지 안내하고는 가볍게 허리를 숙인 후 용추루로 돌아갔다.

탕탕.

육초백이 문고리를 두드리자 옆에 통로가 열렸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부르셨…… 어라? 숙부님, 저 젊은 친구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육초백은 육방, 육문과 함께 있는 용연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초백아, 용 공자시다.”

“용 공자?”

육초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용연이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지 못해 기다라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숙부가 자신에게 오히려 용연을 인사시킨다?

육초백의 입장에선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에 마을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의 손자시다.”

“그, 용 사부님이라는 분의…….”

“맞다. 용 사부님의 손자시다.”

“아…….”

육초백의 안타까운 시선이 용연의 손목으로 향했다.

마을 은인의 손자보다 저 팔찌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온 것이다.

“얘기 다 들었다.”

“예?”

“용 공자의 팔찌를 사겠다고 팔 때까지 공짜로 하탄루에서 지내라고 했다지? 초백아, 앞으론 다신 그런 제안을 하지 않겠다고 용 공자가 있는 이 자리에서 다짐해라.”

육문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육초백은 얼른 아버지 육방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건넸으나, 돌아온 반응은 냉담한 무관심이었다.

“숙부님, 제가 용 공자의 신분을 모르고 실수한 것 같습니다. 용 공자, 어제는 물건에 눈이 어두워져서 실언을 하고 말았네. 앞으론 그 팔찌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말을 마칠 때는 육초백의 입가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낭수련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라 인정한 것이다.

“그래, 그런 자세야. 용 공자의 물건을 탐냈다는 말을 듣고 이 아비는 부끄러워서 돌아가신 용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용 공자, 내 아들놈의 욕심을 이해해 주시게.”

육방은 육초백의 처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직접 용연에게 사과까지 건넸다.

“상황이 이상해졌네요.”

용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육초백을 쳐다보다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어야 했다.

“하탄루주님,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두 분이 먼저 알고 계셨어요.”

“후후후. 그랬을 걸세.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촌장님이시자 용추루의 주인이신 숙부님께 보고되지 않는 일은 거의 없거든. 자네를 탓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걱정 말게.”

육초백은 고소를 지으며 용연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점을 말씀드린 거예요. 두 분, 어떠세요?”

불쑥, 용연이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육초백을 가리키듯 들어 올리며 육문과 육방을 돌아봤다.

“음?”

육초백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으나 나서거나 하진 않았다.

용연이 다시 나섰다.

“만약 제가 도박을 좋아했다면 저는 정당한 값을 쳐주려는 하탄루주에게 팔찌를 팔았을 거예요. 물론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요. 하탄루주가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셔야 합니다.”

‘아버님과 숙부님에게 나의 장점에 대해 알려 주고 있다고?’

육초백은 용연의 칭찬에 눈을 가늘게 뜨며 육방과 육문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탄루주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용연은 육초백이 육문과 육방의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일까 봐 다시 나서서 먼저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육초백은 마주 포권을 취하며 눈으로 용연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적당히 대응하시면 돼요.’

힐끗.

육초백의 눈동자가 옆을 가리켰다.

‘할 것만 하세요.’

용연은 눈을 감았다 뜨며 반응해 주었다.

“무슨. 부탁은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입장인 것을. 용 공자, 앞으로 필요한 것이 생기면 내게 먼저 말해 주게. 최우선으로 해결하려 노력하겠네.”

허리를 펴며 육초백은 준비하고 있던 사람처럼 대답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됐지만 용연이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까지 외면할 필요는 없잖은가?

몰라도 아는 척하며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후의 일은, 이후에 맞춰 대응하면 된다.

“좋은 지원자 한 분이 더 생긴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용연은 육방과 육문을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육방과 육문 덕분에 이곳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많이 단축하게 됐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하고 싶어 육초백이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육초백이 용연의 팔찌에 눈독을 들인 것은 맞지만, 응아린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안목과 용연을 옆에 둘 수 있는 조치 등은 칭찬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용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육방과 육문의 표정에는 못마땅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서로가 안 보게 하는 것이 나았다.

육초백에게 따로 부탁할 것도 있고 말이다.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거처를 그대로 유지해 놓았다.

육방과 육문이 은원의 구분을 명확하게 여기는 성격임을 알려 주는 모습이었다.

용연이 생각을 이어 갈 때도 육방과 육문, 그리고 육초백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도 이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쐐기를 박아야 했다.

“두 분 어르신, 하탄루주와 얘기 좀 나누고 갈 테니 먼저 가 계세요.”

“용 공자, 초백이가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을 놈이 못 되네.”

“푸하! 아버지, 농담도. 용 공자가 믿겠습니다.”

육초백은 육방의 말이 길어지지 않도록 일부러 크게 웃으며 멋쩍음을 감추려 했다.

“용 공자, 할 말이 있다니 가긴 가네만, 형님 말씀 새겨듣는 게 좋을 걸세.”

육문까지 한마디 거들자 육초백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용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창피를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루주님, 이 팔찌는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용연은 육방과 육문이 동굴 입구로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물었다.

“도박 좋아하는 사람치고 돈 냄새 못 맡는 사람 없네. 내 방 한쪽 벽면이 희귀한 물건들에 대해 적은 책들로 가득하지. 거기에 그 낭수련이 나와 있더군.”

“낭수련?”

“이제 와서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이젠 안 그래도 되네.”

육초백은 용연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예?”

“숨길 필요 없네.”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 팔찌의 전 주인께서 다른 이름으로 알려 주셨거든요. 응아린이라고.”

“응아린?”

“예, 응아린.”

“낭수련을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른 거지? 잘못 봤을까 봐 다시 찾아봤지만, 틀림없이 그 팔찌는 낭수련이었네. 낭인왕의 유물이자 신물인 낭수련.”

“낭인왕요?”

“낭인왕 기련호. 혹시 처음 듣는다거나…….”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그 팔찌의 전 주인이 아무 말도 안 해 줬나?”

“그분도 우연히 발견했다고만 하셨어요.”

“이러면 곤란한데…….”

육초백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용연을 하탄루에 머물게 하려 했던 진짜 이유는, 낭수련 자체에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낭수련이 안내할 낭인왕의 유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탄루주님, 표정을 보니 제가 이 팔찌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연락한 것 같은데, 맞나요?”

“그게.”

육초백은 용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굳이 물어볼 것 없는 반응이었다.

“혹시 낭인들과 관련된 곳인가요?”

“……맞네.”

“거기가 어디죠?”

“용 공자, 이런 기회는 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니.”

“이해해요. 그러니 어딘지 알려 주세요.”

“낭인들은 워낙…….”

“하탄루주님.”

“혼구당. 사야벌에 그나마 줄을 댈 수 있는 자들이라 연락했네.”

‘말로는 고민을 했다고 하시지만, 며칠이나 됐다고. 왜 두 노야께서 못 미더워하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씰룩.

용연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육방과 육문의 반응이 그렇다면, 혼구당 쪽에선 더 육초백을 못 미더워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이번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게 된 이유가 종 노야의 훈련 덕분임을 떠올린 까닭이다.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넓히니 당연히 판단이 필요한 부분과 덮어 둘 부분의 구분이 빨라진 것이다.

새삼 종 노야에 대한 고마움이 커지는 순간이었다.

“내 당장 혼구당에 연락을 취해서, 낭수련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었다고 알리겠네.”

용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불안해진 육초백이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속은 쓰려도 육방과 육문에게 밉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판단한 까닭이다.

“아니요. 그냥 두세요.”

“음? 그 말은 팔겠다는 뜻인가?”

육초백은 놀란 눈으로 용연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아뇨. 응아린을 팔 생각은 없어요.”

절레절레.

용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그렇지? 난 또.”

육초백은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입맛을 다셨다.

“혹시 전에도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서 그것과 관련있는 곳에다 연락하신 일이 있으셨나요?”

당연히 있을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육초백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기에 질문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음, 몇 번? 가져다 보여 줄 수는 없으니 이곳으로 불러다 확인하는 형식이었네.”

“그중에 진짜도 있었나요?”

“……아직까지는 없었네.”

“운이 없으셨군요.”

“운이라. 언제고 오지 않겠나?”

육초백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이 없다는 말이 훨씬 듣기 좋았던 모양이다.

‘외부에도 신뢰를 잃었구나.’

용연은 자신의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운이 없는 거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건 위험하네. 사야벌에서 사람들을 보냈는데 돌려보내야 하잖은가?”

“그때는 도움을 청해야지요.”

“외부 세력에 말인가? 그럼 준비를 해야 하네.”

“마을을 도와주는 곳이 있나요?”

용연은 육초백의 대답에 이채를 발하며 되물었다.

“물론이네.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그렇겠네요.”

용연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동마을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도움 청할 곳을 바꿔 보시죠?”

“용 공자가 아는 곳이라도 있나?”

“여긴 사천성이 아닌가요? 당연히 군림단에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요.”

“구, 군림단?”

육초백이 황당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사야벌이든 다른 곳이든 타 지역에 자리 잡은 세력들이잖아요? 경위를 설명하고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면 와 줄 것 같은데요?”

용연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용 공자, 군림단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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