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끄덕끄덕.
가무경은 몽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가 아닌 전신을 꾸부렁거렸다.
몽외는 문양이 찍힌 서찰을 품에 넣으며 돌아섰다.
“이걸 누가 보낸 거냐?”
“모, 모르…… 거기 적힌 자를 이길 만한 사람을 보낸 것뿐…….”
“누가 보낸 줄도 모르고 사람을 부렸다고?”
“이, 이미 선례가 있으니 나는 그저…….”
“선례?”
“전대 각주님이 그 서찰 덕분에 총본으로 가셨소.”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서찰을 믿고 자기 사람을 보냈다고?’
몽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가무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전대 각주란 자를 찾아갈 이유가 없어진 까닭이다.
몽외는 방 안을 둘러보다 방향을 확인하듯 두 곳을 손으로 가리키고는 벽으로 다가가 장식용으로 걸어 둔 투박한 월도(月刀)를 잡았다.
날도 투박하고 치장만 덕지덕지 붙은 관상용 장식품이었다.
휙―.
대충 집어 던진 후 천장을 올려다봤다.
‘또 일 시킨다고 툴툴대겠군. 크크크.’
몽외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웃었다. 군림단의 옷은 벗었지만, 몽외에게 잡혀서 떠나지 못하는 옛 동료들이다.
푸학―.
보지도 않고 던진 월도는 가무경의 얼굴을 짓이기며 즉사시켰다.
끄등!
몽외가 막 전각을 벗어났을 때, 굉음과 함께 한쪽이 가라앉았다.
가무경의 방을 둘러볼 때 손으로 두 곳을 가리켰던 결과였다.
부러진 기둥 두 개로 인해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이내 층 전체가 먼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웅성웅성―.
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세 개의 단으로 쏟아져 나왔으나, 그 누구도 움직이진 못했다.
그들의 꿈이었던 중앙전각의 붕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
사천성 영남은 운남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오지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도 어른 걸음으로 한두 시진은 가야 한다.
용연은 오랜만에 어릴 때 봤던 풍경을 보자 저 멀리 있는 산 어딘가에 쓸쓸히 계실 아버지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개 때문에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안 봐도 찾아갈 것 같았다.
사냥꾼 여 아저씨에게 움막과 아버지 묘를 부탁했지만, 그때 이미 육십이 넘은 분이라 아직 살아 계실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슷.
방향을 꺾자 공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턱.
튀어나온 바위를 밟고 솟구친 뒤 평평한 곳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속도를 냈다.
굽잇길을 한참 달렸음에도 안개는 더욱 심해졌다.
잠시 숨이라도 돌리고 가야 할 모양이다.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가 보자.’
용연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쉴 때마다 하던 수련이다.
보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주변을 살필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것이다.
머릿속의 수차를 천천히 회전시키다 서서히 속도를 높여 가자, 주위 풍경이 흐릿하게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인적인 드문 곳이라 길이 보이거나 하진 않지만, 나무 이외의 형태들이 가끔씩 느껴질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바위 절벽이었다.
꿈틀.
용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 이상한 형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금 더 확장시켜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길이 끊겼나 보네.”
용연이 조심스럽게 이십여 장을 걸어가 발아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훅, 하고 올라오며 앞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피식.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보다 예상했던 대로라는 생각이 들자 용연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수련해 온 보람이 있었다.
일어나 내려가려 할 때였다.
두웅!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좌우를 둘러보다 용연의 시선이 우측 위쪽을 향했다.
북소리라는 것을 아는 이유는, 사냥꾼 여 아저씨가 보여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눈, 비, 안개가 심하게 낀 날에는 짐승몰이 할 때 사용하는 조그만 북을 울리며 다닌다고 했던가?
용연은 재빨리 몸을 날려 북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둥― 두둥―!
낮은 구릉에 오르자마자 올라온 높이의 반쯤 내려갔고 다시 경사를 따라 산을 오르자, 북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군침 돌게 만드는 고기 냄새가 더해졌다.
“여 아저씨?”
용연은 반가운 얼굴을 기대하며 고기를 굽고 있는 동굴로 들어섰다.
“아구야, 놀라라. 놀라라!”
동굴 안에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많이 놀랐는지 창까지 손에 들고 공격할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오십 대로 보이는 사내였다.
“죄송해요. 아는 분인가 했어요.”
“음? 이곳 사람인가?”
“어릴 때 저 너머 허막재란 곳에서 살았어요.”
“허막재!”
사내는 깜짝 놀라 용연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세요?”
“알지, 아주 잘 알지. 거기서 살거든.”
“예? 그럼 여 아저씨도 알지 않으세요?”
“여 아…… 아! 자네가 혹시 연이?”
“……제 이름이 용연이긴 한데 어떻게 아세요?”
용연은 사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끙. 일단 이리 와서 몸 좀 녹여. 날이 저래서 허막재까지 가려면 힘들어. 아! 나는 장철이다. 다들 털털이라고 부르니 자넨 털보 아저씨라고 하면 되겠네.”
장철이 너스레를 떨었으나 용연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장철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떠돌다 돌아와서 여 형님을 찾아갔더니 앓고 계시더라. 산에서 떨어지셨는데 허리가 부러지신 줄도 몰랐다고…… 하아, 나를 보시더니 배고프다고, 뭘 좀 먹고 죽고 싶다고 하셔서 죽을 끓여 드렸다. 한 그릇 다 잡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숟가락 내려놓자마자…… 가셨다.”
“……다행이네요. 털보 아저씨가 계셔서.”
용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벽에 등을 댄 뒤 한참 입을 오물거리다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았다.
‘어린 녀석이 무슨.’
장철은 용연의 말을 듣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나이에는 울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저씨라 부르던 사람이 죽었다는데 눈으로만 슬퍼한다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얼마 전, 사냥한 사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 즉시 숨을 끊어 준 적이 있었다.
손도 떨지 않았고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사냥에 익숙해져서 감정과 행위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용연에게서 그 느낌이 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죽음을 많이 본 느낌이.
“자, 자네, 무슨 일을 하다 돌아온 건가?”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문지르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물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키는 일을 하고 있어요.”
“시키는 일?”
되묻자마자 장철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는 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것저것 다 해요. 그런데 조금 전에 허막재에서 지내신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제가 살던 집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장철의 표정을 읽었는지, 용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집으로 돌렸다.
“어? 내,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여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 내가 거기서 산다네. 자네 집. 그 움막 말이네. 무, 물론 비우라고 하면…….”
이번에도 말이 의지와 무관하게 새어 나오고 말았다.
조금 전부터 용연이 풍기는 분위기에 눌린 것이다.
산중의 오래된 빈집은 들어가 사는 사람이 주인이다. 집을 지었던 사람도,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 이미 거긴 털보 아저씨 집이잖아요? 제가 집 얘길 꺼낸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그랬어요.”
“자네 아버지 묘 아래쪽에 여 형님을 모셨어.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 없으니 아버지 묘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염치없지만, 제가 이장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용연은 장철을 향해 똑바로 서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러자 장철은 입을 쩍 벌린 채 사색이 되고 말았다.
강호인만이 풍길 수 있는,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용연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부탁은 무슨. 아! 나, 나도 신세를 졌다는 뜻이니 오해는 하지 말게. 하하, 하하하.”
장철은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확 풍겨 나온 기세에 놀랐기 때문이다.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 옅어질 기미가 보이자 장철이 안내하겠다며 굴을 나왔다.
사냥꾼이라 근방 지리를 꿰고 있어서 오르내리는 횟수는 많았지만 거의 직선거리로 움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고야, 밖에선 아무렇지도 않다가 집에만 오면 삭신이 쑤셔. 일단 좀…… 그렇지, 왔으면 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암.”
장철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려다 얼른 일어나 용연의 뒤를 쫓았다.
용연은 움막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엔 돌로 축대를 쌓은 반경 삼 장 정도의 너른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잘 손질이 되어 있어 잡초 몇 개 뽑고 바로 절을 올렸다.
‘아버지, 할아버지를 뵙고 오려고요. 제게 해 주실 말씀 없으세요?’
용연은 무릎을 꿇은 채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묘를 쳐다봤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을 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할아버지에 대해 좋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홧병으로 돌아가시게 만들고 집안을 도박으로 탕진한 분.
이것이 어렸을 때 내내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할아버지의 얘기 전부였다.
몽외가 할아버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창피한 분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여 형님, 저 친구가 말씀하시던 착해도 너무 착한 꼬맹이 맞습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장철은 용연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 장철은 봇짐을 지고 다녔다.
매번은 아니지만 정보가 새서 종종 도적들과 맞닥뜨려야 했고, 그때마다 따르던 큰 형님이 목숨 걸고 담판을 지어냈다.
그러다 도적들을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고, 결국은 형제처럼 지냈던 놈들 중 몇몇이 정보를 내보내서 도둑들과 이문을 나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큰 형님은 불같이 화를 냈고, 솎아낸 자들이 떠난 다음 날 돌아가셨다.
용연을 보고 있자니 그 큰 형님과 보낸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우시던 그 밤이.
‘형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 무능한 놈은 복수도 못 해드리고 손발 편하게 놀리며 삽니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춰지지가 않았다.
“흐흐흑…… 끄어…….”
결국 목을 놓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응?’
용연은 갑자기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장철이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꺼이꺼이.
이젠 자신의 머리까지 때리며 철푸덕 주저앉았다.
“털보 아저씨도 아버지를 아셨나요?”
자라면서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물으면서도 의아하긴 했다.
절레절레.
장철은 우는 와중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왜 우세요?”
“전에 내가 모시던 형님 생각이 나서 운다. 도적패들과 내통하던 것들을 두고 도망친 내가 한심해서 운다! 꺼이꺼이.”
‘이곳으로 오기 전 얘기구나.’
“하으, 하으…… 에구야,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흐구,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이런다. 못난 동생들 어떻게든 끌어안고 가 주시던 분이라…….”
장철은 고개를 들어 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품이 넓으셨던 분이었나 봐요?”
“품? 나이에 맞지 않게 좋은 말도 할 줄 아네? 그랬지, 그러셨지. 넓으셨어. 그러니 나 같은 놈도 큰 형님 생각이 날 때마다 울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봇짐을 멨거든. 그런데…….”
장철은 자신이 겪은 얘길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꽤 긴 얘기였지만 용연은 끼어들지 않고 모두 들어 주었다.
‘아북리(兒北籬)? 북이 키우는 아이? 도적패 치고는 이름이 너무 약하지 않나? 언제고 제 마음대로 사천 땅을 벗어날 수 있게 되면, 털보 아저씨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릴게요.’
용연은 말을 마친 장철의 표정이 그나마 편안해지는 것을 보며 마음먹었다.
그동안 아버지 묘를 정성껏 관리해 준 장철의 수고에 대해 어떻게 보답할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느 정도 추슬렀다 싶은 순간, 장철이 다시 울지만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