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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78화 (78/232)

78화

한 명은 선배라 건드릴 수 없고, 한 명은 임무 한 번에 사건 하나씩 터트리는 사고뭉치인데, 둘이서 동쪽 안가에서 만나기까지 했다?

우연일까? 약속된 움직임일까?

“용 학림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몽 선림님께서 등 교림이 아닌 용 학림을 찾아간 것은 찝찝하단 말이지.”

톡톡.

진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문제가 될 부분을 찾아내려 애를 써 보지만, 서찰 한 장으로는 추측도 할 수가 없었다.

“에이, 알아서들 하겠지.”

오늘따라 육 년 전, 자청해서 대교가 된 것이 너무도 후회되는 진류였다.

***

감숙성 천수(天水) 맥적산(麥積山).

뾰족하게 올라간 봉우리가 보이는 곳부터 무인들의 경계가 상당했다.

그러나 그런 삼엄한 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듯 지나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스륵.

눈을 부라리며 전방을 주시하는 무인들의 뒤쪽 벽에 붓으로 일자를 그리듯 검은 선이 흘러갔다.

층처럼 구멍 난 암벽 위로 불빛을 테처럼 둘려진 곳 위쪽.

검은 그림자가 가려는 위치다.

슷.

십여 장을 올라간 검은 그림자는 멈춰 서서 옆을 돌아봤다.

창창한 달빛이 암벽을 비추고 있었다.

‘크크크. 벽 오르는 거 처음 보냐?’

검은 그림자, 몽외는 어둠으로 몸을 이동시키며 달을 향해 웃었다.

도움을 준들 이렇게 천천히 올라가는 데도 눈치 못 챌 수준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십여 장을 더 올라가자 불빛이 켜져 있는 층 바로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람도 일으키지 않고 순식간에 한 층을 지나쳤다.

열기가 안으로부터 전해진다.

창문을 닫아 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을 따뜻하게 해 놓고 있다는 뜻이다.

안에 몇 명이 있는지 기감을 넓혀 확인했다.

‘거리를 두고 둘씩 여덟. 더럽게 의심 많은 놈이군.’

몽외는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양손을 뻗었다가 당기는 시늉을 했다.

“으……흡!”

동그랗게 눈을 뜬 두 무인의 입이 몽외의 양손에 잡혔다.

몽외는 두 무인을 쥔 채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리 없이 삼 장여를 이동한 뒤, 벽 양쪽에 이미 죽은 두 무인을 세워 놓았다.

꿈틀.

몽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과정을 세 번이나 더 해야 한다는 것에 짜증이 난 것이다.

***

굴 안쪽에는 세 명의 사십 대 사내들이 탁자를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각주께선 왜 우리가 아닌 다른 자들을 부르시는 겁니까?”

“이 번주, 철수신군도 죽었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리 화를 내는 게요?”

“장 번주, 우리가 철수신군보다 못하다는 거요?”

“허, 허허.”

장 번주는 기가 찬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곤 이 번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 번주, 그리 각주님의 눈에 들고 싶으면 내 적극적으로 추천하리다. 나도 장 번주와 같은 생각이니까.”

“계 번주! 우린 지금 몸 사릴 때가 아니에요. 구룡각과 뇌각은 직접 나서서 성과를 올리고 있잖아요? 이러다간 진천전 말석도 위험하다고요.”

이 번주는 두 번주들의 반응에 짜증이 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 탓할 줄 알았던 두 번주가 놀란 눈이 되어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두 번주들도 이제야…… 음?”

이 번주는 말을 하다 두 번주들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천히 뒤를 돌아봤다.

텁.

“컥!”

이 번주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엄청난 악력이 입을 틀어쥐었다.

“크크크. 올라오며 확인했는데 너희들보다 센 놈은 없더군. 살려 달라고 징징댈 놈들은 아니라고 믿으마.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답하는 게 좋아.”

몽외는 빈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킨 후 뭔가 당기는 시늉을 했다.

투두둑.

이곳으로 오는 동안 죽인 여덟 구의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세 번주의 눈이 거의 동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알았느냐?”

몽외는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낸 웃으며 세 번주의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끄덕끄덕.

손에 쥔 이 번주를 제외한 두 번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탁목을 보냈느냐?”

***

“누구냐!”

각진 얼굴과 강인한 턱이 잘 어울리는, 누가 봐도 무인임을 알게 하는 폭풍각주 가무경의 오른손에 구겨진 서찰이 쥐어져 있었다.

[맥적산을 관리하던 번주 셋과 호위 여덟이 별다른 부상도 없이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지시 바랍니다.]

“조사 중입니다, 각주님.”

가무경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던 무인 둘이 허리를 접었다.

“모호, 벽과. 누가 그랬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흉수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가만, 가만. 지금 세 번주가 반항도 못 하고 죽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가무경의 턱 근육이 불룩해지며 두 호위를 돌아봤다.

두 호위는 묵묵부답으로 허리만 숙이고 있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까닭이다.

“둘은 서둘러 내려가서 지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 시키고 번주 셋 데려가서 자리에 앉혀.”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모호와 벽과가 동시에 대답한 후 방을 나갔다.

며칠 후면 섬서성에 위치한 철혈사자맹 총본으로 가야 한다.

달에 한 번, 진천전의 세 각주와 무성전의 세 각주는 자신들이 맡고 있는 지역의 근황을 보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폭풍각이 감숙성과 섬서성의 경계인 축오(築梧)에 자리 잡은 이유였다.

진천전의 나머지 두 각과 무성전의 오행각, 유성각, 기린각은 섬서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호북, 하남, 산서에 자리했다.

이 여섯 개의 각은 각각 셋에서 다섯 개의 지부를 두고 맡겨진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당한 것이다.

‘안 그래도 탁목이 죽어서 변명거리를 만드느라 골치 아픈데, 그곳 번주들까지 죽어 버리면 정 선위(先位)께는 뭐라고 말씀드리라는 거냐.’

가무경은 서찰을 쥔 손을 아직 펴지 않았다.

폭풍각주에서 진천전주를 보좌하는 선위가 된 정안에게 받은 한 가지 문양 때문이다.

―이 문양이 찍힌 서찰을 받으면, 거기에 적힌 수준보다 높은 자를 선별해서 보내라. 내가 선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문양 때문이니 잘 써먹어라, 가 각주.

처음엔 믿지 않았다.

은밀히 정안이 건네준 책에 나온 이름을 찾아가 확인했고, 그 이후로는 정안의 말이 진실이란 것을 알게 됐다.

―다른 각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막령 알지? 지닌 실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문이 자자했지만 타고난 기반이 없어 올라오질 못하는 자 말이야. 그가 어떻게 다른 각에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그 문양 때문이야. 내 사람 보내긴 싫고 검증은 하고 싶고. 왜냐고? 그 서찰에 적힌 곳으로 가면 군림단 교림이 있다고 했거든. 뭐라도 해서 튀어야 하는 시기여서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막령을 보낸 거지. 결과는 어땠을까? 막령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그 막령이 말이다. 그 서찰에 적힌 수준을 고려해서 보낸 자인데도 아슬아슬했던 거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나머진 가 각주의 판단대로 하라고.

구 년 전인가, 시범적으로 판영필을 뽑아 도끼와 도가 교차된 문양이 보낸 군림단 교림과 싸우라고 시켰다.

결과는 승리.

현재는 뇌각의 소모품으로 잘 사용되고 있다.

뇌각주 성진은 종남파 일대제자다.

다른 각들도 마찬가지지만 구대문파 출신들은 자신들 외엔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무경과는 아무 상관 없다.

이번에 뽑은 탁목을 구룡각에 주지 못한 것이 짜증날 뿐이기 때문이다. 당장 그 문양의 서찰이 다시 올지도 의문이고.

‘판영필?’

가무경은 불쑥, 작고 날카로우며 집요하기까지 한 판영필의 눈이 떠올랐다.

그에게 시켰다면 이번에도 실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데리고 있기 버거울 정도로 요구가 많아진 탓에 다른 각으로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역이 천수였지? 세 번주가 뭘 알고 있다고?’

가무경은 고개를 돌려 구석에 만들어 놓은 모형을 돌아봤다.

판영필과 탁목을 생각해서 그런가?

사천성이 눈에 들어온다.

세 번주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뭘까?

‘설마.’

가무경의 눈이 커졌다.

세 번주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자들이지 정보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폭풍각의 위치.

재빨리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시야 한가득 폭풍각의 모습이 담겨졌다.

뒤쪽은 막혀 있으니, 자신이 있는 중앙 전각까지 오는 길은 저 끝에 있는 세 번째 단부터 관통하듯 나 있는 계단뿐이다.

세 번째 단에 배치된 인원은 사백.

두 번째 단에는 이백.

중앙전각 바로 아래는 오십여 명의 폭풍각 정예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픽.

가무경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폭풍각의 견고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까지 흔들었다.

창문을 닫으려 양손을 뻗었다.

텁.

‘누, 누구!’

가무경은 순식간에 입과 코가 막혀 버리자 눈만 커다랗게 치뜬 채 뒤로 물러섰다.

신경이 반응하기도 전에 얼굴을 제압당했다.

누군지 확인하려 애를 썼으나 어찌 된 일인지 검은 무복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찌잉!

‘윽!’

가무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나 일어날 것 같은 이명이 귀를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크. 제 때 창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면 꽤 번거로울 뻔했어. 잘했다.”

‘자, 잘했다고?’

가무경은 기를 끌어 올려 얼굴을 쥐고 있는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손의 주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꾸―욱!

엄청난 악력이 가무경의 광대를 부술 것처럼 압박해 왔다.

가무경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양손을 늘어뜨려야 했다.

“한 가지만 묻겠다.”

‘한 가지? 이, 이자다!’

천수 지부의 세 번주를 죽인 자.

가무경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쥔 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등 교림을 죽이라고 사주했는지 말해라. 간단하지? 크크크.”

슥―.

‘힉!’

가무경은 갑자기 눈앞으로 어둠 두 개를 박아 넣은 것 같은 동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흐…….”

괴인, 몽외가 손을 떼어 주자 가무경은 입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힐끔.

가무경은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 천장을 쳐다봤다.

호위들이 자신의 신호만 받을 수 있다면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쥐새끼들은 찾을 것 없다. 들어올 때 다 죽였으니.”

몽외는 맞물린 치아를 모두 드러내며 웃었다.

‘창문으로 들어올 때 이미 손을 썼다고?’

오싹!

덜덜덜.

가무경은 온몸을 떨며 마른침을 연신 삼켜 댔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었다.

호위들이 살아 있었다면 벌써 난리가 났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나는…….”

“누가, 등 교림을, 죽이라고, 시켰느냐.”

몽외가 웃음을 거두며 깊숙한 동공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무, 문양. 저, 저 탁자 위에…… 으악!”

와득!

몽외는 가무경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쪽 어깨를 빼놓고 정강이를 밟아 부러뜨린 후 탁자로 갔다.

도끼와 도가 교차된 문양이 보였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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