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두근. 두근.
차가운 벽면의 감촉이 손을 감싸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머릿속의 수차를 회전시켜 만들어 낸 진기를 안으로 밀어냈다.
미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도록.
미끼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유영하도록.
양발로 땅을 꾹 누른 채 입질을 계속했다.
‘응?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서쪽 안가에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곧장 반응이 왔었는데 이곳에 사는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더 기다렸으나, 벽의 차가운 감촉만 느껴질 뿐 반응의 징후는 없었다.
손을 떼고 벽을 쳐다봤다.
서쪽 안가의 벽과 같은 구조인 데다 용연의 내공은 그때보다 더 높아진 상태이니 더 빨리 반응이 왔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런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다.
용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찬찬히 짚어나갔다.
방의 위치는 큰 영향이 없으니 제외시키고, 벽에다 불어넣는 기의 양이 달라져서 그런 걸까?
다시 벽으로 다가가 자세를 취하고 서쪽 안가의 벽에 불어넣었던 진기의 양을 가늠해 천천히 내보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역시나 벽 속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공의 강약은 아니란 뜻이다.
“시작만 하면 금방 될 줄 알았더니, 꽤 까다로운데?”
용연은 벽에서 손을 떼며 눈을 가늘게 뜨고서 벽을 노려봤다.
반응이 없는 것이 정상인데, 왜 저 벽이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긁적긁적.
용연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서쪽 안가와 같은 과정으로는 안 된다?
벽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만, 그 정도로 벽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생명체처럼 대하면 그만이잖은가?
“재미있는 녀석이네.”
용연은 일부러 소리를 냈다.
탁탁.
벽을 두 번 두드린 후 심지를 벽 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 외에도 북쪽과 남쪽 안가의 벽이 남아 있었다.
생명체처럼 대하기로 한 이상, 사람들을 한 가지 방식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단은 배를 좀 채우고 나서 다시 한번 도전할지, 방법을 찾아볼지 고민해 봐야겠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다음 날도 이어졌고 그다음 날도, 이후로 삼 일을 더 보내도 벽만 두드리다 나오고 말았다.
육 일째부터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한 번, 중간 중간 생각날 때마다 계속 두드렸으나, 당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용연은 방을 나와 안가까지 벗어나 산책을 시작했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왜 반응이 없지? 그때는 서쪽 안가에 우곤 교림님, 담 교림님, 양 선배님, 이서가 있었어.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다? 아니야, 그분들은 벽에다, 벽에다…… 아! 그분들은 벽에다 대고 수련을 하지 않았어!’
반짝.
용연의 눈이 커졌다.
“그래, 거기!”
용연은 부지불식간에 소리치며 입구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우곤이 서쪽 안가를 떠날 때 그간 깨달은 바를 쏟아 냈던 곳이 떠오른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안가 내부를 청소하며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살펴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끼이걱―.
둥그런 바위를 들어 올리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후욱―.
“윽!”
막 한 발을 들인 순간, 안에서 뜨거운 공기가 확, 끼쳤다.
지하라면 공기가 습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역한 냄새가 아니라 마른 먼지가 코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천장 중앙에 박힌 야광석이 벽과 이어진 기둥을 밝히고 있었다.
일렁―.
용연이 앞으로 다가가자 주위공기가 굴절되듯 기둥이 기를 뿜어냈다.
용연은 벽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두근.
지금까지 심장이 뛰지 않았던 것처럼 거세게 가슴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석벽이 뿜어내는 기운은 대단했다.
‘동쪽 안가의 괴물이 사는 곳은 여기였어. 어쩌면 서쪽 안가의 괴물도 지하에 살고 있다가…… 음?’
용연은 생각을 멈추고 벽을 쳐다봤다.
왜 그토록 노력해도 방 쪽으로 오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삼제의 원리.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서쪽 안가의 벽에 밀어 넣었던 기가 그것임을 잊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기둥에 손을 댔다.
머릿속의 수차를 힘차게 돌리자 양손으로 진기가 몰려왔다.
‘그렇지!’
서쪽 안가의 벽에서 당황했던 그 느낌이 몰려왔다.
이제 미끼를 던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서두르진 않았다. 이미 닿았으니 간격부터 정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괴물이 손까지 다가오도록 기다렸다.
스스스―.
강에 모래를 던지기라도 하는 건지,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진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따끔.
‘윽!’
날카로운 뭔가가 심장을 찌른 것처럼 아파 왔다.
조금 더 정확한 위치는 심장에서 가슴 중앙으로 약간 이동한 곳이다.
서쪽 안가에서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것은, 성공이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의미임을 알기에 용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악!’
용연은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뜨끔하던 통증이 혈관을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갑자기 온몸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다시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드드드―.
용연의 몸에서 빠져나온 진기가 지하 석실과 마구 충돌을 일으켰다.
끄드드등―.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정신이 든 이유는, 내보낸 진기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새로운 진기가 손을 통해 들어온 까닭이다.
세신의 과정이 만들어 준 신체의 효용이었다.
진기가 들어온 만큼 내보내 균형을 유지하도록 신체 스스로 일으킨 변화인 것이다.
스르―.
‘놈!’
용연의 눈이 빛을 뿌렸다.
벽 속에 던진 바늘에 괴물의 비늘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닿은 상태에서 간격까지 정해졌다.
이제 마지막 원리만 적용해 낚으면 된다.
‘지금!’
드등!
용연은 괴물이 지나갈 때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가 전력을 다해 등이라 생각되는 곳에 마지막 원리의 비늘을 꽂았다.
그러자 엄청난 진동이 지하 석실을 뒤흔들어 댔다.
드드드드―.
‘이제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헉!’
괴물을 끌어올려 단전에 담으려는 순간, 변수가 발생했다.
고오―.
용연의 동공이 확장되고 머리칼은 천장을 향해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다.
‘우욱!’
응아린의 기운이 몸을 잠식하려 할 때만 나타나던 차가운 기운이 일제히 손끝을 향해 밀려온 것이다.
꾸등― 꾸드드드―.
단전으로 들어오려던 벽 속의 괴물이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라도 차린 것처럼 몸을 빼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용연의 몸속에서 일어난 반발력과 벽 속의 괴물의 버티려는 인장력이 손을 통해 팽팽하게 대립을 일으켰다.
황당하게도 두 힘 모두 용연에 의해 일어난 힘이건만, 정작 용연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이 느낌 기억나. 이건…… 서쪽 안가의 벽에 살던 괴물의 힘이야. 으윽!’
용연의 몸이 개조되기 전에 받아들였던 서쪽 안가의 괴물이 이 정도로 엄청났는지 처음 깨닫게 됐다.
들어오려는 동쪽 안가의 괴물에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너도 내 안에서 저놈만큼이나 커진 거냐? 좋아, 이왕 싸울 거면 밀리지 마!’
용연은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먼저 받아들인 서쪽 안가의 괴물을 응원했다.
조금 더 오래 지냈던 놈에 대한 의리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 입가를 비틀어 씰룩였다.
그사이, 두 힘은 용연의 손끝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쩡―!
‘흐억!’
용연의 머릿속으로 빛이 들어온 것처럼 새하얘졌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뇌가 터져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으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다 떠올랐다.
몸과 정신이 분리된 감각이란 것을.
의식의 눈이 되어 자신의 몸을 관조할 때 보이던 공간과 느껴지던 감각이다.
팟.
‘응?’
익숙하다 여겼던 생각을 지워 버릴 정도로 이번은 또 달랐다.
상처를 입은 곳이나 몸의 일부로 들어갔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온통 백색이던 공간이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검은 테두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검은 공간은 이내 줄어들며 백색 공간이 사방을 채웠고, 다시 검은 공간으로, 백색 공간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간의 색 변화에 멀미가 일어날 것 같은 순간.
푸학!
공간이 하늘을 열며 용연을 토해 냈다.
붕 뜬 상태에서 주위를 보자 지하 석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 내 안에서 나온…… 헉!’
용연은 기함을 하며 기둥에 양손을 댄 채 눈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궁금해 하자마자 시선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러자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기한 현상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막이 양손으로 밀려가고 있었고, 그 막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기둥에선 더 큰 일렁임이 일어났다.
‘너, 너도 나오려는 거냐?’
용연은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두 괴물의 충돌과 무관하게 홀로 반짝이는 금빛 팔찌 한 쌍.
응아린도 자극을 받았는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락―.
응아린이 어깨 쪽으로 늘어나며 올라올 때였다.
쩌저쩡!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며 용연의 어딘가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큭!’
용연은 전신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눈을 크게 치떴다.
기둥이 보인다.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응아린이 팔뚝을 지나 어깨까지 올라와 있었으나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타라락―.
양쪽 손에서 올라온 응아린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 가슴을 감싸더니 이내 서로 달라붙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연의 몸은 자신의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덕분에 용연은 온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상을 지켜볼 수 있었고, 전신을 짓누르던 두 괴물의 압박에서도 여유를 찾게 됐다.
‘수차를 더 빨리 돌려야 해. 이놈들의 싸움에 휘말리면 또 내 몸에서 내가 벗어날 수도 있겠어.’
막연히 떠올린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리려면 머리가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데, 용연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수차를 돌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음?’
고민을 시작하려던 용연은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응아린은 목 윗부분으로도 아래쪽으로도 오르내리지 않고 가슴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약 벽 속의 두 괴물을 손끝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여 싸우게 만들면?
의도하지 않게 몸을 삼등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짝.
용연은 눈을 빛내며 머릿속의 수차를 최대한으로 회전시켜 진기를 전신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몸을 열었다.
세신의 과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몸을 연 뒤에는 반드시 들어오는 진기를 거부해선 안 된다.
교림들 모두가 했던 말이었고, 매번 실천했던 일이었다.
여전히 자세한 의미를 알 수는 없으나, 어떻게 해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알게 됐다.
손을 통해 내보냈던 진기를 거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놨다.
그 순간, 용연을 감싸고 있던 막과 기둥의 일렁임이 갑자기 멈췄다. 아니,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빽빽하던 벽에 미세한 구멍이 생긴 것을 기둥 안의 괴물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콰우우우우―.
‘으으윽!’
용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손을 태워 버릴 듯한 엄청난 열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드드드등―.
지하 석실에서 시작된 진동이 지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뒤쪽 암벽으로까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