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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71화 (71/232)

71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것이 적적해져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을 뿐입니다.

피항.]

피항은 붓을 내려놓고 동쪽 안가가 위치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류의 서찰을 읽고 나서야 그동안 그쪽으로 임무를 나가도 동쪽 안가에는 들르지 않은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거기는…… 좀 묘하긴 했지.’

이 년 전, 무공을 수련하던 중 갑자기 지치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엔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수련 중이라 그랬을 거라고만 치부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년 동안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고?

피항은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쓰려고 붓을 들었으나 이내 다시 내려놓고 서찰을 전서구의 다리에 묶어 보냈다.

***

툭, 투둑―.

용연은 동쪽 안가에 도착하자마자 녹슨 낫으로 안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쪽 안가 역시 빈 동굴 안에 방과 공간이 자리했는데, 서쪽 안가와 다른 점은, 폐가처럼 수풀만 우거져 있다는 것이다.

오지인 데다 식량을 구하는 것까지 제한적인 곳이라 단원들이 자주 찾지 않은 모양이다.

한참 동안 풀을 베던 용연은 일어나 내부를 둘러봤다.

이제야 제법 넝쿨에 가려졌던 모양새들이 드러나 있었다.

“입구는 그대로 두고. 이제 뭘 할까? 먹고 지낼 재료들 좀 구해 와야겠다. 음, 뭐, 나쁘진 않네.”

용연은 서쪽 안가와 비슷한 구조의 내부를 훑어보다 피식, 웃었다.

이 넓은 공간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북쪽 안가와 남쪽 안가를 선택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툭.

토끼 두 마리, 물고기 이십여 마리, 먹어도 되는 약초 한 아름.

짊어지고 움직일 때는 몰랐는데 내려놓자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탁. 탁.

부싯돌을 부딪치자 불꽃이 튀며 마른 장작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일단은 횃불 대용으로 써야 해서 가기 전에 늘어놓은 대여섯 개의 마른 장작을 세워 불을 붙였다.

치이익―.

마른 장작 중간쯤에 물을 적셔 놓아서 나는 소리다.

우물가에 횃불을 세워 놓고 재료들을 가져갔다.

토끼 두 마리는 가죽을 벗긴 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마른 잎에 감싸 두고, 물고기는 내장을 빼내 나뭇가지에 꿰어 역시나 마른 잎으로 감쌌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찌든지 굽든지 해서 먹으면 될 것 같았다.

횃불 하나를 들고 정자 앞에 섰다가 좌측 끝 방으로 향했다.

서쪽 안가에서 묵었던 방과 같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휘휘 저어 거미줄을 제거하며 횃불 놓을 곳을 찾으려는데 벽에 움푹 들어간 곳이 보였다.

“음?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용연은 파인 곳으로 가 손을 대봤다.

미끈하고 축축한 느낌.

기름이 파인 곳 안에 그득했다.

반가운 마음에 횃불을 대려다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지 역할을 하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있다.”

손가락 하나 크기의 얇은 막대기 한 묶음이 줄에 매달려 있었다.

하나를 빼내 불을 붙인 뒤 구멍에 넣었다.

용연은 얼른 횃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 끈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심지를 여러 개 쥐고서 벽에 난 구멍으로 불을 붙여 넣었다.

“이야, 서쪽 안가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용연은 방을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춤을 추는 그림자들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벽에다 손을 대고 또 다른 괴물을 만나 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너무 졸렸다.

지난 열흘 동안 제대로 숙면을 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일.”

탁. 탁탁.

용연은 인사를 하듯 벽을 두드리고는 딱딱한 침상에 누웠다.

“어?”

뻑뻑한 눈이 떠지며 흐렸던 초점이 맞춰졌다.

설마 조금 전에 누웠는데 벌써 날이 밝거나 한 건 아니겠지?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잠을 잤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것이다.

일어나 환해진 방 안을 둘러볼 때였다.

“아, 불!”

용연은 튕기듯 벽으로 가 심지로 사용했던 막대를 꺼내려다 멈춰 섰다.

“꺼져 있어?”

막대는 끝이 검게 그을린 채 담겨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들어와서 불을 끈 것일까?

덜컹.

용연은 곧바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연무장으로 사용했을 것 같은 공간에 네 개의 둥근 빛이 내려와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어젯밤에는 안 보였던 네 개의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장관에 용연은 방 앞에서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에 잠식됐던 지난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구석구석까지 빛으로 채워진 동쪽 안가의 내부는 용연에게 축복을 내려 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흐읍.”

눈에 보이는 장관을 마시듯 숨을 들이켠 용연은 바쁘게 하루를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꿰어 둔 물고기는 햇볕에 마르도록 옮겨 놓고 토끼 고기는 주방으로 가져왔다.

이제 식사를 준비하면 된다.

“좋네.”

식사를 마친 용연은 볕을 쬐며 정자에 누웠다.

위에선 햇빛이 내려오고 내부는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공기를 순환시켜 준다.

보이지 않게 틈이 많은 공간인 모양이다.

이곳을 안가로 만든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가만,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지내고 있는 단원이 없는 거지?”

용연은 몸을 일으키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그러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야 목적이 있으니 머물려고 치웠지만, 다른 분들이라면 이렇게 지저분한 곳에 머물고 싶진 않겠다.”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어젯밤에 했던 청소를 본격적으로 해 버리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실천은 바로 시작됐다.

식량부터 구해야 하는데 마을을 찾아 오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부탁하는 것이 빨랐다.

표식을 남겨 둔 곳에다 붉은 꽃잎을 짓쳐서 ‘동안식요(東安食要)’라 남 겨두었다.

외연, 은타, 고람 중 어느 식구든 보면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안가로 되돌아가 창고를 비우고 주방을 정리하고 우물가와 벽 주위의 풀을 뽑고 다지는 것까지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자르거나 옮기는 일보다 자잘하게 손을 대야 하는 번거로움이 커서 며칠 동안 계속 움직여야 했다.

며칠이 지나니 이상한 요령도 생겼다.

검지와 중지로 풀을 잡고 비틀어 뽑은 뒤 튕기면 원하는 곳에다 쌓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됐다.”

마지막 풀을 튕겨 낸 후 일어나 허리를 폈다.

소소하게 여겼던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용연은 말끔해진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구석구석 자신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앞으로 동쪽 안가에 대한 애착은 커질 것 같다.

“자, 이제 괴물에게 친구를 불러 줄 차롄데. 많이 늦으시네.”

용연은 입구 쪽을 돌아보다 쌓아 놓은 잡초 더미를 안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 멀리 몇몇 인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여길 용연 학림 혼자서 싹 청소하신 건가요? 대다하네요, 대단해요.”

자신을 고람의 덕일 대주라 소개한 커다란 덩치와 우락부락한 얼굴의 삼십 대 사내는 놀라서 입까지 쩍 벌렸다.

“지내려니 너무 관리가 안 돼 있어서요. 일단 재료부터 창고로 옮겨 주시겠어요?”

용연은 덕일과 함께 온 두 고람 식구들이 지나치게 놀라자 머쓱해져서 창고로 안내했다.

덕일과 두 고람 식구의 감탄은 창고까지 가는 내내 이어졌다.

“대주, 이런 곳이었습니까?”

“엄청 멋있는데요?”

“그러게. 나도 몰랐네.”

용연은 세 사람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싶었으나, 모른 척 창고를 열었다.

“용연 학림, 몸에 이상이 있거나 하진 않았죠?”

덕일이 재료를 모두 넣은 뒤 불쑥, 질문을 건넸다.

“예?”

“이곳에서 며칠 동안 계셨잖아요?”

“예. 며칠 됐어요.”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으세요?”

덕일은 조심스럽게 용연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있구나.’

용연은 덕일과 뒤의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연이 있으면 말해 주면 될 텐데, 계속 눈치만 보고 있으니 불편해진 것이다.

“아!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용연 학림. 서너 번이나 고람 식구들 몇몇이 이곳을 다녀오고 난 뒤에 앓는 일이 있었거든요.”

“예?”

“이번만 해도 이곳으로 가려는 식구들이 없어서 제가 직접 저들을 뽑아서 데려온 거예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니 언짢게 생각하진 마세요.”

“전혀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용연은 그제야 세 사람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안가 내부를 빙 둘러봤다.

세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용연의 시선을 따라 천장 쪽으로 올릴 때였다.

“흡!”

셋 중 한 사람의 숨소리인지 셋 모두의 숨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

벽에 숨어 있다가 자신들의 눈에만 보이도록 나타난 것일까?

한 쌍의 눈처럼 생긴 회색 암영이 드러났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꿀꺽.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덕일이 고개를 끄덕여 봤다는 것을 인정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꿀꺽.

셋의 목젖이 동시에 울럭였다.

오싹한지 몸까지 살짝 떨었다.

덕일이 고람의 두 식구를 눈짓으로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요, 용연 학림, 우린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예? 알겠습니다. 덕분에 안 굶고 지내게 됐습니다.”

용연은 서둘러 돌아가려는 세 사람의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 그럼.”

덕일 등은 내달리듯 안가를 떠났다.

그 모습에 용연은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밖으로 나온 덕일은 안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그치듯 두 사내를 돌아봤다.

“그, 그거 뭐였냐?”

“예? 당연히 저도 모르죠. 갑자기 커다란 눈이 벽에서 나오는데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돌렸어요.”

“저, 저도요.”

사내 둘은 벽에서 나오던 형상을 떠올리다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데, 대주는 봤죠? 뭐였어요?”

한 사내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덕일을 쳐다봤다.

“보, 보긴 뭘 봐. 나도 그 눈을 보자마자 소름이 쫘악! 어후 야, 또 생각해도 소름 돋네. 으으, 가자.”

덕일은 화들짝 놀라 두 사내를 향해 손까지 내저으며 돌아섰다.

“가만, 대주도 이러는 곳에 용연 학림이 며칠이나 있었던 거예요? 이야, 나이는 어려도 학림이라 그런 건가?”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학림이라서가 아니라 담이 큰 거야, 담이.’

덕일은 차마 이곳에 교림도 몇 명 왔었다는 말을 해 주지 못했다.

용연은 덕일 등이 떠나자 자루에 담겨 있던 식량을 풀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둔 뒤 나왔다.

긁적긁적.

이 좋은 곳에 왔다 간 뒤 앓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됐고. 이제 제대로 한 번 싸워 보자.”

용연은 덕일 등이 했던 말을 떨치며 묵고 있는 방을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척.

문고리를 잡는 순간, 며칠 동안 자러 들어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벽 쪽을 돌아보지 않고 지냈지만 서쪽 안가와 다르지 않은 구조라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미리 정해 놓았다.

적당한 넓이로 양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벽에 밀착시켰다.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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