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등언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헛바람을 삼켰다.
용연이 손을 대자마자 막대한 진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러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당하게도 기감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며, 탁목이 나무 뒤에 숨어서 힘겹게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턱.
용연의 손을 떼어냈다.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등 교림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새삼 몽 선림님의 안목에 감탄하게 됐다.”
“예?”
용연은 등언이 뜬금없이 몽외에 대해 말을 하자 의아한 표정이 됐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쉬고 있어라.”
톡. 톡.
등언은 용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등 교림님, 그렇게 나가시면 안 됩니다.”
척.
등언이 손을 들어 용연의 말을 막았다.
“탁목, 이제 끝을 보자.”
등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무 뒤에 있던 탁목이 호흡을 고르며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
“그 후배는 죽었느냐? 서로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않으마.”
탁목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 정도 공격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
“음? 살아 있다고?”
탁목의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한 가지만 묻겠다. 어떻게 내가 그곳을 지나갈 걸 알았느냐?”
등언은 화제를 용연에게서 다른 것으로 돌렸다.
“……가면 있을 거라고 했다.”
탁목은 잠시 고민하다 숨을 내려놓으며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누가?”
“…….”
“이유는?”
“이름 때문이다.”
“이름?”
“지금까지 알리지 못했던 내 가문이 지어 준 내 이름.”
“고작 그것 때문이라고?”
등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고작? 등 교림이라지? 어느 ‘무가의 누구’도 아니고 그저 교림. 만족하나?”
“전혀. 나는 단에 몸담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만족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경지에 오른 분들이 여덟이고, 최선을 다한다면 한두 계단 더? 물론 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는 성장이다. 이런 최고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내게, 만족? 그런 걸 생각할 시간조차 아까워.”
말을 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가?
말을 끝낼 때, 등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평생을 노력해서 올라온 자신이 저런 한가한 고민이나 하는 자에게 밀렸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찡!
바위 뒤에 앉아 등언의 말을 듣던 용연은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절절한 등언의 속마음을 들은 까닭이다.
담영호가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최고의 환경.’
용연은 군림단에 대한 평가로 저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군림단원 개개인은 무인으로서나 한 지역을 아우르는 패자(覇者)의 대리인으로서나 손색이 없는 능력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누군가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군림단원이 되기 위해서다.
뒤쪽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용연 쪽으로 밀려왔다. 아니, 사방으로 번져 가는 것을 용연도 느끼게 됐다.
스스스―.
등언의 전신에서 온유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가 탁목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 이 정도 진기를 아직도 일으킬 수 있다고?’
잠유기의 존재를 모르는 탁목으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등언이 눈앞에 있는데 이전처럼 선명하게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등언을 처음 만났을 때 몇 겹의 잔영을 일으키던 것처럼 말이다.
“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탁목은 검을 쥔 손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고정시키며 물었다.
“회복했으니까.”
“회복?”
“이 정도까지 회복될 줄은 몰랐다.”
“……그 후배란 자가 영약을 가져온 것이냐?”
“영약?”
등언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젊은 단원의 진기를 흡수한 것이니 영약이라면 영약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 까닭이다.
그러나 이 대치 상황을 더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기에 대답 없이 양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자 지팡이처럼 곧은 줄이 팔목에서 내려오며 땅에 닿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탁목의 검으로부터 목숨을 지켜 준 애병 사승(巳縄)이다.
망량과 함께 펼칠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인 만량포(弯魎砲)를 펼치려는 것이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쏘아대는 포.
탁목에게 사용해 본 적 있는 무공이지만, 지금이라면 며칠 전보다 더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안했던가?
탁목은 등언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검을 떨쳐 냈다.
쉬악―.
바람을 가르며 기가 응축된 수십 줄기의 예기가 사방에서 등언의 몸을 노리고 쏘아져 왔다.
시싯.
등언의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리다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목표를 잃은 탁목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재빨리 진기를 회수하려 했지만, 몸이 주인의 뜻대로 반응해 주지 못했다.
“헛!”
살벌한 예기가 뒤에서 느껴진다 싶은 순간, 체면이고 뭐고 일단 몸을 굴려 피했다.
푸학!
탁목이 서 있던 자리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
탁목은 그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등언을 찾아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댔다.
“이러면 힘이 좀 나겠느냐?”
등언이 탁목의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이 탁목의 입을 열고 튀어나왔다.
이번 공방으로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끄그극.
탁목이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검에서 쇳소리가 심하게 났다.
철수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등언의 눈은 차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퓻.
“큭! 비, 비겁…….”
탁목은 갑자기 화끈해지는 가슴의 통증에 고개를 내렸다가 분노로 눈을 크게 치떴다.
등언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사승의 길이를 고려한 적당한 거리.
“그런 말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때나 상대방에게 빚을 지울 때 써.”
등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돌아섰다.
쿵.
탁목이 쓰러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출렁―.
조각배가 물살에 흔들렸으나 용연과 등언은 바닥에 고정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숲에서 내려올 때부터 지금까지 등언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건너편 강가에 도착하자 용연은 조각배를 묶어 놓고 등언의 뒤를 따랐다.
“용 학림, 뭐 하는 건가?”
“예? 아, 허락도 없이 빌려갔는데 허술하게 맸다가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배 주인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요.”
“마음 씀씀이가 좋구나.”
등언은 용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단하게 묶인 것까지 확인했나?”
“예.”
“배 주인의 눈에는 오히려 용 학림의 매듭이 허술하게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등언은 무심코 떠올린 생각을 여과 없이 입을 통해 내보냈다.
그 어떤 매듭도 배 주인의 눈엔 차지 않겠지.
발견 즉시 자신의 매듭으로 고쳐 묶을 것이고, 이전의 매듭 따위 기억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배는 떠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묶어 놓기만 하면 되는데, 마치 굉장한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배도 아니고 매듭도 아닌데 말이야.’
요 근래 등언은 자주 답답함을 느껴 왔다.
임무를 완수해도 가시지 않는 갈증들.
무공은 몇 년째 답보 상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벽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맞다, 중요한 것은, 배도 아니고 매듭도 아니었다.
“등 교림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등언은 용연의 말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시선은 앞쪽을 향한 채 요동도 하지 않았다.
걱정이 된 용연이 다시 한번 불렀다.
“등 교림님?”
“……음?”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안색? 아,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대답을 했음에도 용연의 걱정스러운 눈이 거둬지질 않자, 등언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옷이 많이 상해 있었다.
“상처가 클 것 같아도 대부분 살갗을 스친 것들이야. 이런 것들 걱정보다 그 애늙은이 같은 눈 좀 치워 주지 않을래?”
“예? 아! 죄송합니다, 등 교림님.”
“농담이야, 농담. 날 돕겠다고 몸도 안 사리고 달려온 게 생각나서. 용 학림에게 빚 하나 졌다.”
“당연한 일에 빚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용연은 손사래를 치다 고개까지 좌우로 흔들었다.
“교림 선배들이나 선림들도 아니고, 내 손으로 세신의 과정을 해 준 용 학림에게 도움을 받았어.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용 학림은 모를 거야.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라고.”
“아…… 예.”
용언은 민망해져서 멋쩍게 웃으며 등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진짜 고마운 건 따로 있어.”
“예?”
“용 학림이 전해 준 잠유기 덕분에 최고의 위력은 아니지만, 최적의 만량포가 어떤 건지 찾게 된 거야.”
꾸욱.
등언은 사승을 쥘 때처럼 손을 모았다.
억지로 만량포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려 하지 않고 적절한 정도를 알 것 같은 감각.
최적이라 표현한 이유였다.
‘최적?’
용연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으나 이미 돌아선 등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안색이 안 좋았느냐는 듯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함이 느껴진다.
시선을 내려 양손에 찬 응아린을 쳐다봤다.
네가 또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 잠시 바라보기는 했다.
***
[등언 교림이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위기를 겪은 뒤라서 그런지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무묵 학림은 적휘 학림을 데리고 북쪽으로 갔고, 용연 학림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흔적을 발견하고 잘 대응했습니다.
몇 번이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사람답게 두 번째 임무에서 발군의 역량을 보여 주고 있네요.
강을 건널 때……(중략)…….
진류 대교.]
입을 열면 하얀 김이 날 것처럼 찬 날씨였으나, 팔각정 안 탁자에 앉은 세 노인은 얇은 옷 위에 장포만 걸치고 있었다.
“처음이구려, 시험 아닌 시험을 통과한 교림이 나온 건.”
표정 변화 없이 눈썹 앞쪽만 남아 있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솟은 코와 말할 때 적당한 높이에 있는 귀가 움직거렸다.
“나는 이 용연 학림에 관심이 갑니다. 현승 선림의 젊었을 때 느낌? 그런 게 느껴지는구려.”
가는 눈과 전반적으로 옅은 눈썹, 주먹코에 두툼한 입술을 가진 노인이 말을 받았다.
“한 명 늘었을 뿐이에요. 단은 더 강해져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언제 또 몇이나 단원을 잃을지 몰라요. 다들 제 얘기 아시겠습니까?”
정리하듯 말을 마친 노인은 처진 눈꼬리와 눈썹 끝을 광대에 걸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국 일정의 말씀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제가 할 말을 잠 삼정이 해 주는구려.”
잠사우의 말에 동조하며 여벽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국진세는 한쪽 광대를 올리고 눈썹을 역팔자로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정.
군림단 최고 결정자들은 각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