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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67화 (67/232)

67화

“첫 만남이 생각나네요.”

적휘는 용연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그때 흉내 내는 거야. 적 학림이 내게 해 줬던 것처럼.”

용연은 씨익,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이런 분인 줄 몰랐을 때 일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용 선배님.”

“늦었어.”

“그, 그러니까요. 하하, 하.”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너희들, 형도준 교림과 우곤 교림 흉내 그만 내고 이리 와 봐.”

무묵이 고개를 흔들며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예. 아! 안 그래도 무슨 일인가 묻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용연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뒤쪽을 가리키며 무묵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적휘도 눈을 빛내며 무묵을 쳐다봤다.

그 모습에 용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휘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원래 임무는 다른 것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바뀌게 됐다.”

“예?”

용연은 당황해서 반문했다.

이전 임무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다른 임무로 바뀌었다면 적어도 알려는 줬어야 하지 않나 싶은 까닭이다.

징계 중이었기 때문일까?

긁적긁적.

용연은 멋쩍게 볼을 긁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학림들을 모두 부른 것이니 오해는 말고.”

무묵이 용연의 심정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쳐다봤다.

“예.”

“위에서 이미 봤겠지만, 여기서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다. 한 분은 둘 다 본 적이 있는 등언 교림이고, 다른 한 명은 철수신군 탁목이란 자다.”

무묵은 말을 멈추고 용연과 적휘를 돌아봤다.

둘 다 많이 놀란 듯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등언 교림에게서 연락이 끊어진지 열흘이 지났다. 고람 식구들과 함께 움직이던 중이기에 이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명은 여기까지다.”

“선배님, 탁목이란 자가 누굽니까?”

용연은 무묵이 탁목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자 나섰다.

“조사 중이라고 한다.”

“그자는 살아 있습니까?”

“모른다. 우리가 찾을 사람은 그가 아니라 등언 교림이다.”

“열흘 전이라고 하셔서 여쭤 본 것입니다.”

용연의 표정에 불만이 묻어났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린 대처였기 때문이다.

“단원의 실종이 의심되면 그 시작점에서부터 흔적을 쫓는 것이 단의 규칙이다.”

“그사이에 등언 교림님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잖습니까?”

“규칙이 그렇다.”

무묵 역시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용연을 돌아보는 눈이 복잡해 보였다.

‘사연이 있구나.’

더 묻는다고 해서 무묵이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등언 교림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진(昌桭)으로 가던 중이었다. 지금부터 세 갈래로 나눠서 추적하며 오 일 뒤에 창진에서 만나기로 한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등언 교림님을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그때 가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르면 된다.”

“선…….”

“용 학림, 그만. 나라고 안 물어봤겠느냐? 하지만 이번 명령은 진 대교께서 내린 명령이 아니다. 그러니 토 달지 말고 따라라. 적 학림도.”

‘삼정?’

용연은 군림단 최고 결정권을 가진 세 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국진세, 여벽, 잠사우.

삼정의 이름 외엔 아는 것이 없었으나, 이번 임무에 그들이 개입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은 할 수 있었다.

무묵이 삼정이란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아니지만, 대교 외에 단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는 오직 삼정뿐이기 때문이다.

“따르겠습니다!”

용연의 생각을 깨뜨리며 적휘의 씩씩한 대답이 들렸다.

‘녀석.’

용연은 적휘의 긴장한 얼굴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영호를 쫓아다니다 첫 실전에 투입됐을 때 자신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적 학림, 걱정할 것 없어.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해.”

“용 선배님, 저는 혼자 움직여서 걱정되는 게 아니라, 다음번에는 제가 용 선배님처럼 행동할까 봐 겁나서 이러는 겁니다.”

“어?”

용연은 적휘의 긴장을 풀어 주려 말을 건넸을 뿐인데 돌아보는 표정이 무척 사나웠다.

적의까지 느껴지는 표정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용연과 적휘의 사이를 지나갔다.

훙― 펑!

“컥!”

적휘가 비명과 함께 날아가 뒷벽에 부딪쳤다.

척.

용연이 나서려 하자 무묵이 손을 들어 막았다.

“뭐? 용 학림처럼 될까 봐? 아직도 네가 후임인 줄 아는 거냐!”

무묵이 목소리에 기라도 실었는지 적휘의 머리칼이 풀썩이며 밀려났다 내려앉았다.

“제가 왜 혼나야 합니까?”

벽에 등을 댄 적휘의 목소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떨렸다.

자신이 화를 낸 이유는, 후임인 줄 알아서가 아니라 선배인 무묵을 무시하는 용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 선배님, 적 학림과 잠시 얘기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용연은 재빨리 무묵의 앞을 막아섰다.

이대로 두면 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용 학림은 적 학림을 이해시키지 못해. 적 학림, 학림이든 교림이든 선림이든 선후배는 존재하나, 우위의 구분은 두지 않는다.”

무묵은 엄격한 눈으로 적휘와 용연을 차례로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할 학림의 막내와! 가르침을 조율해야 하는 선배 학림 둘이 있을 뿐이다. 적 학림, 네가 누구의 말을 따르겠다는 결정 따위를 내릴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알아들었느냐!”

‘아!’

용연은 무묵의 호통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무묵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오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전 임무에서 무묵은 용연을 인정한 것이다.

“용연 학림은 이번이 두 번째 임무 수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보다 겨우 한 번 더 임무에 투입됐을 뿐인데 선배님처럼 대하라니요?”

적휘는 이를 악물며 무묵의 기세를 버텨 냈다.

“두 번째 임무. 맞다. 그런데, 용 학림은 한 번의 임무 수행으로 자신이 더 이상 후임일 때의 용연이 아님을 증명해 냈다.”

무묵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무덤덤했다.

그러자 적휘의 입에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오르는 격정을 어찌할 수가 없어 숨만 거칠게 몰아쉬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한 번의 경험 정도로 보일 수 있다. 허나, 그 한 번이 누군가에겐 평생 올려 보지 못할 까마득히 높은 곳이 될 수도 있다.”

무묵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 근육이 불룩해져 있었다.

‘너무 거창하시다.’

용연은 무묵의 말을 듣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저 말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담영호라 여긴 까닭이다.

누군가에겐 평생 올려다보지 못할 까마득히 높은 곳.

매번 담영호를 보며 느끼는 용연의 생각이었다.

“……하아, 여전하네요, 용 선배님은요.”

적휘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적휘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용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하다? 글쎄. 난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더 높은 곳을 보시나요?”

“높은 곳?”

“꿈꿀 때 보는 곳 말입니다.”

“꿈?”

“예, 꿈.”

무묵은 고개를 끄덕이다 앞쪽 하늘로 돌렸다.

용연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무묵을 쳐다보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활짝 웃었다.

적휘를 도와주던 계곡 같은 곳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용연, 군림단은 땅에 있어.

―알아.

―근데 왜 하늘을 보냐?

―그냥. 꿈꿀 때 다 저길 보잖아?

“무슨 말인가 했다. 더 높고 더 낮고. 저곳에 그런 구분이 있을까? 여전히 보던 곳을 보긴 한다.”

용연은 적휘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학림이 되면 같은 곳을 볼 줄 알았는데, 혼나고 나니 다른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용 선배님.”

적휘의 말투가 편해졌다.

무묵에게 한 대 맞고서 뭉쳤던 것들이 조금은 풀어진 듯 보인다.

“같은 곳을 볼 필요 없어. 적 학림은 적 학림이 보고 싶은 곳을 보면 되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보면 돼.”

히죽.

용연은 말을 하고 나서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겨우 학림의 길에 들어선 주제에 선배랍시고 거드름피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조금 전엔 제가 실수했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충분히 받은 것 같다. 보는 내가 다 아팠어.”

용연은 인상을 쓰며 무묵에게 맞은 부위에 손을 대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죠. 앞으로는 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인데 알려 주신 거니까요.”

적휘의 시선이 무묵에게로 향했다.

용연은 그 시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선임에 대한 무한한 신뢰.

자신이 담영호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게 해 주는 눈빛이었다.

“무 선배님, 저와 적 학림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려 주세요.”

용연은 얼른 무묵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다 풀었냐?”

무묵은 모른 척 돌아서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원래 친했거든요.”

“용 선배의 말대롭니다. 히히.”

용연과 적휘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대답했다.

그제야 무묵의 입가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우리가 움직여야 할 경로는 모두 세 곳이다. 먼저 나와 적 학림은…….”

***

무묵은 철수신군 탁목에 대한 조사와 등언의 흔적을 쫓는 일을 병행하겠다며 적휘와 함께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떠났다.

담영호가 용연의 첫 임무 때 했던 과정을 적휘에게 전해 주려는 것이다.

둘이 떠난 후에도 용연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주위를 살펴봤다.

등언과 단신으로 상대했을 정도의 무력이란 것이 곳곳에 흔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펑! 하고 날아가서…… 여긴가? 아니지, 비슷한 실력이라면 오히려 물러난 폭이 좁을 테니 여기겠네. 이 정도 간격이…… 많기도 하네.”

용연은 발자국으로 추측되는 파인 자국들을 살피며 여기저기를 오가다 남쪽에 난 자국 하나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남쪽을 살피라는 무묵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그쪽으로 움직인 흔적이 보인 까닭이다.

달리고 달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곳까지 가게 됐고 강변까지 다가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용연이 선 곳 앞에 발자국 두 개가 나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메고 있던 무언가를 물에 빠뜨린 것 같다. 돌아선 발자국의 깊이가 앞쪽으로 난 발자국보다 훨씬 옅다.

“교림을 상대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가 고작 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이런 자국을 남겼다고?”

용연이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였다.

그 상태로 한참을 서 있던 용연의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등언이든 탁목이든 다친 자를 제 자가 메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린 것이다.

용연은 시선을 들어 반대쪽 강변을 바라봤다.

무려 반나절이나 추적해 온 보람이 갑자기 느껴진다.

휙.

용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슥.

무언가 억새풀 숲 안으로 사라지는 잔영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요!”

용연은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억새풀 숲으로 숨었던 인영이 고개를 내밀며 용연을 쳐다봤다. 허나, 인영은 반응 대신 재빨리 억새풀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용연은 눈으로 먼저 흔들리는 억새풀을 쳐다봤고 곧장 발을 굴렀다.

텅―.

몇 번의 도약만으로 인영이 달려가던 길목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어구야, 쬐그만 사람이 목청이 엄청 좋…… 으악!”

억새풀 숲을 빠져나오려던 덩치 좋은 사내가 기함을 하며 멈춰 섰다.

조금 전에 봤던 청년이 기척도 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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