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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66화 (66/232)

66화

용연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빚 받으러 온 빚쟁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일까?

용연은 아무 말 없이 묵 노야를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묵 노야였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묵 노야는 용연이 이 무공들을 가져온 이유를 다시 한번 찾아보기 위해 종이를 찬찬히 살펴봤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봐도 이 네 가지 무공은 삼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모르겠네. 도대체 이걸 내게 왜 보여 주는 건가?”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전에 제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네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용연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해가 걸린 위치를 찾았다.

해가 지려면 아직 두어 시진은 남은 것 같다.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묵 노야, 제가 대단한 무공을 구해다 드릴 거라 기대하셨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 자네가 상대하려는 자들은 이미 강호를 수백 년 동안 내려다보던 자들이야. 그런 자들을 이런 무공으로 상대하겠다고? 내가 자네를 잘못 봤던 게야.”

묵 노야는 눈에 힘을 주며 강하게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네요. 잘못 보셨어요.”

“음?”

묵 노야는 용연의 대답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제대로 배운 것은 단에 들어가서부터였어요. 일 년 정도 됐네요. 그런 제가 무슨 수로 묵 노야가 기대하는 무공을 두 달 만에 가져오겠어요?”

“이 무슨. 자네가 한 말이야. 그들을 상대할 무공을 구해 오겠다고!”

“그 말은 믿으면서 제가 가져온 무공은 왜 믿지 않는 거죠?”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까.”

묵 노야는 내려놓은 종이 뭉치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꿈틀.

용연은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자신의 무공이 무시당하자 자존심이 상해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대로 일어나야 할지, 묵 노야를 설득시켜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그 잠깐의 침묵 덕분일까?

‘지나쳤다.’

묵 노야는 종이 뭉치를 가리켰던 손을 거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묵 노야, 이 무공들은 아주 탄탄한 기초를 갖고 있어요. 뼈대만 추려서 분리시켜 놓은 상태라 허술해 보일 수는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떤 형태로도 구현될 수 있다는 거예요.”

‘말이 심했다고 생각한 것조차 후회된다.’

묵 노야는 속으로 기가 찼다.

무공이란 것이 건물 짓듯 머릿속으로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용연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다.

“용…….”

“이 무공들을 시험해 보고 싶어요. 사람들을 좀 모아 주시겠어요?”

묵 노야가 말을 꺼내기 전에 용연이 말을 잘랐다.

“…….”

묵 노야는 머릿속에 못하겠다는 말을 떠올렸지만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묵 노야를 쳐다보는 용연의 눈빛이 지나치게 담담한 까닭이다.

뭘 믿고 저렇게 확신을 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든 의문이 다시 한번 종이 뭉치를 열게 만들었다.

“용 단원은 이것이 실전에 사용될 거라 믿는구려.”

“조아, 각지, 조벽, 각벽. 네 가지 무공의 이름이에요. 실전에서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면, 제 대답은 당연히 ‘예’죠.”

“도대체 뭘 보고 그리 확신을 하는 겐가?”

“사십 년 동안 사용된 무공의 뼈대만 추렸어요. 살이 찌거나 말랐다고 해서 그 안에 뼈대가 없는 건 아니죠. 혹시 몰라 제 접근법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수련도 해 봤어요.”

“흐음.”

묵 노야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상상으로 만든 무공이 아니라 어느 고수의 무공을 뼈대만 추려서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의문은 이어졌다.

그 고수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되지 왜 새로 만들려는 것일까?

생각이 질문으로 이어졌다.

“사십 년 됐다는 그 무공은 어떤가?”

“뭐가 어떻다는 거죠?”

“그 무공을 사용하자는 말일세.”

용연은 묵 노야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올 줄 전혀 몰랐다는 듯 난감한 표정이 됐다.

“왜 그러나?”

“아아, 아…… 하하하.”

용연이 갑자기 묵 노야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묵 노야는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묵 노야, 그렇겠네요. 묵 노야의 생각대로라면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어요.”

“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제가 드리는 무공을 익혀야 할 사람들은 고수들이 아니에요. 누구나, 아무나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야 해요. 그렇지 않나요?”

“어, 아…….”

묵 노야는 대답 대신 고개부터 끄덕였다.

“제가 드린 네 가지 무공을 무게로 비유하면 가장 무거운 것이 각벽이에요. 그 단계까지 올라간 사람이 나머지 세 사람을 누를 수 있거든요. 그럼 가장 가벼운 조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도태될 거예요. 아직 각벽을 조금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는 무공까진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묵 노야가 원할 때까지는 준비해 놓을게요. 이 정도면 오늘 우리가 만난 이유로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렇군.”

묵 노야는 머릿속으로 용연이 한 말을 좇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을 달라?

얼마나 섣부른 생각이란 말인가?

마음이 급했다.

무공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원본을 준다 한들 무슨 성과가 있겠는가?

용연은 거기까지 생각해서 몇 배나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을 가져온 것이다.

용연에 대한 불신이 한 방에 해소됐다.

묵 노야는 부끄러움 때문에 용연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네요. 묵 노야,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신경 쓸게요.”

“아닐세. 이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나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용연은 묵 노야의 말을 잘랐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묵 노야의 계획을 용연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불신하는 것과 다름 아닌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네 같은 사람의 두 달을 무시했네. 미안하네.”

“아니에요. 묵 노야의 계획을 볼 때, 실수하지 않을 거 같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음?”

“저라도 그랬을 거라고요.”

용연은 한 번 더 대답하고서 피식, 웃었다.

이번을 계기로 많은 부분이 해소될 것 같은 예감이 든 까닭이다.

“사람을 모아서 시험해 보도록 하지. 다 듣고 나니 다르게 보이긴 하는군.”

묵 노야도 만족스러운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후우, 참고 참은 덕분에 결국은 설득시켰어. 이제 고삐를 넘길 차례야.’

용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엔…….”

***

―다음엔 묵 노야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해요.

용연은 달리던 속도를 늦추며 잠시 쉴 곳을 찾기 위해 주위로 눈을 돌렸다.

잡초를 머리털처럼 삐죽이 드러낸 바위가 보인다.

훌쩍, 몸을 날려 그곳에 내려서자마자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불쑥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오 일 전에 묵 노야에게 했던 말이었다.

만승서고의 지하 석실에서 두 달 내내 무공만 익히지 않았다. 수많은 고민을 꺼내서 살피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도 몇 가지 고민을 떠올리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묵 노야와의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그때 나눈 대화가 응아린과 관련된 문제들보다 중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여겼던 것일까?

기분이 묘해졌다.

응아린과 묵 노야 사이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문제는 용연에게 언제까지고 그 문제에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용연은 응아린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절실함?’

불쑥, 머릿속으로 묵 노야의 표정이 떠올랐다.

긴장은 하고 있지만 절실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

“아!”

갑자기 용연의 입술을 비집고 탄성이 터졌다.

묵 노야에게선 헤어질 때까지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계속해서 찜찜함을 주던 느낌의 정체.

묵 노야는 자신을 이용하고 버린 자들에 대한 복수가 용연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용연은 그제야 막혔던 곳이 뚫린 것처럼 머릿속이 맑아졌다.

“묵 노야도 절실했으면 좋겠네요. 제가 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해 주세요.”

혼잣말을 하던 용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가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공동의 적을 각자의 방식으로 응징하자는 합의.

바로 용연과 묵 노야가 나눈 거래다.

관계가 아닌 거래.

묵 노야는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용연은 자신이 건네야 할 물건인 무공들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었다.

물건을 받았으니 이제 묵 노야는 셈을 해야 한다.

적당히? 받은 만큼?

최선이 빠진 거래는 용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음이니까.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했던 문제로 돌아갈 차례다.

응아린과 괴물을 자신의 의지로 깨우고 잠들게 만들 수 있는 방법.

한 가지 가설은 지하 석실에서 가지고 나왔다.

몇 번의 경험으로, 응아린이 깨어 있을 때는 괴물 역시도 깨어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 보기로 했다.

괴물을 먼저 깨웠을 때는 응아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졌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동쪽, 북쪽, 남쪽의 안가 중 한 곳을 가 볼 생각이다.

“일단은 후배 교육부터 시키고.”

용연의 얼굴에 만승서고를 나온 뒤로 가장 해맑은 표정이 지어졌다.

***

달리던 상태에서 좌우를 살피다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긴 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 있을 거라 여겼으나 조금 더 올라가야 할 모양이다.

아직은 어떤 위험도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아…….”

구릉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자마자 용연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광경에 탄식을 흘려야 했다.

엄청난 싸움의 결과가 아래쪽 삼, 사십여 장의 공간을 찢어발겨 놓았다.

땅은 수십 갈래로 찢겨져 속살처럼 붉은 황토를 꺼내 놓고 있었고,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밑둥도 남기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 선배님, 적휘…….”

용연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무묵과 적휘를 떠올리며 눈을 부릅뜨고 일대를 샅샅이 뒤져갔다.

막 아래쪽으로 몸을 숙였을 때였다.

“용 학림, 여기야!”

“무 선배님!”

용연은 반색을 하며 아래쪽에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무묵을 봤다.

“내려와.”

“예. 아! 무 선배님,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고 뭐고 우리도 조금 전에 왔어.”

무묵의 신형이 있는 곳 안쪽으로 사라지자, 용연은 곧장 몸을 떨어뜨렸다.

턱, 휘릭.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무묵이 사라진 곳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용 선배님!”

용연이 자세도 잡기 전에 적휘가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적휘. 몇 달 만에 보네. 학림 된 것 축하한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난 도와준 것도 없는데 무슨.”

“쫓아간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다고 했지. 기억한다. 그리고 잘 왔다.”

용연은 적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으며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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