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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65화 (65/232)

65화

쩌―우웅!

드드드드―.

“헐. 또 시작이네.”

종 노야는 새로 들여온 책 한 아름을 들고서 바닥의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서 있었다.

필사본을 만들어야 하는 책들이라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진동은 이내 멈췄고 종 노야는 가던 길을 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탁자에 쌓아 둔 책들이 좌우로 쓰러져 있었다.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책들을 원위치 시키고는 지하실입구를 돌아봤다.

“그만 하고 얼른 나와서 밥 먹어!”

씰룩.

시원하게 외친 종 노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탁자 위에 놓인 서찰 한 통 때문이다.

어제 전해 줬어야 하지만 용연이 올라오질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달. 참, 빨리 간다.”

종 노야는 내뱉는 숨에 섞어 아쉬움을 담았다.

처음에 왔을 때는 석 달 동안 한 번밖에 수련하지 않던 녀석이 지난 두 달 동안은 아예 지하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찰은 읽을 것도 없이 임무에 복귀하라는 내용일 것이다.

그륵―.

지하실 입구가 열리며 용연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 먹을 건 어디 있어요?”

“나와.”

“종 노야, 좀 봐주시면 안 돼요? 거의 다 됐어요.”

“안 돼. 진 대교가 서찰을 보냈다.”

종 노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팔을 쭉 펴 서찰을 지하실 쪽으로 들었다.

용연은 아쉬운 듯 지하실 쪽을 한 번 돌아보곤 땀으로 흠뻑 젖은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방으로 나왔다.

서찰의 내용은 종 노야의 예상대로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복귀하라지?”

“예.”

“부르면 가야지. 마당에 밥 차려 놨으니 내가 준 것들 처리하고 나와.”

“금방 가지고 나올게요.”

“어허! 뭘 가지고 나와? 내가 그것들 줄 때 뭐라고 했냐? 다 읽었으면 태워. 너 나오면 거기 들어갈 사람 없으니 지하실도 폐쇄시킬 거야.”

종 노야는 정색을 하며 말하고는 들어갔다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진심이세요?”

“어차피 없어졌어야 할 물건들이야. 괜한 걸 남겨 둬서 이 무슨 고생이냐.”

“괜한 물건이 아니잖아요. 저 귀중한 책을 왜 없애려고 하세요?”

용연은 수련을 하며 종 노야가 응아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절절하게 노력했는지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귀중? 흘흘. 너도 알다시피 단을 떠난 단원은, 단에서 받은 모든 것을 파기해야 해. 그 책들은 응아린에 관한 것들이라 버리지 않았을 뿐이야. 이제 새 주인을 만났으니 지난 건 버려야지. 버려.”

“응아린은 그럼.”

“개인적으로 얻은 물건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십 장 이상의 길과 숲이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져 있는 곳을 보게 됐고, 거기서 그놈을 발견했다. 웬 해골의 손목뼈에 껴 있더구나.”

종 노야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쓰게 웃고는 용연의 손목을 쳐다봤다.

“누가 죽인 거죠?”

용연은 뼈의 주인이 아니라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물었다.

“응아린을 차고 있던 자는 자부마군(紫斧魔君)이라고, 사혈명 서패에 속해 있던 자였다. 누가 죽였는지는 모른다.”

“예?”

“흘흘. 그땐 그런 것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

“나중에라도 찾아보지 않으셨어요?”

“찾아봤지. 허나, 시간도 많이 흐른 데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알아내지 못했다. 청해성 동인(同仁)에서 사천성 쪽으로…… 대략적으로 그려 보면, 이쯤이겠군.”

종 노야는 용연이 눈을 반짝이자 백지에다 약도를 그려서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용연은 얼른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거길 가 보려고?”

“예.”

“혼자 가지 말고 낭인들을 통해 봐.”

“낭인요?”

“사야벌의 백야제(百夜祭)…… 알지? 귀암로의 한 축을 이루는 낭인 집단을 사야벌이라고 부르는 거?”

“아! 책에서 본 것 같아요.”

“그 정도면 돼. 백야제가 뭐냐 하면, 사야벌이 치르는 일종의 시험이다. 강호의 오지에다 후계자들을 떨어뜨려놓고 백 일 안에 돌아오도록 하는.”

“시험장소가 거기였군요?”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져.”

“알아볼게요.”

“그러든지. 흘흘.”

종 노야는 웃으며 지하실 입구 쪽을 돌아봤다.

이제 할 일을 하라는 뜻이다.

“태우고 나올게요.”

용연은 종 노야가 조금이라도 아쉬운 기색을 보이면 보관하려 했으나, 저렇게 단호한 이상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징계는 풀렸다.

악산(樂山)으로 곧장 출발해서 무묵 학림과 적휘 학림을 만나도록.

임무에 관한 내용은 무묵 학림이 알려 줄 것이다.

―진류 대교.]

“적휘!”

용연은 서찰에 적힌 반가운 이름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적휘도 학림 시험에 통과한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산 너머 어딘가로 눈을 돌렸다.

서둘러 만나고 싶은 마음도 모르고 마부는 아미산까지는 엿새 정도 걸리니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한다.

‘묵 노야에게 연락이 닿았을까?’

용연은 만승서고 뒤편에 있는 나무 중 한 곳의 옹이 안에다 쪽지를 넣어두었다.

―아미산 근방 아안(雅安)에 있는 청명루에서 봤으면 합니다. 드릴 게 있습니다.

묵 노야에게 쪽지가 언제 전해질지 몰라서 서두르기 애매했다.

‘종 노야께서 주신 무완주슬이 큰 도움이 됐어.’

두 달 동안 지하 석실에서 응아린에 대한 연구만 하지 않았다.

무완주슬은 단순히 응아린에 적합한 무공 정도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권장박투에 능해야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무완주슬의 이론적 바탕에 대해 연구하게 됐고, 총 세 가지 형태를 뽑아내 삼제의 원리로 묶었다.

손만 사용할 때, 발만 사용할 때, 그리고 두 경우에 등을 추가할 때.

손만 사용할 때는, 손가락에서 시작해 주먹으로 힘을 내고 이어서 장으로, 다시 손가락을 펴는 것까지.

조아(爪牙)라고 이름을 붙였다.

발만 사용할 때도 조아와 같은 과정을 거쳤고, 각지(角指)란 이름을 붙였다.

등을 추가로 적용하면, 상대에게 벼락같은 충격을 줄 수 있다고 해서 각각 조벽(爪霹)과 각벽(角霹)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조아, 각지, 조벽, 각벽 모두 내 기준에서 만든 것이라 어떨지 모르겠다.’

묵 노야를 만나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네 가지 무공 모두 용연이 펼쳤을 때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엔 어떨지 예상이 안 되기 때문이다.

***

용연의 서찰을 받아 든 묵 노야는 심각한 표정으로 양손을 소매에 넣은 채 눈을 감았다.

―……드릴 게 있습니다.

머리칼을 땋아 뒤로 넘기고 곧게 세운 등은 의자에 닿지 않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두 달 조금 넘었을 뿐인데 무공을 구했다?’

쪽지를 받은 뒤로 계속해서 든 생각이다.

눈을 뜨고 용연에게 받았던 두 장의 쪽지를 펼쳤다.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려 주세요.

―부탁하신 지도예요.

한 장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묻는 내용이고, 다른 한 장은 자신이 부탁한 근방의 중소 문파들 위치가 표시한 지도였다.

신분을 감추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거야 자신에겐 일도 아니었다.

적당한 지식과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속물기질.

사람들은 묵 노야에게서 자신들과 닮은 부분을 찾아내 친해지려 다가왔다.

용연이 준 지도를 이용해 가장 약한 문파 하나를 골랐고, 만나는 사람별로 각기 다른 얘기들을 만들어 전했다.

한 달 만에 가장 규모가 작은 문파는 다른 두 문파의 연합에 의해 사라졌다.

묵 노야는 그곳을 거점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왜 무너지게 됐는지, 어떻게 하면 버텨 낼 수 있었는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모이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기본적인 병법을 가르치며 동네 어르신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중이다.

‘일단은 만나고 와야겠다. 습관처럼 사람들을 모으긴 했지만, 시험 삼아 연습하는 중이니까.’

묵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다 턱을 쓰다듬었다.

용연이 준다는 것이 무공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도 않지만, 촉이란 놈은 확신하게 만들고 있었다.

***

마을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로 밀려들었다가 금방 사라졌다.

바람이 어디선가 썩은 내를 데려와 마을에 던져 놓고 가 버린 것이다.

용연은 청명루로 들어가다 말고 옆으로 돌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악취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물에다 뭘 버렸는데 이 날씨에도 악취가 나는 거야?”

용연이 인상을 쓰고 혼잣말하며 다시 청명루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흐헤, 맞다, 맞아. 자네지? 그치?”

옷을 몇 개나 덧댄 누더기 차림의 노인이 몇 개 남지도 않은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며 다가왔다.

용연은 뒤를 돌아봤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응! 데려오래. 가, 가. 어여, 가.”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용연의 손을 잡아끌려 했다.

“누가요?”

“누구? 나? 난, 다리 영감인데. 왜?”

“예?”

“왜 내가 누군지 묻는 건데?”

노인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화를 냈다.

“가요, 어디로 오래요?”

용연은 노인에게 반응하지 않고 얼른 앞장섰다.

그러자 노인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런 분은 어느 마을에나 꼭 있는 모양이네.’

용연은 노인의 순박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

어릴 때 마을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때처럼 한 것인데 통한 것이다.

노인은 용연을 데리고 마을 안쪽의 허름한 폐가로 가더니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곤 웃으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뭐 하나?”

용연이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반쯤 무너진 담장 안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와 계셨네요.”

용연은 목소리의 주인이 묵 노야임을 깨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담 아래, 처음 보는 노인이 잡초를 뽑고 있었다.

“매번 모습이 달라지시네요, 묵 노야.”

“자네가 보는 지금 모습이 날세.”

“저도 좀 도울까요?”

“아닐세. 앉을 자리 좀 만들려는 것뿐이야. 됐네. 앉지.”

묵 노야는 자리에 앉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용연의 눈에 들어왔던 내려앉은 지붕과 찌그러진 문이 자란 잡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끼걱―.

바람에 걸려 폐가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그래, 줄 게 있다고?”

묵 노야는 용연이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리려 하자 시선을 잡아 두었다.

“예.”

“기다리고 있네만.”

“고민을 좀 해 봤어요.”

“뭐에 대해서?”

“무공이죠. 드리기로 했잖아요.”

“설마.”

묵 노야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용연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했다.

묵 노야라면 당연히 무공 때문에 찾는 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완성된 건 아니고요.”

“음?”

“반석(盤石) 정도로 여기면 될 수준이에요. 먼저 살펴보세요.”

용연은 품에서 반으로 접은 종이 뭉치를 꺼내 묵 노야에게 건넸다.

받아든 묵 노야는 곧바로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손을 사용하는 무공이고, 이건 발, 그리고…… 음? 등?’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묵 노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지막 장까지 모두 넘겼음에도 초식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내공심법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가져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걸로 어떻게 그들을 상대하겠다는 거지?”

묵 노야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고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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