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여인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씰룩.
사내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여인이 원하는 것이 잠자리가 아닌 자신의 사랑임을 알고 있다.
이번에도 잠자리를 나눈 후 모른 척 보낼 것이다.
사랑?
사내는 자신의 메마른 가슴에 그런 감정이 있는지 모른다.
“찾을 수 있다면, 가져가.”
눈앞의 여인, 철혈사자맹 진천전 구룡각 부각주 남궁산산이 사랑하는, 군림단의 교림이자,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풀고 싶어 하는 담영호의 마음이었다.
***
용연은 징계를 받을 줄 알고서 움직이는 것이 이렇게 긴장될 줄 몰랐다.
면양에 도착하자마자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용연에게 다가와 서찰 하나를 건넸다.
군림단의 문양이 촛농에 찍혀 있었다.
사내는 자신을 고람의 식구라고 소개했다.
사내를 따라 한 시진 정도 걸었고, 배를 타고 수로로 다시 한 시진가량 이동해 동굴에 도착하자, 사내는 배에서 내렸고 용연만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공간 중앙에 단층으로 지어진 집들이 군락을 형성한 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연은 배를 대고 암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걸었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진류 대교의 어떠한 징계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결정을 내린 뒤라 그런지 문을 여는 마음이 편해졌다.
덜컹.
“기다리고 계십니다.”
노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방 하나를 가리켰다.
진류가 지내는 방인 모양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탁자 위에 잔뜩 쌓인 문서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왔나? 일단 앉지.”
문서 더미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연은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아 진류라 추정되는 중년인이 붓을 놓길 기다렸다.
일각여가 지났다.
중년인은 용연이 와 있는 것을 잊었는지 혼잣말을 하며 일에 집중하다 손을 뻗어 뭔가를 찾았다.
용연이 얼른 다가가 찻잔을 손에 쥐여 주었다.
“음?”
처음으로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봤다.
“용연입니다.”
“……아! 왔으면 왔다고 기척을 해야지. 아니다, 내가 앉으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셨습니다.”
“맞다. 기억났어.”
중년인, 진류는 멋쩍게 웃으며 용연과 마주 보며 앉았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사람이 와 있는 걸 까먹었을 리 없지. 좀 들어.”
진류는 과일이 담긴 그릇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직접 보는 건 두 번짼가?”
“처음입니다.”
“난 두 번째지. 자네가 학림 시험 치를 때 봤거든.”
“아!”
“자넨 처음이 맞지. 아무튼 궁금했다고. 학림 시험 때 보여 주었던 그 강심장의 단원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말이야.”
진류는 살짝 눈을 크게 뜨며 용연을 응시했다.
“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
“만승서고를 나서는 순간부터 저 스스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두서없이 막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확인은 했고?”
“예.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성장했는데?”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음?”
진류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드러냈다.
“많이 쫓아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여전히 등만 보이더라고요.”
‘담 교림 얘기군. 나는 응아린을 사용한 무용담에 대해 말할 줄 알았더니.’
용연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졌다.
“담 교림의 등이 전보다 작아지지 않던가?”
“예?”
“거리가 멀어졌을 테니 작아 보였을 거 아니냔 뜻이야.”
“……예.”
“첫 임무에서 뭘 그런 것까지 느끼나. 하긴 뭐든 빠른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한 일 년쯤 지났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네. 누군가의 후임이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할 일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흐흐흐.”
말을 마친 진류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예. 그래서 너무 좋았습니다. 담 교림님과 나란히 달릴 수 있으면 그만큼 제가 성장했다는 것일 테니까요.”
“웃어?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진류는 짐짓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첫 임무에서 나름의 성장 척도를 잡은 용연이 대견해서 놀리려고 지어 본 표정이었다.
“제 나름대로 성장의 척도를 잡았다는 뜻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교님.”
‘허!’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용연이 대답하자 진류는 콧구멍을 넓히며 ‘식식’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금방 대교의 본분을 깨닫고 표정을 차분하게 바꾸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고. 자, 이제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에 얘기 좀 나눠 보세. 몇 가지 물어볼 테니 지금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다 가면 되네. 알겠나?”
‘편하게? 가벼운 징계를 내리시겠다는 뜻인가?’
용연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진류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담영호로부터 이미 들은 뒤라 모든 단어가 징계와 관련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들어온 보고를 읽어 보니 공심회로 가는 도중에 싸움을 벌였다고?”
“예?”
용연은 깜짝 놀라 진류를 쳐다봤다.
공심회에서의 일이 아니라 이전의 행적에 대해 물어볼 줄 생각지도 못한 까닭이다.
“긴장하진 말고.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일에 단원이 관련되어 있으면 안 되니까 물어보는 걸세.”
“싸운 것이 아니라 우연히 습격 장면을 보고 도왔을 뿐입니다.”
“음? 설마 습격한 쪽을 도왔다거나…….”
“마차 행렬 쪽을 도왔습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일을 왜 거기서 한 건가?”
“예?”
“용 학림, 규율은 이유를 불문하고 지켜야 하는 거야. 허락도 없이, 그것도 단독으로, 사천 땅을 넘어갔고, 싸움까지 했어. 임무와 전혀 상관없는 싸움에 말일세. 인정하나?”
“……예.”
용연은 진류의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도운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옳은 일을 한 것과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좋아. 이제 징계를 내리도록 하지. 앞으로 임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용 학림은 무기한 근신을 명하네. 사천 땅 내에 머물러야 하며, 장소가 정해지면 보고를 통해 근신을 확인시켜 줘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부당하다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 일입니다. 규율에 어긋난다면 징계를 받는 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흐음.”
진류는 이채를 발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용연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징계는 제게 내리십시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접니다.
담영호가 공심회로 떠나기 전에 진류를 찾아와 했던 말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들었을 텐데도 징계를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기특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동안 경험해 본 바로는, 초반에 징계를 받아 본 사람들이 오래가더군. 약이다 생각하고 잘 참아 보도록.”
“예.”
용연은 대답을 하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담영호에 이어 진류에게서도 이번 징계가 용연에게 도움이 될 거란 말을 들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것.”
“뭐가 더 있습니까?”
“먼저 이것부터 읽어 보게.”
진류가 한쪽에 접어두었던 서찰 하나를 용연에게 건네주었다.
“‘용 단원님 앞으로.’ 자네에게 온 서찰일세. 어서 읽어 봐.”
용연은 진류의 재촉에 서찰을 펼쳐 읽었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가시던 길, 늦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혹여 저와 제 일행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겪으셨거나 겪으셔야 한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금룡상단 인이예.]
단아한 글씨체를 보니 여인이 보낸 서찰이었다.
‘인이예 소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서찰 끝에 적혀 있자 용연은 놀란 눈이 됐다.
“아는 이름인 모양이군.”
“마차 행렬을 이끌던 두 소저 중 동생 분의 이름입니다.”
“내가 먼저 읽어 봤어. 혹시 몰라서.”
“괜찮습니다.”
“인이예. 금룡상단주의 차녀더군. 소문과 달리 매우 수완이 좋던데?”
“예?”
용연은 진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서찰을 다시 읽어 보려 했다.
“그 서찰과 함께 이것들을 보내왔더군.”
진류가 서찰 한 장과 금룡상단이라 새겨진 은패를 꺼내 놓았다.
용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진류는 말을 이어 갔다.
“여기 붉은 점 찍힌 위치들은 우리 단의 안가처럼 금룡상단의 행렬이 잠시 쉬어 가는 쉼터라고 보면 되네. 그곳을 출입하려면 이 은패가 필요하지.”
“그걸 왜 제게…….”
“은혜에 대한 보답.”
“돌려줄 방법을 찾겠습니다.”
“음? 왜?”
진류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이 좋은 물건을 왜 돌려준단 말인가?
진류의 표정을 읽었는지 용연이 얼른 입을 열었다.
“이런 패를 받을 정도로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닙니다.”
“일단 집어넣게. 지금이야 사천 땅에만 국한돼서 움직이지만, 곧 강호 곳곳을 다녀야 할 시기가 올 걸세. 그럴 때, 그 패를 사용하면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적들의 추격을 쉽게 따돌릴 수 있지. 들어간 곳은 여긴데, 나타난 곳이 전혀 엉뚱한 곳이 된다는 거야. 이해했나?”
“물류처럼 이동 수단을 마음대로 옮겨 탈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적의 뒤를 노릴 수 있는 기회까지 갖게 되는 거지. 그러니 한 번을 사용하더라도 지니고 있는 편이 좋아.”
진류는 용연의 거부를 거부한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설명을 마쳤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갖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교림 서열 일위인 대교가 저토록 열변을 토하는 앞에서 더 이상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용연은 조용히 은패를 품속에 갈무리하다 그대로 굳었다.
‘강호 전역 어디든?’
고개 숙인 용연의 눈이 반짝였다.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며 차곡차곡 쌓여 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패의 사용여 부가 아니라, 조금 더 패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자, 이제 인이예란 소저에 대해 말 좀 해 보게.”
“예. 예?”
용연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나, 인이예란 이름을 듣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정보를 마음대로 다룰 정도의 재녀인데, 왜 언니만 유명한 거지?”
진류는 뭔가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미미하게 갸웃거렸다.
‘저도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용연은 속으로 대답했다.
―유추해 볼게요. 저들과 한패인 누군가를 만나셨던지, 아니면 저들이 꾸미는 일에 대해 들으셨던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인지예가 눈동자를 빛내며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용연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한 두 가지 경우 중 한 가지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인이예 소저는 금룡상단 사천 지부에 연락을 취해 외연, 은타, 고람의 식구들을 만나게 한 후, 그 서찰이 내 수중에 들어오게 했어. 그런데 더 큰 의문은, 용 학림의 신분을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거지. 알려 줬나?”
진류는 용연을 쳐다봤다.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허나, 짚이는 바는 있습니다.”
용연은 진류의 얘기를 듣는 동안 지금은 불러도 내려오지 않는 매를 떠올렸다.
“뭐지?”
“제가 공동산의 위치를 물어봤습니다.”
“음? 공심회가 거기서 멀지 않으니 알아봤을 것이다?”
‘매를 이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용연은 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빨리 났을 테니, 일리가 있군. 똑똑한 소저야, 그렇지 않나, 용 학림?”
“예.”
“이제 됐네. 머물 곳이 정해지면 전서구로 알려 주고. 아! 만승서고로 갈 거면 따로 연락할 필요는 없네.”
“만승서고에 머물 생각입니다.”
“그럴 것 같더라고. 대화는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어. 가 보게.”
진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를 보는 탁자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