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피득의 시체 발견하고 확인하러 올 자를 기다렸다가 추적 중.]
[사괴에게 일을 시킨 조직이 따로 있음. 들킬지도 몰라 위치만 파악하고 복귀.]
[철혈사자맹, 귀암로, 사혈명에서 보낸 자들이 만든 공심회가 무너졌음. 군림단원 셋이 한 일임.]
“군림단?”
쪽지를 펼쳐 분류하던 추영영의 눈이 반짝였다.
잊고 지내던 이름이다.
추영영의 사문인 은영루를 직계와 방계로 나뉘게 만든 장본인인 까닭이다.
군림단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은영루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만든 자다.
이백여 년 전, 은영루는 처음으로 루주를 잃었다.
비전 전승을 받게 될 직계는 곧장 방침에 따라 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상시라면, 루주의 부재 시 당연히 직계의 말을 들어야 했지만, 방계들은 순응 대신 불응을 택했다. 반발했고 복수를 외쳤다.
살인 능력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직계였으나,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은영루가 갈라지게 됐다.
은영루의 이름을 잇는 직계와 은자림이란 세력을 만든 방계.
추영영은 오래전에 읽은 문서의 내용을 떠올렸으나, 역시나 군림단에 대한 적개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백 일을 관찰하고, 암살 가능한 방법 백 가지를 준비해서 기회를 엿봤으나, 군림단주의 능력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 같다.
그들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잃을 게 많은 자들이 먼저 찾아올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후대들에게 남긴다.
강호의 흐름을 놓치지 마라.
강호는……(후략)…….]
이어진 말들은 강호 정세에 대한 당시 은영루주의 생각들이다.
지극히 편협한 개인의 판단들.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말들.
강호삼대세력의 군사 중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은 못 하는 변명들.
절레절레.
추영영은 고개를 흔들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잘나서 강호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삼대세력의 시험까지 받아들였다지?”
추영영이 보고 들었던 가장 황당했던 군림단주에 대한 일화다.
당시 은영루주도 그렇고, 당시 군림단주도 그렇고.
스스로 잘났다고 믿는 인간들의 최후는 언제나 죽임을 당했다.
주제를 알고 알아서 조심했으면 됐을 것을.
그런 곳의 무인이 자신의 제자인 인이예와 엮이려 하고 있었다.
추영영은 가만히 쪽지들을 접어 건너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금룡상단의 많은 사람들은 인장천의 차녀 인이예를 장녀 인지예의 그림자 정도로만 알고 있다.
추영영의 십 년 노력의 결과였다.
다섯 살의 인이예가 화초를 다루는 추영영을 몇 날 며칠 살피다 꺼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도 추 원주님처럼 소도(小刀)를 다루고 싶어요.
해맑게 자신의 손을 쳐다보던 그 눈빛을.
―매일매일 인시(寅時,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 일어나 새벽이슬 머금은 솔잎과 익히지 않은 쌀알로…….
무심코, 반쯤은 기대하고 반쯤은 놀리듯이 평생 동안 해 온 수련법을 말해 주며 일 년 동안 계속하면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 년째가 되던 날, 인이예가 다시 찾아왔다.
―사부님, 이예가 인사드려요.
추영영은 여섯 살 인이예가 아홉 번 절을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봤다.
며칠 뒤, 다원으로 총관이 인이예를 직접 데리고 왔다.
유모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딸에게 실망한 아버지 인장천을 위로해 주라고.
‘음?’
추영영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모이를 쪼고 있는 전서구들을 바라봤다.
느리다.
평소라며 쉴 새 없이 고개가 오르내려야 하는데, 배부른 녀석들처럼 모이 먹는 속도가 둔했다.
이미 누군가가 모이를 준 것이다.
“요 깜찍한 녀석.”
추영영은 인이예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동시에 사랑스러운 제자의 관심을 받는 군림단원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
구선은 정리할 것이 있다며 사람들을 이끌고 공심회 내부로 들어갔고, 무묵은 임무가 끝났으니 돌아가겠다며 먼저 길을 나섰다.
담영호는 두 사람의 결정을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용연을 데리고 공심회 영역을 벗어났다.
이후 용연과 담영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밤이 될 때까지 달렸다.
스스스―.
‘저 정도 속도로 움직이면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셔. 도대체 어느 정도나 강해지신 거지?’
용연은 달리는 내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담영호의 등을 쳐다만 봐야 했다.
담영호에게 창천비를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날 정도였지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담영호가 풀을 스치고 지나가거나 땅을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속도로 달려오셨으면서 그런 신위를 보이신 건가? 그리고 다시 이 속도로 움직이시고?’
절레절레.
현재의 용연으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쯤 저 등을 보지 않고 달릴 수 있을까?
자신과 담영호 사이의 거리를 새삼 느끼게 된다.
달리면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잠시 쉬어 가자.”
“……!”
용연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담영호가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귀에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지 말았어야 할 광경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쉬악―.
용연은 전력을 다해 창천비를 펼쳤건만, 담영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삼 장 높이의 바위 위에 멈춰 선 것이다.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맥이 풀리고 말았다.
담영호가 멈춰 선 곳으로 다가가자 멋진 바람이 용연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상쾌하다 싶은 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수묵화가 펼쳐진 것처럼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많이 늘었다.”
“멀었습니다.”
“나는 교림이다. 학림이었을 때의 나를 생각하면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간격을 이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감사합니다.”
용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간격을 유지하려고 달린 것이 아니라 따라잡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럽냐?”
불쑥, 담영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용연의 머릿속을 때렸다.
용연에겐 그 한마디가 화두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만족?
무엇에 관한 질문이지?
용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더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은 거다.”
“어딜 말입니까, 담 교림님?”
용연의 반문이 끝나자마자 담영호가 돌아봤다.
그것 뿐,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용연은 왜 담영호의 눈을 통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지.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용연은 묵 노야에게 약속한 두 가지를 떠올렸다.
묵 노야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최소 단위의 사람들에게 전해 줄 무공을 구해 준다고 했다. 또, 묵 노야 대신 장애물을 잘라줄 무기가 되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응아린과 안가의 벽에 사는 괴물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벌써 할 일을 스스로 만들었구나.’
담영호는 용연을 대견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두 번은 학림으로서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려 주려 했건만, 저 눈을 보니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전에 내가 해 준 말 기억하고 있느냐, 용 학림?”
“예.”
“뭐라고 했지?”
“제 행동의 모든 명분은 담 교림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잊지 마라. 스스로의 결정에 의심이 들 때,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 가벼워져라.”
담영호는 마지막 말을 꺼내길 머뭇거렸다.
자신이 했던 경험을 용연 역시 겪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준비했던 말이었으나, 지금 보니 굳이 해 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용연은 담영호의 말을 외우듯 입 모양으로 따라 하며 허리를 숙였다.
“면양(綿陽)으로 가라. 대교께서 기다리신다.”
“알겠습니다.”
“이번 임무에 용 학림이 참여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징계를 내린다고 하신다.”
“징계?”
“일 년 전인가, 학림들이 모인 자리에서 새로 들어올 후배를 보호할 방안에 대해 얘길 나눴다. 최소 일 년 동안은 사천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모두 찬성했다.”
“아!”
용연의 얼굴에 아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긴 것은 어긴 것이니, 징계에 따라라.”
“알겠습니다.”
“기회가 좋다. 할 일이 생겼다고 했지? 징계 기간 동안은 임무 수행을 맡기지 않으니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아!”
용연은 언제 아쉬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얼굴이 환해졌다.
씰룩.
담영호는 특유의 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담 교림님, 다시 뵙겠습니다.”
용연은 담영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에 새긴 뒤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
[사괴는 죽었고, 칠채석은 금룡상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을 들여보낼 준비 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결과를 갖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귀수.]
또 하나의 서찰.
[군림단원 셋에 의해 공심회는 완전히 괴멸됐고, 당연히 공석 등 세 회주도 죽었습니다. 철혈사자맹에서는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공석 대신 갔으면 합니다.
자경.]
두 개의 서찰이 희고 긴 여인의 손을 떠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에게 건네졌다.
“한 명은 여우락을 원하고, 한 명은 철혈사자맹에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네요. 당신은 이들에게 뭘 원할 거죠?”
여인의 목소리는 초겨울 옹달샘처럼 맑았다.
“당신에게 해 준 것과 똑같이.”
사내는 답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내게 해 준 것과 똑같이?”
여인의 아미가 치켜 올라갔다.
“당신이 구룡각의 주요 직책을 얻은 것과 같이.”
“저들이 나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아니.”
사내의 대답에 여인의 표정이 풀렸다.
역시나 사내는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주는 것뿐이야. 얻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겠지. 그래야 나 또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테니.”
사내는 여인의 표정 변화를 지켜봤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사내의 말을 다 들은 여인은 이내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이런 사람인 줄 누구보다 먼저 알았으면서 매번 만날 때마다 아니길 기대한다.
언제고 자신에게만은 다른 모습을 보일 거라 믿으며.
“선유검(仙遊劍) 모용신. 다섯 번째 인물이에요.”
“알아냈군.”
“당신이 원했던 거니까요.”
여인은 삼십 년 전 한 가지 임무에 투입된 열 명의 고수를 찾아내고 있었다.
“원하는 걸 말해.”
“당신. 당신을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