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밤이 깊었다.
대전의 긴 탁자에는 무묵과 구선이 앉아 용연과 남회 등이 얘기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리했다?”
무묵은 눈을 납작하게 만들며 찝찌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고 하네요.”
구선 역시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처리했는지 구 향주는 들었소?”
“따로 물어볼 시간이 없어서 듣지 못했네요.”
“시간 좀 내서 물어보지 그랬소?”
“기다리면 얘기해 주겠지요.”
“……용 학림, 나 좀 보자.”
무묵은 구선처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급한 일이십니까, 무 선배님? 남 백주가 또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요.”
용연은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해, 일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해선 안 된다.
무묵이 한 일이라고는 겁먹은 공심회 무인들 두들겨 준 것 외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용연이 돌아오자마자 팔 걷어붙이고 알아서 뒤처리까지 도맡아 정리하는 중이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쳐 놓고 뒤처리까지. 누구랑 징그럽게 비교된다.”
“담 교림님이 오시면 눈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구 향주, 지금 나 위험한 말을 하지 않았소?”
무묵은 놀란 표정으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누가 들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음? 구 향주, 필요한 거 있으면 이번 기회에 다 챙겨요. 외연 식구들 고생하는 얘기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무묵은 슬며시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에 댔다.
“다음 임무 때 함께할 영광을 주신다는 말로 들어도 될까요, 무 학림?”
“당연한 말을! 연락 오자마자 알려 주겠소.”
얘기가 길어지면 다다음 임무도 외연 식구와 하게 될 것 같았는지, 무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밖으로 나갔다.
“용 학림, 내일 담 교림이 도착하면 알아서 이번 임무를 마무리 지을 테니, 그 전에 벌어졌던 일은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된다오.”
구선은 무묵이 나가자마자 다른 곳을 보며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구 향주님,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용연은 웃으며 구선을 돌아봤다.
구선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묵 노야와 나눈 대화를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음?”
“잘못 들은 모양이네요. 휘유, 정신없어라.”
구선이 모른 척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용연은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
―용 학림, 세 회주를 조심하게. 그들의 무공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걸세.
묵 노야가 떠나기 전에 귀띔해 준 말이었다.
무묵과 함께 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세 회주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에 올랐을 것이다.
***
꾸끼― 끼끼끼끼―.
매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용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 위를 맴도는 매를 쳐다봤다.
뭔가를 알려 주려는 것 같다.
‘온 건가?’
이곳으로 올 사람이라고는 세 회주밖에는 없다.
정오가 지난 지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훤한 대낮에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무 선배님, 구 향주님, 그들이 온 것 같습니다.”
용연은 대전에서 내려오자마자 따로 떨어져 있는 무묵과 구선을 부르며 연무장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외연 식구들이 일제히 용연에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이틀 동안 자신들의 수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용연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남회는 용연이 앞을 지나가길 기다린 후 한 걸음 떨어져서 걷다 양쪽 어깨를 비볐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오싹!
서늘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묘한 기분에 젖어 구선을 찾아 보좌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서둘러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무 학림 좀 봐.”
구선은 남회가 용연의 뒤를 따를 때부터 보고 있었기에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회의 눈에 구선이 눈짓으로 가리킨 무묵이 보였다.
귀찮은 표정이 역력하지만 싫지는 않은 듯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향주님, 이제 한두 달 된 후배가 십 년도 훌쩍 넘긴 선배를 저렇게 대하는 경우가 흔한가요, 군림단에선?”
남회는 진지하게 조용히 물었다.
“그럴 리가. 그 대단했던 담영호 교림은, 귀찮아서 나서지 않았을 수는 있겠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담영호 교림이 그렇게 대단했으면 왜 학림에서 십 년이나 보낸 겁니까, 향주님?”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을 테니까.”
“예?”
“문파를 만들려면 준비할 게 오죽 많겠냐? 남 백주는 이제 알아도 되지 않아? 군림단원은 개개인이 이미 하나의 문파야. 그런 사람들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는 법이 없지. 아무리 담 교림이라도 말이야.”
“……!”
남회는 서서히 표정이 굳어지다 결국은 눈까지 크게 치뜨고 말았다.
외연의 식구가 된 이후 구선에게 군림단과 관련된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척.
구선은 할 말 다했다는 듯이 손을 들어 남회의 말문을 막고는 용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 회주는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 둔 것이라도 있소, 용 학림?”
구선은 외연 식구들이 다가오자 먼저 물었다.
외연 식구들에게는 그 부분이 가장 궁금할 것이라 여긴 배려였다.
“무 선배님, 저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다친 공심회 무인들부터 내보내 주고 세 회주를 상대하는 건 어떠십니까?”
“떼로 덤벼들면?”
“문 걸어 잠그고 담 교림이 오실 때까지 버티면 되지 않겠습니까?”
용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작전이다.”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더니 담영호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대답할 줄 몰랐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외연 식구들은 넘어오는 자들이 있으면 적당히 막다가 숲으로 빠져 주세요. 세 회주는 저와 무 선배님이 잡고 있을 테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담 교림님이 얘길 안 해 줬나?’
무묵은 용연이 외연 등 세 곳의 식구들까지 챙기자 미간을 찌푸렸다.
외연, 은타, 고람이 군림단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서로 필요에 의해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일 뿐, 한 식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용 학림, 잠깐 좀 보자.”
무묵은 용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담을 향해 돌아섰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용 학림.”
구선은 무묵의 표정을 보고 눈치껏 나섰다.
돌아보니 용연을 데리고 가는 무묵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외연 등의 식구들을 대하는 용연의 태도가 과하다 여긴 걸까?
구선의 눈에도 보인 것을 무묵이 모를 리 없었다.
서운하다거나 하는 감정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소외감이 느껴지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용 학림, 세 곳과 우리가 맺은 계약 알고 있어?”
무묵은 용연이 다가오자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세 곳이라면 외연, 은타, 고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 선배님?”
“맞다.”
“계약을 맺었다는 얘긴 처음 듣습니다.”
“단에서 보낸 단원을 지원하되, 단원이 책임질 그 어떤 일도 만들어선 안 된다.”
“예?”
“계약 내용 중 하나다.”
“…….”
“용 학림, 우린 저들이 안전하도록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임무 수행을 위해 온 거야. 알았어?”
무묵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됐다. 준비하자. 아! 세 회주에 대해선 어떻게 알게 된 거냐?”
“그가 해 준 말입니다.”
“그? 설마 묵 노야란 자?”
“예. 그가 준 정보 중에 거짓은 없었잖습니까? 세 회주의 무공이 강하다는 전제하에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용 학림이 알아서 해.”
“제가요?”
용연이 놀라서 무묵을 쳐다봤다.
“그에게 얻은 정보에 용 학림의 판단을 더했으면 진행하는 사람도 용 학림이어야지. 잘해 낼 거라 믿는다.”
무묵은 용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믿는다.
무묵이 건넨 한마디에 용연은 자신의 전신 세포가 모두 살아나는 것 같았다.
***
두두두―.
볏짚을 뒤가 안 보이도록 높이 쌓아 올린 수레가 노인 둘을 태우고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길을 굴러갔다.
“어구야, 편하다. 나이를 먹으니 이놈의 삭신도 주인 말을 안 들어.”
위아래로 누런 이 네 개만 남겨 둔 노인이 쭈글쭈글한 입을 소가 여물 먹듯이 움직였다.
나란히 앉은 촌로, 키를 줄인 묵 노야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수레를 얻어 탔으니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한다.
“쿠헬헬. 등은 굽었어도 이렇게라도 움직여야 며칠 더 살아. 논도 있고 밭도 있어. 거둘 작물이 있으니 행복하다오.”
‘거둘 작물이 있어 행복하다라.’
묵 노야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노인의 말이 빨라졌다.
누군가와 말 섞을 기회가 흔치 않은 삶이기에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젊었을 때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떠돌던 인생이었는데, 이곳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부인과 자식을 만나게 됐고, 농사 지으며 살게 된 지 몇십 년이다.
그렇고 그런, 너무 흔해서 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노인의 얘기를 듣는 동안 묵 노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공동파 일대제자 공석, 미첨도 자량, 북패주의 눈에서 멀어진 공공수 시언. 드러나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안 되는 임무를 받은 자들.’
묵 노야는 세 회주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적당히 자리만 지키다 때가 되면 알아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거라 믿었던 자들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것이, 모든 성과를 공심회의 이름으로 내야 하는데 소속된 곳이 다 다른 세 사람의 입장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학림 둘과 세 회주.’
묵 노야는 머릿속으로 용연과 세 회주 중 한 명의 싸움을 떠올려 봤다.
어느 정도 공방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회주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학림이 둘이라는 의미를 세 회주가 모르면 그 반대겠지만.’
묵 노야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육 년 전, 학림 둘이서 엄청난 전력을 상대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학림 중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도 다른 학림이 부축해 주자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신화. 재미있는 말이야. 들어갈 땐 셋인데 나올 때는 둘이 되는 신화? 구십구 명이 모였는데 움직일 땐 육십육 명이 되는 신화? 후후후.’
묵 노야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머리를 댔다.
공심회의 소식은 조만간 사방으로 퍼져 나가겠지만, 많은 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세 회주의 정체가 알려지면 곤란한 곳이 강호삼대세력이기 때문에.
그런 곳을 무너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작은 단위로 강호삼대세력이 야금야금 갉히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덩치만 커다란 세력 정도로 인식되지 않을까?
생각을 이어 가니 자꾸만 재미난 실험들이 머릿속에서 엮이고 엮인다.
‘일 년도 안 돼서 학림이 된 천재를 뭐라 불러야 하려나? 학림이니 교림이니 용 단원에겐 의미 없는…… 음? 용 단원? 그래, 그렇게 부르면 되겠네. 후후후. 몇십 년쯤 지나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 정도까지 노력했는데도 강호삼대세력이란 거대한 바위에 약간의 흠집밖에 남기지 못한 것을. 그때 가서도 계속해 보겠다면, 제자라도 키워서 자네를 끝까지 도와주지.’
하늘을 올려다보던 묵 노야는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용연과 대화를 나눌 때는 자신도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으나, 막상 적이 저 하늘이라고 생각하니 무기력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