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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58화 (58/232)

58화

“사, 사냥!”

묵 노야는 발끈했으나 바로 이를 악물며 참았다.

어이없게도 용연의 이어질 말을 일단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당신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면 이 기회, 놓치지 않아요.”

“죽을 수도 있네.”

“그건 선택지에서 제외돼야죠.”

“……?”

“단과 저쪽, 둘 중 한 곳만 선택해요.”

용연은 담담하게 말을 건넨 후 묵 노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협박하는 건가?”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이도 저도 싫다’라는 건 없어요. 단도, 저쪽도 묵 노야의 존재를 알았으니까요. 거절하면,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놈, 진심이다.’

꿈틀.

묵 노야는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군림단과 함께 강호삼대세력에 복수하자고 답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잖은가?

저들은 십 수 년을 애지중지 키운 임료가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배신으로 묵 노야는 십여 년을 잃은 것이다.

엄청난 부와 수많은 초절정 무공들과 강호 구석구석까지 닿아 있어 언제든 원하는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는 조직까지.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던 묵 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용연을 쳐다봤다.

“잠시 묵 노야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봤어요.”

“내 입장?”

“묵 노야가 돼서 사천 땅 밖으로 나갔다가 단을 노리는 세력의 인물과 만났다는 생각이었죠. 당연히 저보다 무공도 강하고 데려온 부하도 많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자가, 제가 묵 노야에게 제안한 것과 똑같은 선택을 요구한다고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곤란해 할 것 같더라고요.”

“그, 그렇지? 아주 적절한 예를 들었군. 그래서 자네의 결정은?”

“당연히 거부할 겁니다.”

“음?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선배님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왜 단의 명예를 더럽혀요. 제 결정은 들으셨으니 이제 묵 노야가 결정한 것을 말할 차례네요.”

“…….”

묵 노야는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강호삼대세력을 상대로 자신이 무슨 수로 복수를 한단 말인가?

‘부탁을 해 볼까?’

용연은 묵 노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최악의 경우, 죽음을 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선 안 된다.

“차…….”

묵 노야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묵 노야가 계획을 짤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는 몇 명이죠?”

용연은 거의 동시에 말을 한 것처럼 해서 묵 노야의 말을 잘랐다.

“아니, 음, 셋이겠군. 둘이서 하나를 죽이는 것도 계획이니.”

“둘이서 하나, 남은 둘이 다른 둘과 합쳐지도록 할 수는 있을까요?”

무슨 말이라도 꺼내서 묵 노야가 자신 있어 하는 얘기로 화제를 돌려야 한다.

“충분히 가능하지. 셋 중 둘을 뽑을 때, 다른 둘과 연계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을 만들면.”

“그렇게 해서 모인 열이, 다른 곳에서 모인 열과 합칠 수 있도록 하는 건요?”

“……지금 뭐하는 건가?”

“아무리 거대해도 결국은 제가 말씀드린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군림단과 그들이 다른 형태란 것도.”

“그런가? 군림단은 단원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구성 단위를 조절할 수 있어서?”

“……!”

용연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너무도 정확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론, 아주 재미있네. 계획이란 것이, 기관토목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닮은 부분도 무척 많지.”

‘됐다.’

용연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묵 노야의 눈빛이 살아났다.

이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비유를 해 보죠.”

“뭐지?”

“조금 전에 만들어 놓은 단위를, 특정 장소로 모이게 하거나 특정 무공을 익히게 할 수도 있나요?”

“……더 말해 보게.”

묵 노야는 눈을 용연에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군사 관련 서적들을 읽어 왔다 자부하지만, 전법서나 병법서에선 본 적도 없는 이론이었다.

“셋이 모였을 때는 장소, 열이 모였을 때는 무공, 백이 모였을 때는 군락, 천이 모였을 때는…… 뭐가 있을까요?”

“문파겠지.”

“문파도 좋겠네요. 아무튼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만 심어 줄 수 있으면 돼요. 묵 노야를 만나야 무공의 마지막 한 구절을 받을 수 있다는.”

“……!”

“지금 신화(神話)를 퍼뜨리자는 건가?”

“작은 숫자의 모임은 큰 숫자의 모임을 따를 거예요. 그래야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럼 같은 무리의 경우엔 누가 주도하게 될까요? 우리가 남겨 놓은 무공의 숙련도에 따라 결정되겠죠. 가장 강한 자가 일대를 휘어잡을 테고요. 하지만, 결국은 제대로 배운 무공이 아니니 한계에 도달할 거예요. 그때, 나서는 겁니다.”

“여러 개가 될 수도 있잖은가? 그럴 경우 서로…….”

“무공을 여러 개 준비하면 됩니다.”

“상대는 강호삼대세력일세. 그 정도 무공을 여러 개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

“허어, 말을 해 보게.”

“여기까지만 할게요.”

“뭐, 뭐?”

“이젠 대답을 하실 수 있나요?”

“허…….”

묵 노야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잠깐이지만 용연이 펼쳐 놓은 이론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가능 여부를 떠나 반드시 실행에 옮겨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이론이었다.

무엇보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윽!’

묵 노야는 미간을 좁혔다.

떠올랐던 한 사람의 얼굴이 흐릿해지더니 다른 얼굴이 그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아직 오십 대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

그 얼굴의 주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올라가다 지칠까 봐, 그런 핑계라도 대야 포기할 수 있었던 자.

호원.

철혈사자맹 내에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는 자의 이름이다.

‘삼제는 대단하구나. 세 가지 원리를 응용해서 말한 것뿐인데 평생을 연구한 사람이 저 정도로 관심을 보이다니.’

용연은 묵 노야가 자신이 한 얘기에 빠져들었다고 여기고 뿌듯해 했다.

손을 뻗어 중심을 당기고, 축을 바꿔 다른 손을 뻗고, 방향을 결정해 흘린다.

십오 년 동안 몸으로 해 온 수련을, 그동안 정리해 둔 방식대로 설명했을 뿐이었다.

“해 보세.”

묵 노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만든 길을 네가 닦고 쓸고 넓혀 줄 것 아니냐? 점과 점이 이어져 선으로 그어지고, 선이 쌓여 면을 채우며, 거기에 형이 더해져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먼저 떠올랐던 스승 풍우선생(風雨先生)이 돌아가시며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용연 덕분에 기억난 이론에 집중하자 호원의 얼굴을 흩트릴 수 있었다.

“그 이론, 누구에게 배웠나? 설마 다른 단원들 모두 아는 이론인가? 그럼 그 이론을 알려 준 사람이 누군지 알려 주게.”

“저도 말하면서 알게 됐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던 내용이란 걸.”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용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묵 노야는 잔뜩 기대 어린 눈으로 보다 안타까움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정도 공부를 한 아버지가 있었으니 일 년도 안 돼서 학림이 됐던 것이고, 그래서 군림단의 눈에 들었던 거야. 이 사람은 천재야, 천재. 이 사람을 만나게 하려고 공심회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야.’

묵 노야는 새삼 자신의 촉을 믿게 됐다.

눈앞의 용연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다.

“무기가 필요하네.”

묵 노야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무기?”

“자네의 이론에 맞도록 계획을 짜도 휘두를 무기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네. 내 것이 아니니 수정도 힘들지.”

“충분히 공감합니다.”

용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준비해 줘야 할까?

군림단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려 생각을 떠올릴 때, 황당할 정도로 간단한 해답을 떠올렸다.

“저를 무기로 사용하세요.”

“자, 자네를?”

“묵 노야가 만든 계획을 완성시켜 드릴게요.”

“……!”

꿀꺽.

묵 노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쥐며 몸을 떨었다.

울럭.

목젖도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정말인가?”

“묵 노야는 계획의 완성과 복수를, 저는 감히 단을 노리는 자들의 응징을. 함께해 보시겠습니까?”

“시간은…….”

“저도 필요합니다. 준비가 되면 연락 주세요.”

“그러다 내가 숨어 버리면?”

“다시 꺼내 드려야죠. 막히는 문제가 생기면 함께 고민해 드릴 테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요.”

용연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러자 묵 노야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척.

용연과 묵 노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고, 동시에 서로의 손을 잡았다.

***

“안 돼!”

히이잉―.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양발을 들어 올렸다.

말고삐를 쥔 문사 차림의 중년인은 구레나룻을 양옆으로 펼치며 눈에 불을 켜고 손에 들린 서찰을 노려봤다.

“회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뒤쪽에 갈색 말을 타고 있던 사내가 재빨리 다가와 중년인이 타고 있는 말을 갈퀴를 두드리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경아, 서둘러야겠다. 적이 초소에 있던 위사들을 모두 죽였단다.”

“예? 누가 감히!”

“다행인 건 묵 노야가 돌아온 모양이다.”

“회주님,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왜 그렇게 묵 노야를 신임하시는 겁니까?”

자경은 진심으로 이해하기 힘든 듯 평소엔 잘 세우지 않던 목까지 드러내며 쳐다봤다.

“신임? 내가 묵 노야를?”

“조금 전에 묵 노야가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하셔서 드린 말씀입니다.”

“자경아, 그 흉한 목의 상처나 가려라. 내가 신임하는 건 묵 노야가 아니라, 공심회를 지키겠다는 그자의 서찰 때문이다. 덕분에 자리도 비울 수 있었잖느냐?”

“……아! 공심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자가 호언장담해서 그리된 것이라는!”

자경은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공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심회 세 회주 중 한 명이며, 공동파의 일대제자인 공석은 그런 자경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듯 구레나룻을 쓰다듬었다.

“서두르자. 묵 노야가 살아만 있다면 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해 낼 것이다.”

부하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자경은 커다란 대답과 함께 안내하겠다며 힘껏 내달렸다.

‘묵 노야, 죽더라도 놈들을 안에다 가둬 두시오. 번거롭게 여러 번 손을 쓰지 않도록.’

기이잉―.

공석은 등에 맨 도에다 기를 불어넣으며 고삐를 당겼다.

다른 두 회주인, 미첨도 자량과 공공수 시언은 자신과 엇비슷하게 도착할 것이다.

각자 몸담은 곳이 달라 공심회를 떠나고 돌아오는 날짜를 맞춘 상태였다.

힐끗.

앞장서서 달리던 자경이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조금 전의 존경심 가득하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냉정한 눈이 그곳에 있었다.

‘심심했는데 일이 터져 주는구나. 적당히 자리 지키다 빠져나와 사괴에게 칠채석을 받아서 주군께 돌아가면 되겠어.’

자경은 며칠 뒤, 자신이 섬기는 진짜 주인에게 바칠 칠채석을 떠올리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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