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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57화 (57/232)

57화

용연은 몸이 뜨거워지며 묵 노야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말을 듣고 싶어졌다.

자신이 몸담은 곳에 대한 평가를 타인으로부터 처음 들은 것이다.

자부심이 저절로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대략 열일곱? 열여덟? 어리군.’

묵 노야는 용연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 애착이 강한 유형이란 판단을 내렸다. 아마도 어렸을 때 이미 선택받아서 키워진 자일 것이다.

이런 청년들의 특징은, 속한 집단의 평가에 따라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렇다면 일단 올라가서 적당히 대화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세. 뛰어내리고 살 확률과 자네에게 죽을 확률을 따져 보니 자네 쪽이 조금 더 낫더군. 어떤가?”

“그 확률, 조금 더 낮춰드리죠.”

용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음?”

“시간을 아끼려고요. 잡으세요.”

“고맙네. 사양하지 않지.”

꾹.

묵 노야는 용연의 손을 쥐었다.

순간, 용연은 묵 노야를 절벽에서 멀어지게 한 후 힘껏 위로 던졌다.

“히엇?”

묵 노야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으나 몸이 허공을 가르며 올라가자 재빨리 신법을 펼쳐 땅에 내려섰다.

탁.

곧바로 용연이 올라오자, 묵 노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찾았다.

“그 녀석은 제가 보냈어요.”

용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찾지 못할 것이란 뜻이다.

“매를 보냈다면, 준비한 것이 더 있다는 뜻인가?”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용연의 목소리가 차분해져 있었다.

‘……아닌가?’

묵 노야는 용연이 그새 감정을 조절했음을 깨닫고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한 유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먼저, 묵 노야, 그렇게 불리는 분이 맞나요?”

“다들 그렇게 부르네.”

“들은 것보다 키가 크신데요?”

“키? 자네였군.”

묵 노야는 픽,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맞습니다. 제가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선배 학림은 허락했고?”

“제가 고집을 좀 피웠지요.”

“고집? 선배 학림이 그런 걸 믿고 양보할 리가 없을 텐데?”

군림단의 체계를 잘 아는 묵 노야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용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확신했으니까요. 묵 노야란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것 같았거든요. 공심회를 몰락시키고 자신은 사라지고 싶어 하는. 그래서 얼굴이라도 알아 두려고 했죠.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흘흘. 확신이라. 그걸 믿어 줬다는 거군.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자신을 증명해 냈을지 짐작이 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 나 역시 판은 내가 짜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끌려다니는 건 별로거든요.”

용연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판을 짜는 것과 일을 주도하는 것.

제삼자에겐 같은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당사자인 용연과 묵 노야에겐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보통이 아니야. 옥토(沃土)는 아무리 갈아엎어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건가?’

묵 노야는 새삼 군림단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판을 짠 것이 언제지? 공심회에 들어가기 전? 아니면 들어간 뒤?’

용연은 묵 노야란 눈앞의 노인이 공심회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계획을 짰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묵이 혼자서 미행하고 있을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모르면 물어보면 그만이다.

“아! 이번 계획은 언제 짠 겁니까? 공심회로 들어가니 회주들이 없어서요.”

“육 년 전.”

“예?”

“육 년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부수적인 계획을 짜놓은 적이 있네. 그중 하나였네.”

“육 년.”

“학림 다섯이 그 계획에 죽었지.”

번뜩!

묵 노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연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며 바로 손을 뻗었다.

“큭!”

용연은 묵 노야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었다.

“당신, 뭐야?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큽.”

묵 노야는 용연의 손을 때리며 목을 가리켰다.

용연은 목을 쥔 상태로 조금 더 있다 손을 풀었다.

“커헙…… 흐압, 흐압…….”

묵 노야는 혼비백산해서 목을 주무르며 용연을 쳐다봤다.

이토록 과격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까닭이다.

육 년 전 일이다.

“똑바로 말하는 게 좋아.”

분노가 걷히지 않은 목소리가 용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이게 무슨.’

묵 노야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였다.

슥―.

용연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여, 연관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네!”

“말장난할 생각이라면…….”

“내, 내 손으로 학림을 죽인 적은 없지만, 그럴 수 있는 계획을 짜서 건넨 것은 맞네.”

“……누구에게?”

용연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쿨룩쿨룩.”

묵 노야는 용연의 눈을 피해 기침을 하며 생각을 굴렸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냉정하던 놈이 눈이 뒤집혔다.

일단은 진정부터 시켜야 할 것 같다.

“동태병. 교림 두 명에 의해 죽었네. 그 세력까지. 자네와 함께 온 학림에게 물어보면 알 걸세.”

“당신은?”

“……?”

“당신의 계획을 실행한 자는 죽었는데, 계획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나, 나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말했듯이, 나는 계획만 만들었을 뿐이네.”

“당신에게 계획을 의뢰한 곳에선?”

“의빈에서 보지 않았나? 그들은 몇 번이고 계속 군림단을 건드릴 생각이네. 나는 이미 육 년 전에 군림단과 맞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네. 그래서 떠났지. 아무튼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육 년 전에 만들어 놓은 계획을 실행한 것일세.”

“주변에는 있었지만 그 어떤 일도 주도하진 않았다. 이 말인가요?”

용연의 말투가 다시 차분해졌다.

“바로 그걸세!”

“상황을 모두 지켜봤지만 한 발 뒤에 있었으니 무관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시켜서 한 일이다?”

용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위험하다.’

묵 노야는 용연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화제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할 필요가 없도록 용연이 틈을 내주었다.

“얘기 좀 해 주세요.”

용연은 다른 곳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뭘 말인가?”

“학림은 웬만한 상황에는 죽지 않도록 극한의 수련 과정을 겪거든요. 도대체 어떤 계획인지 궁금해지네요.”

“…….”

꿀꺽.

묵 노야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감정을 추스른 것 같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을 듣고 나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입을 닫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일단 말은 꺼내 놔야 했다.

“그건…….”

일단 말이 시작되자, 묵 노야는 육 년 전, 첫 번째 학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계획을 숨김없이 꺼내 놓았다. 물론 용연의 표정 변화를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용연은 묵 노야가 짠 계획을 들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고 이채를 발했다.

대상의 성격과 익힌 무공, 그리고 행동 반경까지 고려한 덫을 몇 겹에 걸쳐 씌우는 작업.

용연은 당시 학림들 중 한 명이 되어 묵 노야가 짜 놓은 계획에 빠졌다고 상상을 하자, 저절로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젓게 됐다.

너무도 치밀한 계획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대상을 본 적은 없네. 그저 전해받은 정보에 맞춰 계획만 짜서 주었을 뿐일세.”

“……그런 계획에 목표가 되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 차, 이 차, 삼 차…… 십이 차까지.

학림 한 명에 중첩되는 계획의 경우 수가 열두 가지였고, 그 모든 계획이 전부 연결되어 있었다.

집요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들이 누구죠? 당신에게 학림들을 죽이도록 시킨 자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귀암로네.”

“귀암로?”

용연은 묵 노야가 순순히 배경 세력을 말하자 한 번 더 되물었다.

그 모습에 묵 노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용연이 강호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덧붙이지. 귀암로는, 크게 한류천, 은자림, 사야벌, 여우락, 혈루, 어부하까지 여섯 개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네. 각각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한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암주 구왕(九王) 사도천.”

“…….”

용연은 처음 듣는 세력들과 이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추천한 사람은, 하오문주 문성필이네. 아니, 정확히는 하오문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라고 해야겠지. 돈을 하오문에서 대겠다는. 그러니 ‘그들’이라고 말한 걸세.”

“고작.”

“음?”

“귀암로도 아니고 아래 조직, 여섯 개 중 고작 하나가 의뢰했을 뿐인데 그런 일이.”

용연은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웅얼댔다.

“철혈사자맹일지도 모르네.”

“……!”

“사혈명일지도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총 다섯 번에 걸쳐 돈을 받았는데, 그중에 세 번만 하오문에서 받았고 나머지 두 번은, 오행각과 귀곡의 인장이 찍힌 어음을 받았네. 누가 명령을 내렸을 것 같은가?”

묵 노야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용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서, 설마 그들이 모두?”

용연은 차마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은 너무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왜 사라지려는지 이해가 되나?”

‘강호삼대세력 전부가 단을 노리고 있다? 왜? 아니, 이런 사실을 다른 선배님들이나 담 교림님은 모르고 계신 건가? 나도 알아내는 정보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직은 알 자격이 안 되기에 그럴 수 있다.

적이 누군지 알게 되면 눈앞의 묵 노야처럼 적개심보다 포기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감정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어떤가? 적이 너무 거대하지? 내가 왜 사라지려 했는지 이젠 이해가 되나?’

묵 노야는 용연의 감정 변화를 말없이 지켜봤다.

오래전에 겪었던 일이다.

자신을 현장에서 제외시키고 첫 번째 학림을 죽인 뒤 두 번째 계획을 내놓으라며 협박할 때, 복수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명령이 하오문을 지나 귀암로를 지나 다른 강호삼대세력과 연결되는 것까지 확인한 뒤, 복수는 포기했다. 아니, 다음을 기약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것도 하오문 정도의 선까지만.

자신이 겪은 과정을 일각 만에 모두 알게 된 용연을 보는 이 시간.

묘하게 위안이 되고 있다.

용연에게 자신처럼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순 없었다.

갑자기 용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우, 웃어?”

“너무 거대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네요.”

“내 말을 듣기는 한 건가? 군림단을 노리는 자들은 강호삼대세력이라고.”

“동태병이란 자는요?”

“동태병?”

“그자도 강호삼대세력 중 한 곳의 인물인가요?”

“그는 아니었네.”

“그렇군요. 이상하네요. 그 정도 거대세력들이 왜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고 대리를 세웠을까요?”

“그야 급이 다르니…….”

“셋 중 한 곳에서 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선 안 되는 건 아닐까요? 단이 그곳을 목표로 삼으면 곤란하니까.”

용연은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다 묵 노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군림단이 작정하고 한 곳을 노리면? 어느 곳이든 서열 십위까지는 나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두 세력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

묵 노야는 떠오른 생각을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군림단의 전력에 대한 평가를 몇 차례나 해 봤기에 정확할 것이다.

자신이 세운 계획에 대한 대가를 세 곳에서 지불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묵 노야, 사천 땅에선 그들의 이목을 얼마든지 피해서 지낼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곳을 제가 마련해 드리죠.”

“……!”

묵 노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용연의 말투가 달라진 것과 제안한 내용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묵 노야의 그 능력,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릴게요. 묵 노야를 사냥개로 사용하다 버리려고 하는 자들에게 제대로 복수 한번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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