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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55화 (55/232)

55화

“묵 노야, 초소에서 보고할 것이 있어 왔다고 합니다.”

대전 문이 열리고 초소 위사 복장을 한 두 명이 들어왔다.

묵 노야는 들어서는 둘을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다.

복장도, 다가오는 자세도 틀림없는 초소 위사의 그것이었다.

“보고하게.”

살피는 눈과 달리 묵 노야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교…….”

“사냥개와 곰은 다르지. 숲에 곰도 있나?”

“……?”

“사냥개는 두 마리였지 아마?”

‘아!’

위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제야 알아들은 것이다.

“곰이 곧 나타날 거라 사냥개 두 마리는 자리를 지키게 할 생각입니다. 잡는 즉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스륵―.

위사의 동공이 좌우로 돌아갔다.

“웅담이 필요하니 함부로 달려들진 말고. 가 보게.”

“신호를 주셨으면 합니다. 도망친 여우 세 마리가 아직 나타나질 않아서 함부로 사냥개를 풀 수가 없습니다.”

‘세 회주가 오면 신호를 달라? 이놈 제법이군.’

묵 노야는 위사로 분장한 남회의 응변이 마음에 들어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러지.”

묵 노야는 그것으로 됐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남회를 기다리던 구선은 정문을 나서는 두 초소 위사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 백주가 잘해 냈나 보네요.”

용연 역시 걱정하고 있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용 학림이 남 백주를 추천했을 때 고민 엄청 했다는 것만 알아주시게.”

“구 향주님을 제외하고 그 정도 어려운 일을 해낼 사람은 남 백주뿐이잖습니까?”

“……알고 있었나?”

“제가 후임일 때 하던 생각과 학림이 됐을 때 해야 할 생각이 다르더라고요.”

‘허! 그새 또 성장한 건가? 무공 습득 속도에 놀란 게 엊그제 같은데.’

남회와 얘기할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 그것만으로 자신이 다음 대 향주를 남회로 점찍은 걸 파악한 모양이다.

“경험을 해야 짊어질 것의 경중을 빨리 파악하잖소?”

구선의 말투가 달라졌다.

용연을 다른 학림과 같은 급으로 인정한다는 나름의 표현인 것이다.

일각도 못 돼 남회가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향주님.”

“무용담은 나중에 듣자. 뭐라더냐?”

“신호를 주겠다고 합니다.”

“묵 노야의 용모(容貌)는?”

“키 오 척, 옷은 농부 차림, 회피 가능 거리는 이삼 장 정도로 판단됩니다.”

“이삼 장? 상당한데?”

구선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냐?”

“대전을 빠져나오며, 그는 어쩌면 변장이 아니라 변신에 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신?”

“제가 말씀드린 그의 용모는…….”

“그가 그렇게 보여지길 바랐다는 뜻인가요, 남 백주님?”

용연은 남회가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아 나섰다.

“맞습니다, 용 학림님.”

“그럼 용모는 잊어야겠네요.”

용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심회 정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안 되지, 안 돼.”

묵 노야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하는 행동이다.

남회에겐 세 회주가 돌아오면 신호를 주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이곳에 머물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곳도 무너지고, 세 회주도 죽어야 해. 그래야 나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고리가 사라져. 누군지 몰라도 나를 보고 싶은 자가 있는 모양인데, 그건 안 되지. 당겨지지 않으면 당기면 어떨까?”

묵 노야는 앞쪽 창가로 가 정문을 내려다봤다.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거나 연무장에서 상체를 벗은 채 수련 중인 무인들이 보인다.

이번엔 뒤쪽 창가로 가 밖을 내다봤다.

고요한 숙소, 느린 걸음으로 정찰하는 자들, 움직임 없는 숲.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다.

탕!

“대주들을 불러 주게! 어서!”

묵 노야가 탁자를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

남회는 안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하루 이틀은 조용히 지나갈 거라 여기고 감시보다 이곳에 모인 외연 등의 식구들을 챙기는 쪽에 신경 썼다.

“어어…….”

식구 중 한 명이 공심회 정문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아보니, 수십 명의 무인들이 정문을 빠져나와 달려오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곧장 구선을 찾았다.

“향주님, 공심회 정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보고 있다.”

구선과 용연, 무묵의 시선이 정문 쪽을 향해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초소 쪽이다. 허를 찔렸어. 돌려보내도, 돌려보내지 않아도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됐어.”

구선은 날래게 움직이는 공심회 무인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묵 노야란 자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한 대 맞고 만 것이다.

“괜한 짓을 하고 말았네요.”

용연은 낮게 신음했다.

남회를 보낸 것이 묵 노야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아니, 아니. 그놈은 애당초 이런 식의 전개를 염두에 두고 쪽지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진짜 정보를 보내 믿게 만들고, 그다음엔 반을, 또 그다음엔 반의 반을. 사람의 심리를 갖고 장난치는 자들의 특징이지.”

무묵은 고개를 흔들며 용연의 계획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지지해 주었다.

“무 선배님, 묵 노야란 노인이 왜 저런 수를 두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뭔데?”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겁니다. 제가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무 선배님.”

“주도권?”

무묵은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용연의 입에서 나오자 이채를 발하며 돌아봤다.

“예.”

“그자가 저것들을 내보낸 것과 주도권이 어떤 연관이 있는데?”

“제가 촉발한 겁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남 백주를 보내 얼굴을 확인하게 하자, 기분이 상한 거죠.”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용 학림?”

무묵은 놀란 표정으로 용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문으로 쏟아져 나온 무인들이 초소로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묵 노야란 노인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해 낸다?

“용 학림, 설마 묵 노야란 자가 이렇게 나올 줄 어느 정도 예상을 한 것이오?”

구선 역시 놀라서 한마디 보탰다.

“제가 묵 노야란 자의 입장이라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적에게 먼저 정보를 제공할 정도로 이기적인 잡니다. 배신은 하되, 배신자란 소린 듣기 싫고. 그렇다고 적과 한편이 되는 건 또 싫고. 아마.”

“아마?”

“양쪽 모두에 들키지 않고 사라지고 싶을 것 같습니다. 저 인원을 처리하면 이차, 삼차 준비된 명령을 내릴 겁니다.”

용연의 말이 끝나자 구선은 무묵을 돌아봤다.

무묵이 입을 일자로 만든 채 용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만 수긍하게 된 게 아니군. 용 학림, 상황에 맞춰 사람의 심리를 읽어 내다니.’

구선은 속으론 감탄했으나 방해될까 봐 조용히 용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 선배님, 구 향주님, 저와 정문으로 들어가시죠?”

용연이 눈을 빛내며 공심회 정문을 가리켰다.

“용 학림, 외연 식구들은 저들을 처리하고 합류하도록 하겠소.”

“아니요. 저들이 바깥 초소까지 가야 세 회주들에게 서둘러 돌아오라는 연락을 할 테니 그냥 두세요.”

“세 회주? 갑자기 자리에 없다는 그들 얘기는 왜 꺼내시오?”

“다시 올 필요 없게 만들어야죠. 구 향주님, 식구들에게 공심회 뒤쪽 담을 넘으라고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셋이 정문을 돌파합니다.”

용연은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을 아무 거리낌 없이 순서대로 말했다. 그러자 구선은 놀란 눈을 옆으로 돌려 무묵을 살폈다.

용연이 무묵에게 묻지도 않고 결정을 내리자 이후에 벌어질 일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정문은 내가 부수마.”

무묵은 구선의 예상과 달리 웃으며 주먹까지 쥐어 보였다.

‘우, 웃어?’

구선은 그동안 알고 있던 무묵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놀랐으나, 용연의 계획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따라서 웃었다.

학림 사이의 일에 낄 필요는 없잖은가?

그래도 한마디는 해 뒀다.

“용 학림, 좋은 작전이오.”

휘이익―.

용연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

“묵 노야, 큰일 났습니다! 웬 놈들이 정문 앞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대전 문을 열며 무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몇 명이더냐?”

묵 노야는 무인의 보고에 이채를 발했다.

“그게…… 세 명입니다. 헌데, 내치려던 위사들 십여 명이 겨우 한 놈에게 당해서…….”

“셋? 초소, 초소를 점검하라고 보낸 자들은 어떻게 됐느냐?”

“지시한 장소로 이동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뭐? 그들을 보내 줬다고?”

묵 노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무, 묵 노야, 일단 정문에 쳐들어온 세 놈부터 처리를 했으면…….”

‘놈이야, 내게 그 둘을 보낸 놈.’

묵 노야의 귀엔 이미 무인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역의 역.

찌르라고 손잡이를 건네니 방향을 틀기에 되돌려주려 했건만, 그걸 기회로 쥐여 준 손잡이에 전력을 쏟고 있다.

입안이 까끌거린다.

“묵 노야…… 큭!”

툭.

겁먹은 얼굴로 명령을 재촉하던 무인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힐끗.

묵 노야는 무인의 목을 벤 칼을 든 채 대전 천장과 벽에 연결된 밧줄로 향했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한 놈도 남기지 말라는 의미에서 선물 하나 더 주마.”

삭―.

줄을 자르자 곧바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렸다.

데앵―.

한 번 더.

데앵―.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소리가 공심회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팟.

묵 노야는 곧장 태사의 세 개가 나란히 놓인 곳 뒤로 가 발을 굴렀다.

쿵― 슷.

벽이 열리며 묵 노야의 신형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의도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됐다.

***

‘내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바로 반응을 보일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자야. 분명히 지켜보고 있을 거야. 놓치지 않는다.’

힐끗.

용연은 무묵의 바로 뒤에서 정문을 통과하며 가장 높은 건물 끝을 올려다봤다.

쪽지에 설명한 대로 양쪽에 높은 전각이 있다.

그러나 꼭대기 어디에서도 지켜보는 인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주님들은 왜 안 오시는 거냐!”

“그걸 제게 물으면…… 으악!”

“오, 오지 마!”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은 겁에 질려 소리만 지르다 담 아래로 떨어져 죽거나 스스로 뛰어내려 용연, 무묵, 구선의 공격을 피했다.

쿵!

쩌저적―.

바닥에 갈지[之]자 균열이 생기더니 앞으로 밀려 나갔다.

양손에 곤을 쥔 무묵이 바닥을 때리자 길게 금이 갔다.

그 광경을 보고 덤벼드는 위사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약하지 않나요, 구 향주님?”

용연은 겁에 질린 무인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 데려간 모양이오, 용 학림.”

“예?”

“회주 셋이 자신의 수족들을 모두 데려간 것 같소.”

“아…….”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래서 묵 노야란 자가 이곳 무인들을 부릴 수 있었을지도.

용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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