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구선은 군림단원의 선택이 아니라 군림단의 선택이라고 했다.
군림단이 신의 군단이라도 되는 걸까?
왜 매번 구선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남회는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많은 일을 하시네요, 세 곳 식구들요.”
용연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남회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많은 감정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예?”
남회는 작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용연이 웃으며 남회를 보고 있었다.
“제가 남…….”
“백주. 향주님 직속들의 신분입니다.”
남회는 용연이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고서 재빨리 부르기 편한 호칭을 알려 주었다.
“남 백주님, 단원들이 임무 수행을 마치면 최대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이유를 아세요?”
“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요.”
“단원들이 빨리 떠나 줘야 세 곳 식구들이 일을 시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단과 세 곳 식구들. 서로 역할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철렁.
남회는 용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놀랐다.
구선이 몇 번이고 해 주었던 말이었다.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고, 각자 맡은 일에 전력을 다하면 된다고.
왜 그때는 느끼지 못했을까?
가슴이 울렁거렸다.
알고 있다, 이 울렁거림의 원인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남회는 용연에게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남 백주님, 무 선배님은 지금 어디 계시죠?”
용연은 침묵이 길어지자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남회도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무묵 학림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남회는 서둘러 앞장서며 숨을 뱉었다.
아무리 학림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에게 감정을 들켰다는 사실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
‘이것 봐라? 또 한 명을 내보낸다?’
무묵의 눈빛이 달라졌다.
공심회의 정문이 열리며 무인 한 명이 주위를 살피다 길을 벗어나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전에 일대의 초소 배치도를 갖고 있던 자가 떠올랐다.
“무묵 학림, 이번에도 한 명이 나오네요. 잡아올까요?”
“흠, 찝찝해.”
무묵은 혼잣말을 하며 인상을 썼다.
한 번은 운으로 여길 수 있지만, 두 번은 결코 운일 수 없다.
누군가가 연속해서 사람을 보내는 것이다.
왜?
이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무묵 학림?”
“구 향주, 내가 직접 움직일 테니 다른 움직임이 있는지 감시 좀 부탁하겠소.”
“눈을 떼지 않도록 하지요.”
무묵은 구선의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외연, 은타, 고람의 식구들이 알려 주는 소리대로 일각가량 숲을 가로지르다 멈춰 서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시싯― 싯―.
옷자락에 걸린 풀들이 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팟.
순간적으로 튀어나가 무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바닥에 찍어 눌렀다.
“읍!”
무인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비명이었다.
“묵 노야가 전하라고 준 쪽지 내놔.”
“……!”
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풀어 달라는 뜻이다.
‘역시 이번에도 묵 노야란 그 노인이 보낸 건가? 뭐하자는 거지?’
무묵은 일부러 묵 노야란 이름을 꺼냈으나, 무인이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이, 있습니다. 초소 끝에 가야 만날 거라고. 아, 아무튼 제 품에 묵 노야께서 전하라는 쪽지가 있으니…….”
퍽!
“시끄럽게.”
무묵은 수다스러운 무인의 얼굴을 흙속에 밟아 버리고는 품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다.
[정문 지나 좌우에 전각이 두 개 있고, 그 뒤로 중앙전각과 세 개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적은 인원으로 칠 경우, 뒤에서 숙소를 덮쳐 정문 쪽으로 밀고 오면 된다.
이백 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할 경우, 고수들이 정문에서 밀고 올라오고 나머지 인원은 담을 넘어 뒤쪽 숙소에 대기하고 있는 자들을 전멸시키면 된다.
믿지 못하겠지. 나라도 이런 쪽지를 받으면 의심부터 할 테니.
그럼 이건 어떨까?
이곳에 공심회 세 회주는 없다.
학림만 둘이라면 서두르는 편이 좋고, 만약 교림이 함께 있다면 기다렸다가 세 회주까지 전부 죽이는 쪽을 추천하마.
그래야 진짜들이 나선다.
육 년 전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진짜들이.
―무(無)]
“육 년!”
무묵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졌다.
우득!
밟고 있던 무인의 목이 부러지며 그대로 즉사했다.
“무 학림, 좀 더 뒤를 캐고 죽이시지.”
구선은 다급히 밟힌 자의 상태를 살피다 낮게 숨을 내쉬고 말았다.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것 같소, 구 향주. 이걸 보면…….”
“무 선배님.”
무묵이 구선에게 쪽지를 보여 주려 할 때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 학림?”
무묵은 뒤를 돌아보다 반색을 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학림이 된 이후 처음 뵙습니다.”
용연은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얼마 만에 막내다운 막내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늦었지만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거기까지. 인사는 충분하니 일단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보자. 구 향주도 오시오.”
무묵이 손에 든 쪽지를 내밀며 용연과 구선에게 다가오라 손짓을 했다.
용연은 구선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유, 육 년!”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구선의 입에서 짧고 강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학림학살 사건으로 외연, 은타, 고람의 식구들 역시 많은 희생을 입었기에 구선의 반응은 당연했다.
‘육 년 전 일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은 걸까, 아니면 그 일과 관련이 있었다는 걸까? 만약 후자라면 우리를 들여보냈을 때 자신도 위험해질 텐데, 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 가정도 이상해. 그렇다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우리를 이용해 공심회를 몰락시키려 한다?’
용연은 쪽지를 보낸 자가 군림단과 공심회 양쪽 모두에 해박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육 년이란 말에 꽂히지 않고 내용을 파고들게 된 이유였다.
“용 학림, 왜 구 향주가 육 년이란 말에 놀라는지 아는가?”
“압니다. 학림 다섯 분의 목숨을 앗아 간 육 년 전 사건 때문이잖습니까?”
대답하는 용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 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이 녀석 봐라?’
무묵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용연이 마치 생사를 함께했던 선배들의 죽음을 지켜보기라도 한 것 같은 격렬한 감정을 표정으로 뱉어 냈기 때문이다.
욱신.
양안이나 다른 학림들과 함께 있을 때나 느끼던 가슴의 통증이 일어났다.
한 명, 한 명의 비보를 접해 본 사람이 아니면 공감할 수 없는 아픔인데.
“무 학림, 어떻게 할까요? 세 곳의 식구들은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구선의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
“구 향주, 거기에 적힌 말을 믿소? 나는 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글자는 믿지 않소.”
“……!”
꿈틀.
구선은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 선배님,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불쑥, 용연이 나섰다.
“말해.”
또르륵, 무묵의 눈동자가 굴러 용연에게 닿았다.
정식 단원이 됐으니 당연히 대화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쪽지를 보낸 자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나도 궁금하다. 뭘 준비하고 우리를 도발하는지.”
“반대일 수는 없을까요?”
“반대?”
“공심회의 몰락을 바라고 있다는.”
“그런 자가 제 발로 다시 기어 들어가겠느냐?”
“예?”
“묵 노야. 이 쪽지를 보낸 자다. 열이틀 동안 내가 뒤쫓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철두철미한 노인이다.”
“묵 노야란 노인이 미행당한 것이 아니라, 무 선배님이 미행하도록 만들었다고요?”
“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한 놈을 시켜 지도 한 장을 전하게 했다.”
“지도요?”
“초소를 점으로 표시한 지도였다.”
무묵은 소매에서 접힌 쪽지 한 장을 꺼내 용연에게 건넸다.
무묵의 말대로 쪽지엔 수십 개의 점이 찍힌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초소를 모두 제거하셨고요?”
“제거했다.”
“스스로 눈을 가렸다?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음? 구 향주님, 식구들 중에 변장에 능한 두 명만 추려 줄 수 있을까요?”
용연은 생각을 정리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구선을 돌아봤다.
“그 두 명이 변장과 응변, 발이 빠른 자라면 어떻소, 용 학림?”
“제가 원하는 분들이지요.”
“바로 준비하겠소.”
구선은 용연의 말을 듣는 순간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한 대답이었다.
“뭐지? 용 학림, 설명부터.”
무묵이 미간을 모으며 용연을 돌아봤다.
“초소가 전부 제거됐다는 걸 묵 노야란 자에게 알려 주려고요.”
“어떻게?”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우리 사람으로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무묵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그러자 용연은 얼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묵 노야란 자가 우릴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 선배님.”
“시험?”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자신이 알려 준 방법대로 우리가 움직이면 거기에 맞춰서 대응할 생각이고, 우리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내면 또 거기에 맞춰서 대응하려는 거죠. 그래서 물어보려고요. 신호를 줄 수 있느냐고요.”
“신호? 어떻게?”
“우리 사람을 보내야죠. 담 교림님이 곧 도착하신다는 것도 알려 주고요.”
“음? 담 교림에 대한 얘길 뭣 하러?”
무묵이 화를 내듯 되물었다.
“용 학림, 그다음은 내가 설명을 해 봄세.”
구선은 용연이 말을 시작할 때 서서히 표정이 풀리다 이젠 웃고 있었다.
무묵의 시선이 구선을 향했다.
“무 학림, 저 안에 있는 묵 노야란 자는 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같소. 그런 자에게 담 교림이 곧 도착한다는 정보를 주면 그는 세 회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 물론, 우리는 그 전에 담을 넘어갈 것이고. 어떤가, 용학림?”
구선이 용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의빈에서 묵 노야란 자가 이곳을 안내했듯이, 우리를 또 다른 자에게 안내할 한둘은 잡아 둬야 합니다. 물론 그중 한 명이 묵 노야라면 금상첨화겠지요.”
“하!”
무묵은 용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겨우 쪽지 두 장만 보고서 그 정도 계획을 순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무 선배님, 저 안에서 우릴 휘두르려는 노인을 우리가 휘두르는 건 어떠십니까?”
슥―.
용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묵이 손을 들어 올렸다.
쫘악!
용연의 손바닥과 무묵의 손바닥이 달라붙었다.
“내 말이.”
무묵은 몸을 돌려세우며 말을 이었다.
“용 학림, 담 넘어갈 때 불러. 나머진 맡기마.”
무묵의 입가가 몇 번이고 씰룩였다.
후임인 적휘가 같은 후임이었던 용연을 왜 그리 높게 평가하고 따라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용연은 자신이 만난 학림 중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난놈’이란 걸 인정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