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지도 가져오게.”
묵 노야는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호위로 따라붙은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 어디 지도를…….”
“길을 망보는 곳들이 표시된 지도일세. 서둘러 주게.”
“고, 곧 가져오겠습니다.”
무인은 허리를 접어 대답하곤 동료들에게 서두르라는 눈짓을 보내곤 얼른 대전을 나섰다.
쿵!
묵 노야는 무인들이 대전을 나가자마자 긴 탁자를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자리를 비웠다고? 세 회주 전부?”
내전까지 호위를 하던 무인이 진땀을 흘리며 한 대답이 가관이었다.
세 회주들의 사문에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다들 제 것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적당히 버티다 각자의 사문인 강호삼대세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을 데려다 놓고 군림단의 인원을 최대한 줄여라?
“후후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숨어 있는 동안 세상 돌아가는 소식 좀 전해 주라고 장소를 말해 주었더니 임료란 계집이 귀암로에 붙어 자신을 판 것이다.
[주인님, 저보고 강해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약하게 방치하신 거예요? 이번 주인님이라면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실 거예요. 이런 저, 용서해 주실 거죠?]
임료가 하오십랑 중 은형수 이탄에게 가며 전한 쪽지의 내용이었다.
그놈을 넘어서고 싶다며 더 강한 무공을 원해서 은하소수를 구해 줬건만, 단물만 쏙 빨아먹고 자신을 버린 것이다.
더욱 환장할 노릇은, 귀암로에서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으로 군림단도 모르고 싸울 의지도 없는 회주 셋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학림 나머지와 교림 한둘?
하오성자라 불리는 한류선이 제시한 성과였다.
하오십랑의 대형, 일랑 한류선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곳에서 거절은 죽음이다.
죽기 싫어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첫 번째 계획을 실행 중인 것이다.
세 회주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자, 세 명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한 명씩 죽여서 언제 끝나나요, 묵 노야? 한 번에 끝냅시다. 모자란 인원은 얼마든지 지원하겠소.
빨리 임무를 끝내고 사문으로 돌아가 한자리하고 싶은 욕망들이 두 눈에 가득했다.
“후후후. 그래서 준비했소. 몇이나 올지 모르지만 그들을 직접 상대해 볼 기회를 말이오.”
씨익.
묵 노야는 언제 긴박했느냐는 듯이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모두 죽은 것이다.
말로는 알아서 피하라고 했지만 교림이 나선 곳에서 일호의 실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일호. 하지만 복수는 제대로 해 주마.”
묵 노야의 눈이 반짝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미행을 당하고 있음을 곳곳에 심어 둔 정보원에게 들었다.
길거리 행상, 구걸하는 앉은뱅이, 닳고 닳은 노류장화 등등.
솥을 밖에 걸어 둘 정도로 협소한 국수집 안 구석에는 항상 밖으로 통하는 개구멍 같은 곳이 있다.
철전 몇 푼 쥔 손을 내밀면 알아서 정보를 갖고 찾아온다.
삼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고, 주변을 맴돌다 마지막엔 국수집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한다.
창처럼 생긴 구멍을 통해 내다보자 몇 년 전에 본 얼굴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묵 노야의 특기 중에 한 가지는, 한 번 눈여겨본 얼굴은 웬만해선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림이다.
그다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능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고, 따라오도록 마차며 배도 이용했다.
공심회의 위치야 군림단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이 얼마나 쓸어버리기 쉬운 곳인지는 모를 것이다.
이제 그것을 알려 줄 차례다.
묵 노야는 무인이 가져온 지도를 편 후 빠르게 눈으로 위치를 암기했다.
‘사십 장 내에 스물일곱 군데가 있는데 그 뒤로 육십 장까지 넓히면 고작 여섯 군데뿐이라고? 가관이군.’
대충 선을 그린 후, 점들을 찍어 나갔다.
그리고 반듯이 접어 천으로 만 후, 밖에 있는 무인을 불렀다.
“이걸 최대한 조심스럽게 마지막 망을 보는 곳에다 전해 주게.”
“예? 그런 일은 회주님이 오시면 여쭤 보고…….”
“다른 사람 좀 불러 주게.”
“그, 그게 아니라.”
“괜찮네. 그럴 수 있어. 불안하면 피하는 것도 무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일세.”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무인은 묵 노야가 다른 무인에게 혜택을 주려한다는 확신이 들자 주저하지 않고 천에 감싼 종이를 받아 들었다.
“허허허. 그 또한 좋은 자세지.”
묵 노야는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무인을 인정하는 듯 고개까지 끄덕여 주었다.
역시나 촉이 왔을 때는 피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 묵 노야였다.
***
슷.
무묵은 가볍게 나무에서 떨어지며 달려오는 무인을 덮쳤다.
“읍!”
“쉿.”
“……!”
무인은 눈을 화등잔 만하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갖고 있지?”
절레절레.
무인은 힘껏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품에 있다고?”
무묵은 무인의 품에 손을 넣어 매끄러운 천을 빼내고는 풀어서 쪽지를 읽었다.
공심회 주변 일대와 점들, 그리고 글자 하나.
사(死).
무묵의 시선이 쪽지에서 벗어나 손에 잡힌 무인에게로 향했다.
“네게 이걸 준 노인이 누구지? 솔직히 말해 주면 이 쪽지에 적힌 대로 해 주마.”
“무, 묵 노야입니다. 그가 이걸 제일 끝에서 망을 보는 곳에다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밖엔…….”
꽈득!
무묵은 손으로 무인의 턱을 좌에서 우로 돌려 버렸다.
“묵 노야라…….”
무묵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 위로 수풀을 덮은 뒤 자리에서 사라졌다.
***
용연은 안개 낀 숲으로 들어가 공심회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품에서 말린 육포 한 덩이를 꺼내 공중에다 던졌다.
덥석.
나무 위로 솟구친 육포를 날카로운 부리로 날름 받아 낸 매도 나뭇가지에 앉았다.
“쉿.”
용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매는 울지 않고 육포를 먹었다.
“왜 이리 조용하지?”
용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가 나무로 내려왔는데 새나 쥐, 토끼 등 법석 떠는 동물이 없다.
이 숲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외연의 식구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움직여 봐야 할 것 같다.
그때였다.
꾸끼― 끼끼―.
매가 갑자기 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올려다보니 허공이 아니라 숲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쫓아갔다.
이십여 장 정도를 쫓아가니 피 냄새가 났다.
힐끗.
고개를 들자 매는 용연과 눈을 마주쳐 준 뒤 허공 높이 솟구쳤다.
이제는 놈의 생각이 읽힌다.
할 일 다 했으니 먹이 찾으러 간다는 뜻이다.
“신기한 놈.”
용연은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니란 듯 피식, 웃고는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갔다.
두 구의 시체가 포개져 죽어 있었다.
공간은 좁았고 뚫린 틈으로 내다보니 길이 보였다.
이런 초소가 더 설치될 만한 곳이라면 꺾인 길이나 갈래 길일 것이다.
눈으로 길을 좇으며 달렸다.
‘음?’
멀리 초소처럼 보이는 곳에 웬 사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연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사내를 살폈다.
사내는 초소 안을 확인만 하더니 곧바로 허리를 펴며 용연이 지나온 초소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슥, 슥―.
자신이 밟고 있던 자리를 발로 문질러 흔적을 제거한 후 곧장 움직였다.
수상한 사내는 용연이 지나온 초소를 확인한 후 근처에 있는 나무를 매만졌다.
초소 안의 시체를 봤음에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공심회와 무관한 인물이라면 남은 가능성은 한 곳뿐이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외연의 인물.
“뭘 찾는 거죠?”
“……!”
돌아선 사내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으나 이내 표정은 풀렸고 입가엔 웃음이 담겼다.
‘뭐지?’
용연은 사내의 표정 변화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용연 학림이시죠? 외연 식구 남회라고 합니다.”
“저를 아시나요?”
“만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 향주님께서 워낙 용연 학림에 대한 얘길 많이 하셔서 보는 순간 알겠더군요.”
“구선 향주님이 보내셨나요?”
“예.”
“아, 저는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다고만 해서 누가 오는지 몰랐습니다.”
“첫 임무시군요? 그럼 이 표식을 놓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남회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에 확인했던 나무의 표식을 가리켰다.
용연이 다가가 나무에 새겨진 표식을 쳐다봤다.
“해석하는 방법은…….”
“아, 맞다!”
용연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외연과 연락하는 방법에 대해 들었음에도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향주님께서 첫 임무 때는 많이들 잊는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너무 늦지 않게 만나게 돼서 다행입니다. 바로 설명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용연 학림?”
남회는 용연이 창피하지 않도록 재빨리 화제를 바꾸며 표정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예. 어떤 상황인지 궁금합니다.”
“외연, 은타, 고람의 식구들이 오십여 명 가까이 퍼져 있습니다. 담영호 교림과 용연 학림이 맡은 일이니 지휘는 외연이 합니다. 그리고 무묵 학림은 곧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합류할 겁니다.”
“무 선배님도 와 계신다고요?”
“의빈에서 의심 가는 노인이 보여 쫓아서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의빈! 그래서 담 교림께서 그런 말을 하신 거구나.’
―네 말대로 뒤를 쫓고 있다.
주루에서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무묵이 의빈에도 왔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무 선배님은 무슨 일을 마무리하시는 거죠?”
“공심회 주변의 초소를 모두 제거 중이십니다.”
“이곳의 초소가 아니라 일대의 초소를 전부요?”
“예.”
“그것 때문에 세 곳의 식구들이 오십 명 넘게 동원된 거군요.”
“아닙니다.”
“예?”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무묵 학림이 알아내서 전해 주었습니다. 빠져나오는 자를 잡았는데 그자의 품에 소초가 있는 위치가 찍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구 향주님이 용연 학림을 직접 맞아 주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 안쪽에 계시나요?”
“예. 많이 바쁘실 겁니다. 공심회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빼내야 할 테니까요.”
남회는 숲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략적인 구선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열심히 군림단원들을 받쳐 줘도 외연, 은타, 고람의 식구들은 군림단원이 될 수 없다.
―왜 우리에겐 군림단원이 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향주님?
돌아온 대답은 한마디였다.
―군림단이 우릴 선택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