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태어나 처음 보는 여인의 환한 웃음이었다.
면사를 쓰고 있었지만 그 안까지 모두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연을 알 수 있을까요, 용…… 무사님?”
인이예는 용연에게 어떤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말을 끌며 물었으나 용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무사’란 표현을 썼다.
“사연요?”
“네. 우리를 도와주러 오시게 된 사연요.”
인이예의 대답에 용연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눈빛과 말투에서 떠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음이 느껴진 까닭이다.
용연이 입을 열지 않자, 인이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추해 볼게요. 저들과 한패인 누군가를 만나셨던지, 아니면 저들이 꾸미는 일에 대해 들으셨던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관상이라도 공부한 소저인가?’
용연은 인이예가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자 속으로 크게 놀랐다.
대답 대신 피득이 지니고 있던 서찰을 꺼내서 인이예에게 건넸다.
“피씨 성을 가진 자가 갖고 있던 서찰이오.”
인이예는 용연에게서 서찰을 받아 들자마자 읽어 내려갔다.
‘칠채석!’
인이예의 시선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예상한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겪으셨네요?”
칠채석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용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내려 노력했으나 역시나 딱딱한 말투는 고쳐지지 않았다.
“역시.”
인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용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도움을 주러 와 주셨네요. 감사드려요.”
“아, 아닙니다. 가던 길이기도 해서……. 아무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피곤하다.’
용연은 계속되는 인이예의 질문 공세에 피로감이 느껴졌으나,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물어볼 기세라 피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공동산으로 갑니다.”
솔직하되 적당히 피해갈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아! 그럼 그곳이 사문이신가요?”
‘윽.’
용연은 다시 이어진 인이예의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일단 이 자리는 피해야 할 모양이다.
재빨리 손을 들어 인이예와 인지예의 시선을 모았다.
“두 분 소저, 제가 시간을 너무 지체한 까닭에 실례인 줄 알지만 먼저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인이예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질문을 많이 했다 여겼는지 고개를 숙였다.
용연은 그 모습에 바로 몸을 돌려세웠다.
공동산이 어느 쪽인지는 움직이면서 찾아볼 생각인 것이다.
“용 무사님!”
용연이 막 땅을 박차려 할 때 인이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돌아섰다.
더 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동산은 저쪽 방향이에요.”
“예? 아.”
“예.”
인이예가 웃으며 방향을 가리켜주었다.
용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수레를 넘어갔다.
“인이예, 인이예…… 뭘까? 내 수줍음 많은 여동생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 질문을 쏟아 내는 모습은?”
인지예가 팔짱을 끼며 신기한 눈으로 인이예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세를 갚으려면…… 잠깐만.”
인이예는 말을 멈추고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다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꾸끼끼끼’ 소리를 내며 매 한 마리가 인이예를 향해 내리꽂히다 내민 손에 내려앉았다.
“꾸, 보이지? 저분 쫓아가.”
인이예가 꾸의 눈을 감겼다가 뜨게 하며 용연의 모습을 보게 했다.
꾸끼끼끼―.
매는 인이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울었고 이내 힘차게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됐네. 언니, 뭐라고?”
“저것도 추 아줌마가 준 거야?”
“저것이 아니라 꾸야. 그리고 추 사부님이라고 몇 번을 말해?”
“내겐 늙고 욕심 많은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는 아줌마일 뿐이야.”
“끙. 사부님이 언니와 다투지 말래서 그냥 넘어가는 거야.”
인이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남자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거야?”
인지예가 인이예의 옆으로 바짝 서며 쳐다봤다.
“고마워하는 거야.”
“그게 그거잖아?”
“달라. 그, 용 무사님은 우리에게 칠채석이 있는 걸 알면서도 도움만 주고 떠나셨어. 아직도 그런 분이 있구나 싶더라. 아무튼, 그래서 나중에라도 은혜를 갚으려고 꾸를 보낸 거야.”
인예는 면사 안의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칠채석에 대해 안다고? 그럼 이대로 보내면 안 되지.”
인지예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며 용연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서. 우리 둘이서 분칠한 사내를 상대하는 동안 저들 둘을 혼자서 처리했어. 그리고 언니, 화난 척해도 소용없어.”
“화, 화난 척? 그자가 칠채석에 대해 알고 있었다며?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어쩌려고?”
“언니, 내 소매에 은자 열세 냥이 있어.”
“뭐?”
인지예는 인이예의 뜬금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에겐 중요하지 않지?”
“뭐가?”
“내 소매에 은자 열세 냥이 있는 거.”
“칠채석 얘길 하다 돈 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
“용 무사님의 눈을 보니까, 칠채석이 그분에겐 은자 열세 냥어치도 안 되는 물건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런 것보다, 어떻게 정보가 샜을까?”
“정말 이대로 보내도 돼?”
“응, 돼.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계신 언니가 곤란하지 않도록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
“상문 선생, 기 총관, 벽 무장?”
인지예는 바로 이름 세 개를 꺼냈다.
“마장(馬場)의 마노, 지 목수, 말 먹이 주는 대건이…….”
인이예는 인지예와 달리 아버지 인장천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모두 상단에서 부리고 있는 일꾼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기억할 수 없고 맡은 곳의 우두머리들 정도였다.
“걔들 이름은 왜?”
“말과 수레, 붙은 인원, 그리고 이번 행렬의 호위를 우리 두 자매가 맡았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이 누굴까?”
“우리가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
인지예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공 외의 것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이기에 인이예가 더 질문하지 못하게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면 인이예는 알아서 혼자 생각해 본다며 넘어가곤 했다.
“언니! 어쩜 좋아, 난 진짜 이럴 때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워!”
인이예가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더니 갑자기 혼잣말을 하며 먼저 수레 앞쪽으로 서둘러 갔다.
“내, 내가 뭘 했는데? 난 네가 그럴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인지예는 고개를 흔들며 뒤따라 움직였다.
***
용연은 구릉을 넘자마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수레들이 보이지 않았다.
“으어! 놀랐다.”
심장을 문지르며 가빠진 숨을 골랐다.
집 떠난 지 며칠은 족히 됐을 텐데 두 자매에게선 계속 맡고 싶은 향기가 풍겨 나고 있었다.
용연은 지금도 그 향기가 나는 것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들킬까 봐 숨도 참았다.
기억나는 또 다른 한 가지.
―유추해 볼게요. 저들과 한패인 누군가를 만나셨던지, 아니면 저들이 꾸미는 일에 대해 들으셨던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두 자매 중 동생 인이예의 상황 분석력에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판단과 대처.
자연스럽게 대답하도록 던지는 질문들.
지금 생각하면 피로감보다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살피는 인이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웃어서는.”
용연은 인이예의 면사 위로 보였던 눈웃음을 떠올리자 저절로 심장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파드득―.
매 한 마리가 토끼를 낚아채더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광경을 보자 용연도 아직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다.”
배고픔을 느끼게 해 줘서 묘한 기분을 떨치게 만든 매에게 건넨 말이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에 적당한 장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래쪽에 물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
물가에 내려가 불을 피운 후 물고기를 잡으려 발을 담갔을 때였다.
뒤쪽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재가 날렸다.
파드득―.
고개를 들자 위쪽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매가 물고기를 한 마리만 쥐고서 날아가고 있었다.
두 마리를 놔뒀으니 나머지 한 마리도 가져갈 것이다.
용연은 다시 물가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촤아아―.
물고기 한 마리를 가져갔던 매가 엄청난 속도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날아오르며 양발에 한 마리씩 두 마리를 쥐고서 올라왔다.
툭.
“어?”
용연은 이마를 잡고서 눈을 끔뻑였다.
매가 물고기 한 마리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신기한 녀석이다.
“이왕 줄 거 두 마리 더 잡아 줘.”
용연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매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나 물로 떨어져 내린다 싶은 순간 날아오르며 양발에 쥔 물고기 두 마리를 떨구고 사라졌다.
꾸끼끼끼―.
“뭐야, 이젠 부르지 말라고?”
꾸끼―.
용연의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가 대답하듯 다시 한번 짧게 울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누가 저 매를 조종하는 건가?
수레를 노리던 자들 중 누군가가 살아 있다?
절레절레.
용연을 감시하려 했다면 오히려 매가 접근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힐끗.
이미 사라진 저 매는 그냥 사람을 겁내지 않는 이상한 매일지도 모르겠다.
용연은 이내 생각을 접고 피운 불에 물고기 네 마리를 꽂아 굽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전력으로 달려서 수삼 일 내에 공동산 근처까지 간다. 거기서 서화까지 하루 이틀. 열이틀이면 담 교림님이 오시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지?’
치이익―.
기름이 떨어지며 빨간 불꽃을 만들어 냈다.
***
“뭐, 뭐야, 저 노인?”
무묵은 자신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를 뱉고 말았다.
열이틀 동안 미행한 노인이 거대한 문을 향해 다가가 뭐라고 말을 건네자 위사들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문을 열어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무묵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뒤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문으로 들어가는 저 노인이 열이틀 동안 자신이 지켜본 그 노인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움직인 것 외엔 그 어떤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전서구를 날린 적도, 말을 섞는 사람도 없었다.
부지런히 걷다가 돈이 부족한 것처럼 망설이다 마차를 탔고, 강에선 좀 더 고민하다 사공과 길게 흥정한 뒤에야 배에 올라탄 것이다.
그런 노인이 공심회에서 높은 신분이다?
누가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슥슥.
무묵은 올라오는 소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의 양팔을 문질렀다.
‘저 노인은 자신을 평범하게 만드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그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 왔다는 뜻이야. 당신,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