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죄송합니다, 담 교림님.”
용연은 응아린을 보여 주려 힘을 썼으나 꼼짝도 하지 않자 머쓱해져서 사과부터 했다.
“안 빠져?”
“예. 이 녀석이 살에 달라붙었는지 떨어지질 않습니다.”
용연은 다시 한번 힘을 써 보다 이내 머리를 긁적였다.
“달라붙어?”
담영호는 손을 뻗어 응아린을 찬 용연의 팔목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용연의 말대로 응아린과 살갗이 붙어 있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담 교림님?”
용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찬 이후로 몸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일전에는 벽에 붙더니 이번엔 팔찌구나.”
“아…….”
용연은 담영호의 말에 안가에서 벽과 씨름하던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종 노야께서 사파의 마물을 전해 주셨을 리는 없고.’
용연이 멋쩍어서 고개를 돌린 그 짧은 순간, 담영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파의 무인들 중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힘을 얻기 위해 마물을 이용한다는 소릴 들을 기억이 난 까닭이다.
“검이나 도라면 없는 일도 아니지만…….”
“아!”
용연은 담영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탄성을 터트리며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응아린이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니 좀 더 지켜보자.”
말을 마친 담영호는 곧장 돌아섰고, 용연 역시 서둘러 주루를 나섰다.
***
[……(중략)……용 학림이 자리를 지켜 줘서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무묵 학림을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이번 일의 배경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어 연락이 오는 대로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여기까지는 임무에 대한 보고였고…….]
“음? 교림 되더니 그동안 수그러든 줄 알았던 버릇이 다시 나오는 건가?”
진류는 담영호가 보낸 서찰을 읽다 등을 의자에 기대며 턱을 쓰다듬었다.
서찰의 내용은 보고가 아니라 알고 있으라는 통보에 가깝게 읽혔기 때문이다.
“첫 임무니 일단은 끝까지.”
[용연이 종 노야로부터 응아린이라 부르는 팔찌 한 쌍을 받은 모양입니다. 무기는 선택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걸 보니 박투 쪽으로…….]
“응아린, 응아린…….”
끄덕끄덕.
진류는 이미 알고 있기에 혼잣말을 흘려 냈다.
[용 학림은 응아린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답지 않게 공격과 방어를 잘해냈습니다. 그런데…….]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진류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
“흘흘. 자넨 잘못 알고 있네, 진 대교. 내가 응아린을 용 학림에게 준 이유는, 응아린을 잘 사용해 줄 것 같아서 아닐세.”
종 노야는 내온 차를 진류의 잔에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은은한 향이 책의 퀴퀴한 냄새를 누르며 서고 안으로 퍼져 나갔다.
“종 노야, 매번 내주셔서 마시지만 여전히 차에 대해선 모르겠습니다.”
진류는 찻잔 가까이 코를 갖다 댔다가 심드렁하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차를 모르는 거야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진 대교?”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묻는 것도 아닌 묘한 말투가 종 노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류에게 특별히 문제될 말을 적어 보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고, 종 노야,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진류는 종 노야와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러나 종 노야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교림 서열 일위가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찾아왔네. 당연히 긴장해야지.”
“험. 험. 안부나 전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좋은 소식을 갖고 온 것도 아닙니다.”
진류는 헛기침을 터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들을 준비 됐네.”
종 노야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이것 참. 응아린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응아린?”
종 노야는 이채를 발하며 진류를 쳐다봤다.
응아린은 군림단에 속한 물건이 아니라서 더욱 의아해진 까닭이다.
“용 학림의 어디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왜 응아린을 그 녀석에게 줬는지 묻는 건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서찰에 썼듯이 무공도 약한 주제에 정만 많은 녀석이라 줬네. 그게 다일세.”
“그러니까요.”
“음?”
“도대체 뭘 보고 용 학림이 약하다 판단하신 겁니까? 학림 시험 때, 이전 기록을 갈아치운 사람이 어떻게 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록?”
“최단기간 학림이 된 사람입니다. 세신의 과정을 거친 직후, 몽외 선림의 공격을 열세 번이나 버틴 악바리이기도 하지요.”
“몽외 선림?”
종 노야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몽외인지 묻는 것이다.
“예. 얼마 전에 선림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흘흘. 잘됐군. 몽 교…… 아니지, 이제 몽 선림이라 불러야 하는군. 오지랖 좀 이제 그만 부리고 진득하니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군.”
처음으로 종 노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저도 그동안 ‘몽 교림’이라고 부르느라 얼마나 피해 다녔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 몽외 선림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인정했다는 뜻이군. 몽 선림의 인정이라. 흘흘. 그럼 틀림없겠지.”
“그렇죠?”
“하지만 나는 그 장소에 없지 않았나? 석 달 동안 딱 한 번, 그것도 떠나기 전날 산에 올라가 수련하고 내려온 녀석이란 말일세. 그래서 응아린을 줬네. 딱해서. 임무 수행에 나갔다가 죽을 것 같아서. 그게 다네.”
말을 마친 종 노야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오늘은 참으로 해괴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몽외의 소식을 듣질 않나, 이제 갓 학림이 된 용연이 약하지 않다는 말을 해 주기 위해 교림 서열 일위가 오질 않나.
몽외와 용연.
평생을 군림단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종 노야에게 정을 갖게 만든 둘이다.
히죽.
종 노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으셨어. 군림단에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는 분이 몽 선림과 용 학림 얘기를 듣고 웃으셨어.’
진류는 종 노야에 관해 찾아보고 왔다.
학림 시절부터 무공을 높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서 교림에 올라갔지만, 결국 벽을 넘지 못해 옷을 벗어야 했다.
익힌 무공과 세운 공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이어졌고, 한 사람의 이름이 더해졌다.
몽외 학림.
―종 교림 같은 분이 단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옷을 벗었어도 단원임을 긍지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학림의 신분으로 교림과 선림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결국 종 노야가 만승서고를 지키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 뒤로 네 개의 서고 주인들은 종 노야처럼 단원 시절에 공을 세웠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후 일상(一商)과 초원(草院)이란 두 개의 조직도 서고들처럼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믿습니다.”
진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을 담은 행동이었으나 종 노야가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믿지 않는군?”
“예? 방금 믿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흘. 진 대교, 응아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종 노야께서 교림 시절에 백 명을 상대했던 일이 있었는데, 응아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흘흘.”
종 노야가 갑자기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전혀. 한 가지만 빼곤 모두 맞는 말이네.”
“한 가지?”
진류의 눈이 커졌다.
기록된 내용과 다른 비사가 있다는 소리기 때문이다.
“진 대교의 말대로 당시 나는 백여 명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정신을 잃은 뒤였어.”
“예?”
“응아린이 내 진기를 빨아먹으며 그들을 상대한 거야. 잡혀먹힌 거지. 흘흘.”
“……!”
진류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청난 비밀을 들어 버린 탓이다.
“마물이야. 내가 왜 단원 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수련을 했는지 아나? 놈에게 먹이를, 진기 말이네. 그걸 주기 위해서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먹히니까. 결국은 그리됐지만.”
“그, 그런 마물을 왜!”
진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종 노야를 쳐다봤다.
갑자기 입이 바짝 말라왔다.
“내가 놈을 발견한 건 학림 때였으나, 놈이 나를 숙주로 인정한 건 교림 시험을 치른 뒤였어. 제 놈을 먹여 살릴 내공이 교림 정도는 돼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그 녀석에게 줬네. 숙주가 되려면 멀었다고 판단했으니까. 걱정이 되는 것 같으니 조만간 들르라고 하게. 면이야 서지 않겠지만 먹히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낫겠지.”
종 노야는 말을 마치곤 쓰게 웃었다.
용연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뿐인데 곤란하게 만든 모양이다.
“종 노야, 만약에 말입니다. 그 응아린이 이미 용 학림을 숙주로 삼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떼어 낼 방법은 있습니까?”
“숙주? 흘흘.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게.”
종 노야는 진류의 말을 듣자마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류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학림으로 오륙 년을 보낼 때 응아린을 손에 넣었다.
기물이라 확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중에 내공 증진을 위한 영약 복용도 있었다.
그러나 응아린은 영약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오 년여가 지났을 때, 그동안 먹어 온 영약들이 진기로 녹아들 무렵이 돼서야 응아린이 손목과 일체화되어 떨어지지 않게 됐다.
이제 갓 학림이 된 용연이 응아린과 일체화된다?
그것도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수련할 정도로 게으른 녀석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이라고 했잖습니까?”
진류는 답을 듣고 싶었다.
왠지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은 찜찜함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즉시 내공 수련을 멈춰야겠지. 그리고 놈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응아린에 주입됐던 전 사용자의 진기로 유인해 종 노야가 다시 가져오는 것.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기에 굳이 말하진 않았다.
***
―용 학림, 감숙 서화(西和)로 가시오. 안내할 사람을 붙여 놓도록 하겠소.
혼자서는 공심회 무인들과 부딪치지 않을 것과 담영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
구선이 용연에게 받아 낸 두 가지 약속이다.
용연은 서화의 대략적인 위치를 듣고서 곧바로 출발했다.
일호 등을 보낸 자가 그곳에 있다고 한다.
훨씬 더 강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 뜻이다.
혼자서 뭘 할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한번 당겨진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런 용연의 마음도 모르고 길은 멀기만 했다.
어느 정도 갔다 싶으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물어볼 사람부터 찾게 된다.
당연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삼 일이 지나 움직인 거리를 계산해 보니 전력을 달렸을 때, 하루 거리였다.
“사천과 감숙의 경계라. 후우…….”
용연이 답답한 마음을 실어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산 두어 개 넘었다고 공기가 달랐다.
북쪽이라 아직 추위가 남아 있었다.
하아―.
용연은 다시 한번 숨을 뱉으며 퍼져 나가는 입김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세워 달려온 길을 쳐다봤다.
하얗게 박힌 구름들과 퍼런 하늘, 그리고 굴곡이 한눈에 보이는 산맥과 강.
후임으로서 임무 수행에 참여한 일, 항상 뒤에서 지켜봐 준 담영호, 그리고 학림 시험을 치를 때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 준 기억나는 교림들.
여기까지 생각한 용연은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