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몇 달 전만 해도 무묵보다 아래 서열이었던 담영호가 교림이 되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후임이었던 용연은 학림이 돼서 홀로 임무를 수행 중이다.
담영호가 무묵보다 먼저 교림으로 올라가는 것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존칭을 쓰려니 쉽지가 않았다.
담영호 교림.
입에 붙으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오로지 능력 위주로 서열이 정해지는 군림단 내에선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처럼 단계를 뛰어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교림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던 몽외 교림이 선림으로 올라가시자마자 담 교림은 학림 선배들을 한 번에 건너뛰고 교림 시험 통과. 군림단주가 될 자격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지는 거 아냐?’
무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믿음이 살짝 금이 가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보다 내려진 명령을 실수 없이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묵의 신형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담영호의 고개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후…… 이것도 고역이네.”
씰룩.
담영호는 멋쩍게 웃었다.
불편함이야 편해질 때까지 부딪치면 그만이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선배로 불렸던 다른 학림들도 같은 생각일까?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에 할 일이다.
지금은 저 막사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 한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담영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정(康定), 의빈(宜賓), 도강언(都江堰), 수녕(遂寧). 네 곳에서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왔다. 하루 이틀 간격을 두고 들어온 요청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자신들의 문파가 당하면 그 일대는 끝이라는. 이미 다른 곳엔 단원을 보내 놓은 상태다. 용 학림은 의빈으로 보냈으니 담 교림 역시 그쪽으로 가라. 선후임이 학림과 교림이 되어 맡게 되는 첫 임무니 손발을 잘 맞춰 보도록.
―진류.]
진류는 대동소이라고 표현했지만, 담영호는 무묵과 함께 싸웠던 네 달 전의 임무를 떠올렸고, 더해서 형도준으로부터 일 년 가까이 군림단원들 주위를 맴도는 시선에 대해 들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단단해졌구나.”
담영호의 시선이 고영방 무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용연에게로 향했다.
후임일 때의 미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고영방의 부방주로 여겨지는 무인과 얘기를 하다 손을 들어 합하문의 진영을 가리켰다.
임무를 끝냈다고 여긴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
“다들 진정하시고 제 얘길 들어주시겠습니까?”
용연은 감패를 비롯해 많은 무인들이 오종인의 죽음을 보고 안도하자, 정색을 하고 분위기를 끊었다.
“모두 조용!”
감패가 짧고 굵게 명령을 내리자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제 생각엔 합하문에서 이번 싸움에 준비한 패는 저자가 끝이 아닐 것 같습니다.”
“패? 용연 학림, 지금 패라고 하셨소?”
감패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이틀 밤낮을 싸워서 얻어낸 승리가 오종인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날아갈 위기를 겪은 뒤였다. 당연히 용연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제가 왔잖습니까? 그러니 준비된 또 다른 패를 꺼내겠지요.”
“……?”
감패는 용연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저들, 그러니까 합하문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군림단을 노리는 누군가가요.”
“그, 그게 무슨…… 용연 학림, 합하문이 최근 들어 급하게 세를 넓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나 다른 중소 문파들을 상대할 정도요.”
“말씀드렸잖습니까. 합하문이 아니라 그들을 움직이는 누군가라고요.”
“……지금 그 말은, 합하문 뒤에 있는 누군가가 군림단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 고영방을 미끼로 썼다는 말이오?”
감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방주님, 합하문 진영에서 한 무리가 오, 오…… 날아오고 있습니다!”
고영방의 무인 중 한 명이 합하문 진영을 가리키며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용연은 다가오는 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감패를 돌아봤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용연 학림?”
감패는 다가오는 자들의 속도를 보고 용연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예?”
“포위하거나 도망치길 기다릴 수도 있으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십시오.”
용연은 감패에게 대답을 하고는 다가오는 자들과 오종인을 머릿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의미 없는 노력임을 깨달았다.
다가오는 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고 열을 맞추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오종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수들, 그것도 합공에 능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후우…….”
숨을 내쉬며 전개될 싸움을 예상해 봤다. 더 정확히는, 저들의 무공 정도와 상관없이 유리하게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다.
“또 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습니다!”
용연이 다가오는 십여 명의 인물들에 집중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고영방 무인이 소리쳤다.
용연의 시선이 다가오는 자들의 뒤쪽을 향했다.
먼저 움직인 자들과 비슷한 인원을 이끌고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 혼자서 막을 수 있는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뒤를 돌아봤다.
다가오는 자들 중 몇 명만 놓쳐도 고영방의 무인들은 엄청난 학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적의 숫자는 합쳐서 이십여 명쯤.
정황상 이곳을 몰살시킬 계획이라고 봐야 한다.
“감 부방주님…….”
용연은 주먹 쥔 손에 힘을 주며 감패를 부르려 했다.
그 순간.
“준비해.”
“……!”
쫘악!
용연의 뒷골에서부터 등까지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용연에겐 영원한 선임인 담영호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있다가는 다 죽어. 다른 문파 놈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우린 왜 그래야 되냐고? 이 나이 먹고 객사하기 싫어. 나 먼저 갈 테니 따라올 사람은 따라와.”
합하문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허름한 옷을 입고 겁먹은 표정을 한 노인이다.
노인은 연신 막사 쪽을 곁눈질하며 허리는 잔뜩 굽힌 채 발은 소리 나지 않게 뒤꿈치를 든 상태였다.
곧 벌어질 싸움 구경에 목을 빼고 있던 무인들은 노인의 말을 듣자 자신들의 상황이 어떤지 깨닫기 시작했다.
“이봐들, 저 노인네 말이 맞지 않아? 우리가 왜 여기서 싸움 구경을 해야 하는 거지?”
뼈에 살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깡마른 사내가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을 경멸하듯 쳐다보던 배불뚝이 사내가 비쩍 마른 체구의 사내에게 삿대질을 했다.
“뾰족이, 그러다 문주가 우리를 찾으면 어쩌려고 선동이야?”
“선동? 아하, 뚱땡이 너, 그 배로는 뛰어 봤자 안 될 것 같으니 그러는 거냐?”
“안 돼? 뭐가 안 돼? 뾰족이 너, 요 며칠 아주 기어오른다?”
“기어올라? 입은 살로 덮였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뚱땡아! 내가 너보다 합하문에 먼저 들어왔어. 누가 누구한테 기어오른다고 하는 건데?”
마른 사내가 성난 표정으로 배불뚝이 사내를 몰아세우자, 무인들은 슬금슬금 마른 사내에게로 붙기 시작했다.
평소 배불뚝이 사내의 처사에 다들 불만이 많았던 결과였다.
“이보게, 뾰족이, 저 배불뚝이를 저대로 두고 가면 문주에게 이를 거야. 확 죽여 버리고 조용히 빠져나가세. 어이, 다들 손 좀 보태자고.”
앞장서 움직이던 노인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마른 사내 편을 들었다.
순간, 마른 사내는 눈에 살기를 띠었다.
사람들은 마른 사내가 손을 쓰면 언제든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고 배불뚝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 이런 미친…… 흡!”
사내 하나가 달려들며 입을 막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세 명이 동시에 배불뚝이의 배를 칼로 쑤셨다.
우르르르―.
생각을 실천에 옮긴 자도, 그 과정을 모른 척 지켜봤던 자도, 모두가 공범이 되자, 다음 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둑에 구멍이 난 것처럼 상당한 숫자가 장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적당히 싸우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으면 도망친 뒤에 나를 찾아라.
일호에게 내린 명령이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부하들을 이런 곳에서 죽도록 놔둘 순 없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단기간에 오종인을 죽일 정도까지 성장시킨 저 후임을 군림단이 버린다?
절레절레.
학림 한 명이 아쉬울 군림단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저 후임을 살리기 위해 누굴 보내려나.’
합하문도들을 선동하는 것은 밥 먹기보다 쉽다.
이제 적당히 속도를 맞춰 움직이며 사천 땅을 떠나면 그만인데, 묘하게 저 후임이란 청년이 눈에 밟혔다.
놀랍다고 해야 하나, 대단한 자질이라고 해야 하나?
키우기로 작정을 했다고 해도 어떻게 네 달 만에 저런 성장을 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현 강호에서 군림단원을 제외하고 군림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일 것이다.
그런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헉! 저, 저런 속도는…… 교, 교림?’
묵 노야는 너무 놀라 움직이던 발까지 멈추며 용연이 있는 쪽 위를 쳐다봤다.
교림이 아니면 펼칠 수 없는 신법, 망량이 대낮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지잉―.
용연은 다가오는 적들을 쳐다보다 주먹을 말아 쥐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양쪽 팔목에서 대답하듯 기음을 흘려냈다.
“무슨 소리냐?”
담영호의 시선이 용연의 팔목으로 향했다.
주위로 퍼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기 때문이다.
“종 노야께선 쓸 일 없다며 제게 주신 물건입니다.”
용연은 자랑하듯 자신의 팔목을 부딪쳐 보였다.
“팔찌?”
“예. 응아린이라고 불렀답니다.”
‘응아린! 그 유명한 응아린을 종 노야께서 가지고 계셨다고?’
담영호 역시 응아린과 관련된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 군림단원 둘이 적의 함정에 빠져 고수 백여 명과 대치하게 됐는데, 한 단원이 다른 단원을 던져 주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던져진 단원은 다행히 교림과 만날 수 있었고 하루가 지나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료 단원의 시신을 수습하고 흔적을 쫓아 복수할 의도였는데, 그곳에는 황당하게도 동료가 하루 동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부딪쳤다 날아가 땅에 처박히는 것뿐이긴 해도, 의미 없는 손짓과 발짓이라고 해도, 그 동료는 살아 있었고 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나중에 치료를 하려고 보니 얼굴과 다리에만 상처를 입었을 뿐 탈진한 상태였다는 얘긴 전설처럼 단원들 사이에 떠돌았다.
그 응아린의 주인이 종 노야였던 것이다.
학림이라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용연이 담영호를 돌아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종 노야에게 조언을 얻으라고 보냈더니 밑천까지 털어 온 모양이다.
“뒤를 맡아 주마.”
텅―.
담영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연의 신형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귓가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용연은 다가오는 노인 한 명과 여덟 복면인을 빠르게 훑어봤다.
가장 앞에 노인을 중심으로 양쪽에 네 명씩 날개처럼 퍼져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공격이 시작될까?’
대열을 보고 용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