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부방주님!”
여러 개의 손이 감패의 등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감패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은 상태에서 자신의 앞에 내려서는 청년을 쳐다봤다.
“군림단 학림 용연입니다. 고영방의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감패 부방주님이십니까?”
용연은 손을 번갈아 가며 주억거린 후, 오종인과 반대편 진영을 슥 훑어보고서야 감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맞소, 내가 감패요.”
“자리 좀 물려 주시겠습니까?”
“저자를 혼자서 상대할…….”
“부하들을 더 잃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상의할 생각도 시간도 없으니 뒤로 물려 주세요.”
용연은 감패의 말을 자르며 냉정한 눈으로 돌아봤다.
꿀꺽.
감패는 용연의 눈빛을 보고 뭔가 말을 하려다 참아야 했다.
팔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조금 전에 팔을 매만지는 것을 봤다는.
입을 닫은 이유는 그런 말이 용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리 없음에도 용연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감패는 조용히 눈짓으로 부하들을 뒤로 물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물러나라.”
“다들 부방주님의 뒤로 이동!”
감패의 수족처럼 따르는 두 무인이 큰소리로 외치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어딜…….”
오종인이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며 물러서는 무인들을 향해 검을 뻗으려 했으나, 그 순간을 노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용연의 기세를 의식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저 사람만…… 음? 그러고 보니 왜 진즉에 보내지 않았던 거지?’
용연은 오종인의 뒤쪽에 있는 합하문 진영을 보고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고영방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했다면 오종인은 벌써 나섰어야 한다. 그런데 왜 상당한 숫자의 부하들이 죽은 뒤에 내보낸 것일까?
‘버리는 패? 아!’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용연의 머릿속에 결과가 떠올랐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끝나자 주변의 갖가지 이유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걸 토대로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종 노야가 상황을 제시하면 용연은 낼 수 있는 한에서 답을 찾아냈다.
그 세 달이 지금 빛을 발한 것이다.
새삼 감사해지는 종 노야였다.
합하문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싸움에 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금 전의 싸움은 합하문이 꺼내 든 첫 번째 패일 것이고, 오종인은 두 번째 패쯤 될 것 같다. 그렇다는 것은, 오종인 이후에도 또 다른 패를 꺼낼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한다.
“오종인 무인, 당신은 당신이 버려진 패라는 걸 알고 있소?”
용연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 무인? 지금 그 주둥이로 무인이라고 했냐? 어린놈의 새끼가 예의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주둥이를 놀리는 게냐!”
“무슨 말인지 모르는군. 그럼 어쩔 수 없고.”
용연은 오종인의 반응을 보고 끌어낼 정보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럴 때는 속전속결로 합하문 스스로 가진 패를 까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스읍―.
용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오종인의 자세를 눈에 담았다.
감패를 검으로 누르며 떨어질 때 오종인은 자신의 주먹을 왼손이 아닌 검신으로 막았다.
검을 잘 다룬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을 밀어낸 용연의 손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꿈틀.
용연의 호흡으로 몸 안의 장치가 열린 것처럼 반응을 했다. 머릿속에 만들어 둔 매우 단순한 장치를 가동한 것이다.
단전에 설치한 가로로 누운 수차가 서서히 회전을 시작하며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기둥 위로 진기를 올려 주었다.
기둥 삼 층의 날개에 진기가 실렸을 때,
“훕.”
용연은 짧게 숨을 토했다.
그러자 삼 층 날개에 올려졌던 진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닥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쫘악!
단전의 진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올랐고 그에 따라 수차의 회전은 이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로 인해 진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
용연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헉! 기세가 갑자기…….’
오종인은 용연의 기세가 확 달라지자 깜짝 놀라 다급히 진기를 끌어올리며 검을 세운 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용연의 주먹이 자신의 움직임보다 빨리 가슴을 노리고 뻗어 왔다.
쾅!
“큭!”
첫 번째 주먹은 오종인의 검신을 때려 양쪽 어깨를 무방비로 만들었다.
“어? 아, 안…….”
오종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주먹으로 때렸는데 왜 몸이 뒤가 아닌 앞으로 당겨지는가 말이다.
말을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묵직한 통증이 목소리를 안으로 잡아당겼다.
쾅!
“컵! 자, 잠깐…….”
오종인은 용연의 일격을 막다 찢어진 왼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은 채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댔다.
그만 때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오종인을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한 용연의 눈빛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쿵!
발로 땅을 찍어 누름과 동시에 왼손을 오종인의 좌측 하복부로 향했다.
퉁―.
들썩.
용연의 왼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오종인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내려섰다.
“아…….”
오종인은 검을 늘어뜨리며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는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상처도, 고통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땅이 일어나며 얼굴을 때린다.
퍽!
고꾸라진 것이다.
끄득!
오종인의 목이 꺾였다.
“우어…….”
지켜보고 있던 고영방의 무인 중 한 명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소리를 내자, 비슷한 소리가 신음처럼 좌우로 퍼져 나갔다.
***
“저, 저…….”
합하문 진영에서 웬 청년과 오종인의 대결을 지켜보던 반백의 육십 대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을 뻗어 앞쪽을 가리켰다.
머리에 쪽을 지고 가는 눈매와 매부리코, 얇은 입술에 뾰족한 턱엔 흰 수염이 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묵 노야?”
합하문주 여강은 묵 노야가 벌떡 일어나자 심장이 아플 정도로 놀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참여한 계획이었다.
각오를 하게 만든 사람은 공심회란 조직의 주요 직책에 있다는 갈성이란 자였다.
사천성에 지부를 두고 싶어 돌아다니다 합하문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여강은 황당해지고 말았다.
연합이 아니라 지부로 합하문을 사용하고 싶다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절했으나, 갈성의 무공은 여강이 말을 번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죽을래, 지부장이 되어 따를래?
갈성의 한마디에 여강은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공심회의 지부가 되어 주변 일대의 문파들을 흡수해 갔다. 물론 모든 싸움은 갈성의 부하들이 했고 여강은 망한 문파의 무인들을 전리품처럼 챙겼다.
그런 갈성이 저 묵 노야란 노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저분이 누구시기에…….
여강은 호기심에 물었을 뿐인데 갈성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진지하게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계획을 만든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합하문을 공심회의 지부로 만든 것도, 일대의 문파들을 복속시켜 세를 키운 것도, 그리고 오늘 고영방과의 싸움도.
‘왜, 왜 놀라는 거지? 어린놈 하나 끼어든 것뿐인데, 저 갈 대협의 부하 몇 명만 나서면 죽일 수 있는 놈인데 왜…….’
여강으로서는 묵 노야의 행동이 충분히 겁났다.
“묵 노야, 어차피 끌어들이기로 했던 군림단인데 왜 그리 놀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갈성은 여강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나섰다.
“갈 대주, 이곳에 공심회에서 데려온 인원이 몇이지?”
묵 노야는 갈성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저까지 해서 열세 명이 와 있습니다. 나설까요?”
“열셋.”
묵 노야는 갈성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로 군림단 학림이라 밝힌 청년은 서너 달 전에 자신이 쫓아갔던 애송이가 분명했다.
‘느낌이 아주 더러워. 그때, 형도준 교림을 발견했을 때 바로 숨었어야 했어. 료, 그년 때문에 기어코 탈이 나고야 마는구나.’
묵 노야는 급히 막사 끝으로 가 좌우를 살폈다. 그러고는 막사 반대편으로 가 다시 좌우를 살폈다.
군림단의 후임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근처에 선임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선임이란 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천천히 돌아서서 막사 안에 있는 갈성과 여강을 쳐다봤다.
이들 둘과 공심회 무인들을 모두 투입시킨다면?
묵 노야는 빠르게 학림 한 명일 때와 둘일 때를 놓고 비교해 보았다.
학림이 한 명이라면 막을 수 있으나, 둘이라면 자신의 부하들까지 투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오종인을 죽인 저 후임은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일호, 들어와라.”
묵 노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면인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갈 대주, 계획을 수정하겠네.”
묵 노야의 시선이 이번엔 갈성을 향했다.
“예? 며칠 내로 다른 대주들과 연락을 취해서 네 곳에서 동시에 군림단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만들자고 하셨잖습니까? 이미 회주님께도 보고가 된 사항이라 갑자기 바꾸시면 곤란합니다.”
갈성은 묵 노야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슥.
듣고 있던 일호가 갈성을 향해 몸을 돌리자, 묵 노야가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갈 대주, 계획은 언제든 바꿀 수 있어야 하네.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해서 무산되거나 틀어진다면 그건 내 계획이 아닐세.”
묵 노야의 말을 듣고서도 갈성은 불편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미 일호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순간 빈정 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도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일호, 주위를 살피고 오너라. 아, 복면은 벗고 움직여야지.”
묵 노야는 밖으로 나가는 일호를 불러 세웠다.
슥―.
일호는 망설임 없이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막사 안의 모든 시선이 놀란 표정으로 일호의 얼굴에 고정됐다.
키만 조금 더 큰 묵 노야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호가 돌아와 구호까지 모두 데리고 저 학림이란 자를 처리할 테니, 갈 대주와 여 문주는 다른 학림이 오면 맡아 주시오. 잊지 말아야 할 건, 무조건 둘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거요.”
현재의 전력으로는 군림단원 한 명은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림단원 둘을 상대해야 한다면 턱도 없이 모자란 전력일 뿐이다.
묵 노야는 군림단원 둘이 함께 있으면 같은 전력을 가진 셋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아무것도 몰라야 저 후임이나 학림 한 명을 죽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이곳을 벗어나 있을 것이다.
***
“움직인다. 무 학림, 쫓아가.”
“예, 담 교림.”
무묵은 담영호의 짧은 명령에 바로 일어나 지켜보던 막사 뒤쪽의 숲으로 움직였다.
힐끗.
자리를 벗어나기 전 무묵은 뒤를 돌아봤다.
앞쪽을 바라보고 있는 담영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 진영 중 한 곳인지, 양쪽 모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용 학림이 걱정되는 건가?’
피식.
무묵은 고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