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헉! 서, 설마 종 노야가 교림 시절에 사용했던 응아린(凝牙鱗)을?”
진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 노야가 군림단원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 많은 단원들이 안타까워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종일회 교림은 끝내 그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 있었다면 다음을 시도해 볼 수 있었을지도…….
종 노야와 비슷한 연배의 선림 중 한 분이 응아린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글이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단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응아린을 찾았지만, 결국은 누구도 얻었다는 소릴 듣지 못했다.
“벽에 가로막힌 그 선림의 입장이야 이해되지만, 단의 물건도 아닌 걸 욕심낸 건 과하지. 그런 물건을 종 노야가 단에 기부할 리도 없고. 후후후.”
진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자신 역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은 곳을 뒤지고 다닌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을 용연에게 주었다?
“용 학림은 권장박투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은근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학림이 서고를 거치고 나면 원하는 무공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데, 그중에는 현재 단원이 익히고 있는 무공도 포함된다.
내심 백지선검을 선택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구나, 용 학림. 담 교림을 많이 따라서 당연히 륜이나 비슷한 무기를 택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진류는 용연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생각 많은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용 학림의 선택을 자신이 돕게 해 달라…….”
진류의 입에서 다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교림 시험에 통과하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담영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후임이나 선임이나 예측이 안 되는 두 사람이었다.
“담 교림, 단원들이 뭐라는 줄 아나? 자네가 교림 시험을 본 이유가 후임인 용 학림 때문이라고 말들이 많아. 뭐, 그렇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다는 쪽이지만. 후후후.”
진류는 담영호의 무덤덤한 얼굴을 떠올리곤 웃었다.
언제든 교림으로 올라갈 준비를 마친 학림.
이보다 더 진류를 흐뭇하게 만드는 후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학림들과 교림들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불만 있으면, 학림들은 교림부터 되고, 교림들은 본인 자리부터 지킬 생각하라고.
학림 때야 시키는 임무에 치여서 다른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지난 몇 십 년 동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군림단이 잘 돌아갔다. 오 년 전의 다섯 학림이 죽은 사건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군림단에 선임과 후임이었던 두 괴짜들이 묘한 기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진류로선 두 손 들어 환영하고 싶은 아주 고무적인 기류가.
***
쉭―.
칼이 허공을 베며 지나가고,
캉!
쇳소리가 주위로 퍼지고,
“저길 도와!”
누군가가 외치자 숨을 헐떡이던 사람들은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올리며 달려갔다.
그럼 그 뒤를 또 다른 무리가 덮친다.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무인은 보이지 않는 상황.
동공만 좌우로 번갈아 움직이며 혼전의 양상을 지켜보던 시선의 주인이 위쪽을 쳐다봤다.
힐끗.
단이 높게 쌓인 곳 위에서 쉴 새 없이 부하들을 지휘하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보인다.
‘대단하다. 저 정도 전력으로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적의 공격을 막아 내네.’
철혈사자맹 지원조의 경험이 있는 용연이기에 저 중년인의 통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수신호를 보고 단 아래에 있는 부하들은 분주하게 사방으로 중년인의 의도를 전한다.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뒤로 물러서 있는 한 명이 수신호를 전해 준다.
좁은 공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삼 인 일 조의 틀을 유지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숙련된 무인들이란 뜻이기도 한 것이다.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진 곳에서 왜 단에 도움을 청한 거지?’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던 시선의 주인, 용연은 첫 임무가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아 멋쩍게 웃고 말았다.
―와아아아아!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이 지휘하는 쪽의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세 배 가까운 공세를 막아 낸 것이다.
용연이 보기엔 당연한 일이었다.
‘응? 같은 편을 왜…….’
흐뭇하게 군림단에 요청한 쪽의 무인들을 보다 용연은 이채를 발했다.
함성을 지르던 무인 한 명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옆의 무인들은 단 위의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뭐하는 거냐!”
환호를 받던 중년인이 갑자기 용연이 지켜보고 있던 곳을 가리키며 큰소리를 냈다.
그러자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무인들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일인지 살폈다.
“크아악!”
중년인의 외침에 함성을 멈춘 무인들의 귀로 비명이 파고들었다. 바로 주위의 무인들이 물러나며 무슨 상황인지 드러났다.
“누구냐! 감히!”
중년인의 매서운 눈에서 안광이 쏟아지며 내공 실린 호통이 이어졌다.
“짜증 나는군. 세 배가 넘는 인원을 데리고 오고도 져? 여 문주에게 전해라. 약속한 금액의 세 배를 준비하라고.”
사내 하나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죽인 자의 등에서 검을 뽑아 들더니 반대편 진영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반대편 진영의 깃발이 올라갔다.
사내의 말대로 하겠다는 신호였다.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본 사내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단 위에 서 있는 중년인을 돌아봤다.
머리칼이 이마에 두른 건을 덮고 있어 사내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영방 부방주 감패, 나는 오종인이다.”
슥.
이름을 밝힌 사내가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오종인?”
감패라 불린 중년인은 사내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전광검(戰狂劍) 오종인.
사천, 섬서, 호남, 세 지역에서 살인광으로 악명을 떨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거였나? 합하문주 여강이 방주님께 후회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중년인은 오종인에게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오종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파팟.
오종인의 손에서 얇은 선이 빠져나왔다 싶은 순간 가까이 있던 두 무인이 팔과 다리를 잃고 쓰러졌다.
“감패, 머리 굴려 봐야 부하만 잃어. 내려와서 깔끔하게 내 손에 뒈지든가, 방주에게 합하문 밑으로 들어가라고 해. 어때?”
까딱. 까딱.
오종인은 여유롭게 손에 든 검을 건들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고영방의 무인들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흐흐흐. 안 되지.”
슷.
오종인이 다시 움직이며 물러서는 무인들 대여섯 명의 몸을 난자해 버렸다.
장내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오종인의 잔인한 손속에 몸들이 얼어 버린 것이다.
용연은 감패를 쳐다봤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군림단의 요청을 바란다는, 이 자리에 있다면 나서 달라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외연 향주 구선으로부터 들었던 당부 때문에 용연은 참아야 했다.
―용 학림, 학림들이 첫 임무 때 무슨 실수를 가장 많이 하는 줄 아시오? 바로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해결을 하려 한다는 것이오.
구선이 고영방과 합하문의 정보를 전해 주며 해 준 조언이었다.
최근 들어 합하문이란 문파에서 외부의 고수들을 마구 영입하며 주변 문파들과 잦은 충돌을 빚고 있는데, 복속시킨 문파가 넷이고 흡수한 인원만 원래 인원의 스무 배가 넘는다고 한다.
그 덩치를 믿고 지역 강자인 고영방의 영역까지 넘보다 크게 혼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오종인의 등장으로 고영방이 도움을 청할 차례가 됐다.
“부방주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단 아래에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분을 참지 못하고 감패를 쳐다봤다.
“오종인! 고영방과 합하문의 일에 네가 왜 끼어드는 것이냐!”
감패는 눈을 부릅뜨며 난간으로 쳐 둔 나무를 힘껏 쥐었다.
“왜? 이깟 허수아비 같은 것들 몇 놈 베면 몇 년은 실컷 놀고먹어도 되는데 그런 걸 왜 안 해?”
오종인이 감패를 놀리듯 쳐다보며 웃었다.
“갈!”
“부하들이 죽는 게 가슴 아파? 그럼 네가 와. 그 위에서 부하들 죽는 거 보고 있지 말고. 엉? 흐흐흐.”
“오종인! 군림단이 왔을 때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감패가 모욕감에 떨고 있는 순간, 단 아래에 있던 무인 한 명이 오종인을 향해 소리쳤다.
“아아, 얘기는 들었다. 여기 사천 땅에서 주인 행세한다는 자들? 이거 곤란한데…….”
오종인은 군림단 생각을 못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표정이 확 밝아져서 반대편 진영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군림단원까지 처리해 주는 데 열 배! 아니면 나는 여기까지 하고 빠진다. 흐흐흐.”
반대편 진영에서 바로 깃발을 올렸다.
오종인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 모습에 오종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바로 수락하겠다고? 썅, 이럴 줄 알았으면 스무 배를 부르는 건데…….”
합하문의 반응이 너무 빨라서 조금 더 부르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긴 아직 일렀다.
합하문의 지불 의사를 확인한 이상, 다른 쪽에서 똥줄 타게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거추장스러운 허접들부터 쳐 내야 했다.
검을 고쳐 쥐고 위를 올려다봤다.
감패가 여전히 분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아까부터 그 얼굴, 아주 재수 없어.”
쉬쉬쉭―.
오종인은 겁먹은 무인 한 명의 어깨를 밟고서 단 위에 있는 감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끄그긍―.
“큭.”
감패는 다급히 꺼내 든 도로 오종인의 검을 막았으나 단과 함께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몸을 가누기 위해 내공을 발에 집중했지만, 오종인의 힘을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투칵―!
단이 터져 나가며 감패는 오종인의 검을 막은 채로 떨어져 내렸다.
‘고작 이런 살인귀에게…….’
감패는 이대로 죽음을 예감했다.
―부방주, 최근 다른 지역의 신진 세력들 움직임이 무척 활발하다고 하네.
―신진 세력들이라니요, 방주님?
―강호삼대세력에 속하지 않은 문파들이 은밀히 교류를 가지며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는군. 합하문주 여강이 그들 중 몇몇과 만났다는 소문을 지인에게서 들었으니 이번 싸움은 신중하게 임해야 하네. 군림단이 사람을 보내 준다고 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지만…….
고영방주 완경의 당부였다.
합하문의 공격을 삼분지일의 전력으로 막아 냈다는 사실에 고무됐던 것 같다.
합하문과 신진 세력들, 그리고 오종인.
셋을 연관 지어 한 번만 생각했어도 지금처럼 허무한 죽음을 떠올리진 않을 텐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막 고개가 옆으로 돌려질 때였다.
희끗한 그림자가 솟구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냐!”
오종인의 다급한 외침이 터지고,
쾅!
훅―.
풍압이 감패의 얼굴에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