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이선 암중인’은 귀계(鬼計)나 신산(神算)의 호칭까지는 얻지 못한 한 책략가의 잡스러운 한탄집이다.
한 걸음 뒤에 선 자와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자의 얘기가 주를 이룬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들만 봤어도, 그들의 정체만 알았어도, 그들이 자신을 내버려 뒀어도.
마지막까지 그들이 누군지는 책에 밝히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옳았다.
아무튼, 용연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고, 결과도 마음에 들었다.
놀이를 조금 더 이어 간 이유였다.
첫 질문인 착각하며 사는 자에 이어, 우쭐해서 사는 자, 오로지 살인만을 추구하는 자, 대인의 길을 실천하는 군자 등.
종 노야는 상황을 제시했고 용연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서 답을 냈다.
“밥을 혼자 먹긴 싫지만 보낼 놈은 보내야지.”
종 노야의 입에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밥 떠먹는 방법을 알려 줬으니 그걸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한 것이다.
이제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된다.
***
힐끗.
용연은 서고로 꺾어지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종 노야를 돌아봤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달라 보인 까닭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돌아가서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그동안 쌓아 올린 층들을 자신만의 체계로 정립해 둬야 한다.
서고로 들어서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낮은 층들을 한 층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오 층까지 올린 분야를 칠 층까지 끌어올리는 것.
어느 쪽이 나은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군림단원으로서 최우선 과제는 군림단주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둑은 성곽과 달리 물의 무게를 견뎌야 해. 가뭄일 때와 홍수 때가 다를 테니까. 홍수 때를 기준으로 쌓으면 큰 낭비를 하는 것이고, 가뭄은 그 반대지. 어떤 것이 현명하게 둑을 쌓는 것인가…….”
입으로는 토목건축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무공, 그중에서도 진기의 유동을 상상했다.
무인의 몸 안에 담긴 진기를 둑에 갇힌 물로 비유함으로써 막혔던 부분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다.
슥슥― 톡톡.
용연은 바닥에 네모난 도형을 그리고 선의 중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정확히 같은 크기와 기울기라면 몰라도 물은 흐를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굳이 네 방향을 일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고…….”
용연은 바닥을 두드렸던 손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다른 손을 올려 공간을 만들었다.
적당한 높이가 되자 이번엔 바닥에 댔던 손을 들어 같은 간격의 높이를 유지하며 위에 올렸다.
“중간에 계단이나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탑을 세워 놓으면 물을 끌어 올리는 힘만으로도 충분히 쌓인 물을 움직일 수 있겠는데? 탑에 수차(水車)의 원리를 가미하면…….”
용연은 수평으로 올렸던 손바닥을 세워 시간차를 두고 한 방향으로 회전을 시켰다.
일 층의 회전이 물을 끌어올리자 올라간 물이 떨어지며 이층의 손바닥을 움직인다. 그 힘으로 다시 삼층의 손바닥을 회전시킨다.
일련의 과정이 머릿속에 모두 그려졌다.
“바닥의 흔들림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쉬워지겠네. 그리고 더 높은 층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가만, 가만…… 올라간 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정해 놓지 않은 꼭대기 층을 떠올리자 불쑥,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꼭대기에 끈이나 사슬을 달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당기든 내려놓든 원하는 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갑자기 이 원리를 몸속의 진기에 적용시켜 보고 싶어졌다.
“물을 단전에 쌓인 진기처럼 생각하면 수차의 역할을 해 줄 심법……이 아니어도…….”
용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표정이 되어 양손을 들어 뒷목에 댔다.
머릿속은 하얘졌고 목부터 등까지 소름이 돋았다.
닿은 곳을 밀착시켜 주고[際], 내뻗은 힘을 온전히 전해 주며[制],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 있게[提] 해 주는 것.
삼제의 원리를 발현시키기 위한 순서다.
내뻗은 힘을 수차에 싣기만 하면 영락없는 삼제의 변형 원리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탁탁.
일단 목을 두드려 정신을 차리고 땔감을 구해 오던 숲으로 달려갔다.
***
텅― 텅―.
종 노야는 안쪽 서고를 눈으로 정리하며 책들의 위치를 파악해 들고 있는 종이에 적어 가다 벌써 한 시진 가까이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음? 저 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잉? 기본삼공?”
종 노야는 잘못 들었다 여기고 조금 더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끔뻑끔뻑.
주름 가득한 눈이 몇 번이나 감겼다 떠졌다.
“그런 주제에 밥하고 책만 보고 지냈다고?”
종 노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개의 학림들은 기본삼공을 숙련시키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한결같이 여유가 없었다.
임무 수행 중 죽지 않으려면 당연한 것이다.
“찾고자 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뭘 찾아야 하는지 몰랐다는 건가? 허허.”
종 노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용연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동안 건넸던 질문들을 줄줄이 엮어 빼내 오고 싶은 심정이 됐다.
부르르.
첫 질문에 답하던 용연의 말이 떠오르자 저절로 창피함에 몸서리를 쳤다.
생각을 떨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종 노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갔다.
불을 지피고 밥을 하고 야채를 볶고 나뭇가지에 돼지고기를 꿰어 구웠다.
터덩― 터엉―.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졌다.
“아서라. 응용 같은 건 완전히 네 것을 만들고 하는 거야.”
절레절레.
종 노야는 열심히 손을 놀리면서 혼잣말을 꺼냈다.
밥을 푸고 센 불에 빠르게 익힌 야채와 구운 돼지고기의 두툼한 살점 하나를 잘라 그릇에 담았다.
몇 십 년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종 노야, 이렇게 늦은 줄 몰랐습니다.”
용연은 뒷마당으로 들어오다 종 노야를 발견하고 인사부터 건넸으나 종 노야는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종 노야?”
“와서 밥부터 먹어라.”
종 노야는 손만 들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꼬르륵―.
음식 냄새를 맡자 용연의 위장이 난리를 쳤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용연은 인사를 하자마자 밥그릇을 들어 야채볶음을 올리고 한입 가득 넣은 후, 돼지고기도 한입 가득 베어 문 후 오물거렸다.
“읍! 읍!”
용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맛있다고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종 노야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말을 시작했다.
“처음 해 준 밥인데 잘도 먹는구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단에서 지원해 주는 서고는 여기, 서쪽의 묵중서고, 북쪽의 지안서고, 남쪽의 선연서고, 이렇게 네 곳이다. 놀리는 게 아까우니 학림 시험에 통과한 단원은 일 년 안에 네 곳 중 한 곳을 정해 한 달 이상 지내야 한다. 규정이지. 대개는 한 달도 못 버티고 임무 수행 좀 보내 달라고 사정한다. 책 좋아 하는 녀석들도 종종 오긴 하는데…… 너처럼 세 달 동안 붙어 있던 적은 없지. 내버려 두면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지낼 것 같아 데려가라고 연락했다.”
“아…….”
용연은 밥그릇을 내려놓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규정이 있다는 얘길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흘흘.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얘기 아니니 끝까지 들어.”
“예.”
“나야 때 돼서 밥이나 차려 주면 그만이지만 너는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모른 척 내버려 뒀다가는 황당한 걸 창안이랍시고 할 것 같아서 보내기로 했다.”
“……?”
“기관토목.”
“…….”
용연은 여전히 종 노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기관토목은 설계대로 만들면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네가 익히는 건 무공이야. 기관토목이 아니라 무공이라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지 알겠냐?”
“기관토목과 무공이 다르다는 말씀이잖습니까?”
“다르지. 그런데, 그걸 아는 놈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
“제가 뭘 했습니까, 종 노야?”
용연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읽는 건 기관토목 관련 책인데, 석 달 만에 하는 수련은 기본삼공이니 하는 말이다. 둘은 섞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아!”
절로 용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뒤쪽 숲에서 수십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내려온 터라 종 노야의 한마디가 준 충격은 엄청났다.
“지난 석 달 동안 네놈이 해 준 밥을 먹은 것과 더 오랜 시간 내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 것. 같을 리가 없지? 다른 거야. 내가 네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거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모르지만. 아무튼, 그동안 잘 얻어먹었다. 흘흘.”
종 노야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섞지 말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라…….’
용연은 조금 전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구조물을 짓는 방법을 배우거나, 무공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이거나.
그동안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던 수많은 글들이 싹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용연은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아! 깜빡할 뻔했다. 네놈과 내가 서 있는 간격을 두고 은신해 있던 자가 나타났다. 어쩔 테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사방이 뻥 뚫린 곳을 찾을 겁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은신이 보호색인 살수를 만났으니 용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한다.
“호오, 그 전에 당할 수도 있잖느냐?”
“안 당합니다.”
“흘흘. 그럼 한 명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고 하자.”
“한두 번 찔리거나 베이더라도 다른 선배를 만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죠. 그럴 자신은 있습니다.”
“찔리거나 베이더라도…… 그런 각오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모르는구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책을 주는 것보다 설명을 해 주는 편이 낫겠다.”
‘각오를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용연은 종 노야의 미간 주름이 깊게 파이자 절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빛이 반사되는 동공이나 손과 발의 살갗 위치다. 그래야 숨어 있는 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그들보다 반 호흡 빨리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린다면 네가 찔리거나 베일 일은 없게 된다는 뜻이다.”
‘반사되는 빛과 움직이려는 방향.’
용연은 종 노야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상상해 봤다.
찔리거나 베인 후의 자신과 멀쩡한 상태로 달리는 자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조언이다.
‘떠나는 순간까지 선물을 주시는구나.’
용연은 종 노야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포권을 취한 채 허리를 펴지 않았다.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다 천천히 허릴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에 해를 봤던 위치에 달이 차올라 있었다.
***
[진 대교, 이번에 보낸 녀석은 어찌 된 건지 무공 수련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책만 읽는군. 아침과 저녁에는 밥을 해 놓지 않나, 물어보는 말에 며칠씩 고민해서 답을 내놓지를 않나…….]
“책을 읽는다고?”
진류는 만승서고 종 노야가 보낸 서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임이었던 담영호는 용연이 네 달 만에 학림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했고, 몽외는 학림 시험장에서 용연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런 용연이 만승서고에 가서 책만 읽는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밥값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몰라서 낡은 보호구 하나 건네니 모른 척해 주게. 아마도 진 대교가 아는 그 물건일 걸세.
―만승서고 종 늙은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