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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40화 (40/232)

40화

―자네처럼 똑똑한 친구는 고민이 많으면 안 돼.

학림 시험에 합격하고 만승서고에서 지낼 때 들었던 말이다.

엄청나게 많은 책 중에 뭘 봐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담영호에게, 서고를 맡고 있는 종 노야가 다가와 몇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담영호가 왜 기본삼공을 완벽하게 익혀야 하는지 알게 해 준 책들이다.

그 시간이 현재의 담영호를 만들어 주었다.

용연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용연이 만승서고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서 서고 뒤쪽에 있는 숲으로 올라가 땔감을 주워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적당한 두께로 쪼갠 장작은 한쪽에 쌓아 두고 창고로 들어가 밥과 볶음 몇 가지를 빠르게 만든 후 만승서고의 주인인 종 노야를 부른다.

“종 노야,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나오세요.”

방에서 기척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식탁으로 가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종 노야와는 거의 대화가 없다.

뭘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용연도 며칠이 지난 후로는 책 위치 외엔 묻지 않았다.

“오늘은 기관토목 쪽의 책을 보려고…….”

용연이 젓가락을 놓으며 말을 꺼내자마자 종 노야는 낡은 소매를 들어 올리며 손가락 하나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들어가서 오른쪽이라고요?”

끄덕.

종 노야는 입을 오물거리며 소매로 허공을 치듯 흔들었다.

“한 번 더 오른쪽으로 꺾으라는 거죠?”

끄덕.

고갯짓이 종 노야에게 나온 반응의 전부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용연은 종 노야의 반응을 전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물. 오물.

종 노야는 용연이 서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남이 보면 네놈이 주인인 줄 알겠다. 이러다 학림들이 알아서 밥해 먹고 지내야 하는 곳인 줄 아는 거 아니야? 내가 한 게 더 맛있는데. 쯥.”

종 노야는 혼잣말을 하다 튄 밥풀이 흰 수염에 붙자 떼어내 다시 입안에 털어 넣으며 툴툴댔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림을 받았지만 저런 놈은 처음이었다.

만승서고에 처음 온 학림 열에 아홉은 종 노야에게 할 일을 묻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지시를 받으려고 하지, 용연처럼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종 노야를 황당하면서도 눈여겨보게 만든 행동은, 아침과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꼭 자신의 몫도 차린다는 것이다.

“기특한 놈이지.”

심통을 담아 혼잣말을 했으나, 옆으로 새어 나오려는 밥풀을 손으로 밀어 넣는 건 잊지 않았다.

종 노야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깊어졌다 펴지길 몇 번인가 반복하자 밥그릇이 싹 비워졌다.

종 노야는 천천히 일어나 토굴처럼 어두운 서고 안을 쳐다봤다.

용연이 벌써 자리를 잡았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촤락―.

용연은 종 노야가 알려 준 서고의 위치를 눈으로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잡다하게 쌓인 책을 툭툭, 건드려 먼지를 턴 후, 늘어진 발을 올려 끈으로 묶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다 멈춰 섰다.

이미 해가 떴는데도 입구 외엔 빛이 들어서는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안쪽에 희미한 불빛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 노야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곧장 조금 전에 확인해 둔 서고로 향했다.

“두껍긴 해도 상상을 할 수 있으니 좋네.”

며칠 동안 살펴본 서고들의 특징은, 용연처럼 군림단원을 위한 공간과 일반인들을 위한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용연이 찾은 서가에는 기관토목과 관련된 책들이 빼곡했다.

[본신강서(本身講書)]

기관토목과는 무관해 보이는 책을 꺼냈다.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가까이 됐다.

슷―.

선 채로 책장을 넘겼다.

[……(중략)……해서,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선 훨씬 더 복잡한 사람의 몸부터 이해를 해야 한다. 먼저…….]

용연은 첫 구절을 읽자마자 그대로 빠져들어 한참 동안을 책장만 넘겼다.

이어진 내용은, 몸이 불편해지면 어떤 증상이 일어나고 그 시작점은 어디인지 파악하는 순서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책에는 총 서른여섯 개의 시작점만 적혀 있었는데, 가장 간략한 개수이고 실제로는 몇 백에서 몇 천 개까지도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끄덕끄덕.

이해가 되는 부분은 빠르게 넘기고,

갸웃.

어려운 부분은 느리지만 몸을 만져보며 이해를 도와 갔다.

탁.

책을 덮었다.

“후우…….”

책의 반이 몸에 대한 설명이다.

일단 쉬기로 하며 몸을 틀다 서고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입구 쪽을 쳐다봤다.

환한 빛이 눈 한가득 덮쳐 왔다.

“윽.”

[눈이 아린 이유는…….]

용연은 눈을 감은 채 방금 읽은 책 내용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며칠 동안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책을 들어 나머지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어진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인체와 구조물을 예로 들어 몸의 이해를 심화시켜 주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용연은 빠르게 읽어 내려가면서도 내용들이 머릿속에 박혀드는 것 같아 눈을 감지 못했다.

탁.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글은 알았어도 책을 가까이 할 기회는 적었다.

어려운 책은 어려운 대로, 쉬운 책은 쉬운 대로, 그리고 지금처럼 자신의 수준에 딱 맞는 책은 그것대로 마구마구 머릿속에 담았다.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내용이 복잡하면 상상에 의존해서 이해하려 했고, 그마저도 힘이 들면 일단 끝까지 읽는 것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주 작은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느껴지기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을 잇고, 거기에 내일 이어 갈 생각을 떠올려 세 가지를 엮었다.

그렇게 쌓인 생각은 단단해져서 기초가 되고 조금 더 높게, 한 층 더 쌓아도 될 것 같은 믿음을 주었다.

가장 넓은 아래층 위로 자세해진 위층이, 조금 더 자세한 층은 좁게 하나 더.

그렇게 세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노력해야 하는 분야와 유독 관심이 가는 분야의 층수가 달라졌다.

공부한 시간은 비슷해도 다른 분야는 삼층 정도에 머무는 반면, 무공이론과 몸에 대한 이해가 담긴 분야는 무려 오층에서 칠층까지 올리게 됐다.

“자, 이제는 담을 만큼 담았으니 정리를 해 보자.”

용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상 끝에 앉아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세 달이나 지났다.

종 노야는 종종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 외엔 거의 말이 없었다.

용연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려니 생각하고 중간 점검을 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우겨 넣고 두들겨 넣어 틈을 채운 지식들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흔들어줄 필요가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습관처럼 숲으로 가 땔감을 주워 왔고 불을 지펴 밥과 무쇠 판을 달궜다.

치이익―.

돼지껍질로 판을 문댄 후 연기가 피어오르면 질긴 야채들을 하나씩 올려놓고 물기가 나올 때를 기다린다.

뒤집고, 길게 자른 돼지고기를 그 위에 올려 놓고 만두 싸듯이 감싸 준다.

반대로 뒤집어 주고 다시 한번 더, 한 번 더.

오래 구울 필요는 없다.

거뭇거뭇하게 야채가 탄 흔적을 내비치면 옆에다 내려놓고 다시 한번 야채를 올린다. 이렇게 세 겹 정도가 되면 소금과 누린내 잡는 향신 가루를 뿌려 열기와 함께 향이 고기에 배도록 둔다.

“종 노야, 식사 준비 끝났어요!”

익숙해져서 이젠 마당에서 부르면 알아서 나오신다.

불을 끄고 먹기 좋게 잘라서 무쇠 판 끄트머리에 두었다.

밥을 푸고 한 점씩 올려 젓가락으로 밥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운다.

“우어…….”

용연은 자신이 만든 요리에 감탄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종 노야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종 노야는 용연과 달리 야채를 벌려 고기만 밥에 얹어 입에 넣었다.

야채가 질겨서 씹기 힘들기 때문이다.

“……음.”

우걱우걱.

보드라운 육질과 쫄깃한 밥알을 입 한가득 넣으며 신음까지 뱉었다.

매달 용연의 늘어 가는 요리 솜씨에 감탄을 하지만 오늘은 신음을 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었다.

그것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갑자기 먹던 젓가락을 네게 던지면 어쩔 거냐?”

“종 노야,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용연은 종 노야의 반응에 활짝 웃으며 반문했다.

그런 용연을 종 노야는 아직 떼지 않은 눈곱이 남아 있는 눈으로 쳐다봤다.

빨리 대답이나 하라는 신호다.

“막아야지요. 몇 달 동안 봐 온 옆집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근데 이번엔 어떤 경우예요? 할아버지가 무공을 사용할 줄 아세요, 모르세요?”

“당연히 고수지!”

종 노야가 눈을 부라린다.

“에이, 그럼 물을 것도 없잖아요.”

“대답이나 해.”

“죽여야죠.”

용연은 너무 쉽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왜?”

“그동안 참았다는 거잖아요?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저를 계속 관찰했다는 건데 정이 생겼다고 살려 주면 두고두고 곤란해질 거예요.”

“흘흘…….”

종 노야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밥과 고기를 흡입하듯 입에 넣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대견한 눈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하필 용연이 종 노야를 보고 있을 때였다.

“잉? 뭘 보고 있는 게야?”

종 노야는 입에 문 밥알을 뿜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용연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밥알을 피해 재빨리 몸을 숙였다가 일어나며 웃었다.

“썩을 놈이. 웃어?”

다시 한번 종 노야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열렸다.

종 노야는 입가를 닦으며 서고로 사라지는 용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용연이 이곳에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첫 질문을 건넸는데, 시간이 빨리도 지나간다.

그날도 용연이 음식을 차려 놓았다.

―사람이 네 앞에서 죽었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식탁에 앉자마자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용연이 죽음이란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던진 질문이었다.

용연은 어떤 사람인지, 왜 죽었는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필요한 책이 떠올라서 조용히 오후에 용연을 찾아가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평생 의심하며 산 자가 경험이랍시고 쓴 책이다.

살수가 되기 위해 앉는 자리, 누울 침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의심하며 살아온 간택이란 자의 일기였다.

다음 날 아침.

용연은 종 노야가 식탁 앞에 앉자마자 답을 꺼냈다.

―임무 방해 여부의 정도에 따라 조치를 취합니다.

용연의 대답을 듣고 종 노야는 ‘숨는 법’이란 책을 전해 주었다.

강호 세력에 쫓기던 자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은신의 비법을 적은 책이다.

―제가 표적인지 아닌지 알기 전까지 숨어 있다가 때를 기다립니다.

용연의 대답을 듣고 이번엔 ‘이선(異線) 암중인(暗中人)’이란 책을 찾아서 건네주었다.

―유가족을 찾아서 제사를 지내게 해 주겠습니다.

용연의 새로운 대답을 들은 종 노야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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