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뜨끔!
폐부 쪽에 통증은 아닌데 뭔가 뚫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뭐지?’
용연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봤다.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교림이 온 걸까?
이번엔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숨을 길게 토해 내며 준비를 하려할 때였다.
“어?”
용연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한마디가 나왔다.
슥―.
상체가 들려지고 양손이 움직여졌다.
그러나 하체까지 자유로워진 것은 아닌지 일어나다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읍, 하아, 쓰읍, 하아…….”
용연은 빠르게 호흡하며 하체로 진기를 집중시키려 했다.
그 와중에도 손을 끊임없이 주억거리며 쥐었다 폈다.
“크크크.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그렇게 좋은 것이지.”
오싹!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피항 다음 차례의 교림이 온 것일까?
“용연…… 어?”
용연은 자신을 소개하려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야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
손으로 땅을 밀어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장포에 가려진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용연입니다.”
스윽―.
그림자가 좌우로 퍼지며 얼굴이라 여겨지는 형태가 용연의 앞에 나타났다.
움찔.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크크크. 혈이 풀리자마자 움직일 정도로 몸의 변화에 민감한 놈이 피항의 공격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어. 왜 그런 거냐?”
“흡!”
용연은 깜짝 놀라 눈을 치뜬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앞에 두 개의 눈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두 개의 동공 아래 가지런한 치아가 입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바,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려 주지 않아서 기다렸을 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알려 주지 않아서 기다렸다?”
괴인의 동공이 용연을 빤히 쳐다보다 위로 올라갔다.
용연의 시선이 동공을 좇아갔다.
‘크다.’
용연은 고개를 뒤로 꺾고서야 괴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따위 장난이 무슨 시험이라고…….”
괴인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방법을 알려 주셨다면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피하거나 막을 자신은 있습니다.”
왜 발끈한 것일까?
용연은 생각만 하려 했지 입 밖으로 내보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재빨리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크흐…… 한 번은 피하거나 막을 자신이 있다고?”
용연을 내려다보던 괴인, 몽외의 눈가에 주름이 접혔다.
비웃는 것이다.
교림의 공격을 학림 시험이나 치르는 후임 따위가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예.”
용연은 전신을 덜덜 떨면서도 몽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봤다.
“적이 너를 죽이려고 손을 쓰는데,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 주겠냐? 한 번은 피하거나 막을 수 있다고? 크크크.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
몽외의 냉기 가득한 목소리가 용연을 마구 찔러댔다.
“그, 그분들은 적이 아니라 교림…….”
텁.
용연의 얼굴을 덮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큰 손이 입을 쥐었다.
“닥치고 똑바로 들어, 애송이도 뭣도 아닌 놈아. 그들은, 네게 세신의 과정을 전하고 안 맞아 본 곳까지 골고루 때려 주며 베여 본 적 없는 부위를 잘라 준 그들은, 네가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적들 중 최고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의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을 상대해 볼 수 있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안 가르쳐 준다고 애새끼처럼 징징대다 보내는 게 자랑이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다 들이대고 깨져야지.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서 옷자락이라도 잡아 봐야지. 네 선임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지 않디?”
“…….”
“다른 교림들도 가르쳐 주지 않고?”
“…….”
“크크크. 네 선임이나 다른 교림들이나…… 전부 등신들이었군. 그런 것들이 빨리 뒈져야 단이 달라지지.”
“읍. 읍.”
용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라고?”
끄덕끄덕.
용연은 고작 눈만 깜빡이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의지는 전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왜 너를 등신처럼 굴라고 한 거지?”
“큭, 큭…… 그, 그런 적 없습니다. 선임은 많이 배우고 오라고 했지,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선임에 대한 말…… 취소하세요.”
용연은 몽외의 손에서 풀려났음에도 숨을 쉬기 힘들어 헉헉댔으나 할 말을 끝까지 마쳤다.
“취소? 크크크.”
몽외는 그 모습에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리며 활짝 웃었다.
선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용연의 반응이 백팔십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취소하세요.”
“싫다면?”
몽외는 용연의 반응에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몽외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을 떨던 용연이 고개를 들었다.
담영호를 모욕하는 말에 갑자기 심장이 차갑게 식으며 날뛰던 맥이 잦아들었다.
몽외의 말 중에 공감됐던 부분도 있다.
오늘 하루만큼은 교림들을 선배가 아닌 적으로 대했어야 한다는 말.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그 옷, 제 손에 잡히실 겁니다.”
“크크크. 이 옷을? 내가 누군지나 알고서 하는 소리냐?”
“적. 더 알아야 합니까?”
용연은 몽외를 똑바로 응시했다.
픽.
몽외의 웃고 있던 안면 근육이 더욱 깊게 파였다.
“몽외다. 지금부터 네가 살려 달라고 할 때까지 밟아 줄 분이기도 하지. 준비는…… 알아서 해라.”
몽외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턱.
용연이 반응할 틈도 없이 뭔가가 가슴에 닿았다.
쩌저적!
‘흡!’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동시에 얼기라도 하는 걸까?
용연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적을 눈앞에 두고 무방비로 서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느냐?”
흔들―.
용연의 가슴에 닿아 있던 몽외의 손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빙판이 깨지는 소리가 터졌다.
쩡!
“컥!”
용연은 비명과 함께 선 자세 그대로 날아가 땅에 박힌 채 밀려났다.
그그극―.
턱.
어느새 다가온 몽외가 용연의 어깨를 잡았다.
“한 번.”
텅―.
뭘 어떻게 했는지 용연의 하체가 떠오르며 어깨와 높이가 나란해졌다.
쿵!
땅에 용연의 형체가 그대로 찍혔다.
“두 번.”
용연을 땅에 박아 버린 몽외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꿈틀거림을 느끼자 다시 꺼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허공을 날아가며 용연은 이대로 땅에 처박히면 이번엔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허리를 당겨 몸을 굽히려 했다.
이대로 죽으면 담영호는 등신이 된다.
적어도 저 몽외란 자에겐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꿈틀.
***
“저게 뭐하는 짓이야!”
우곤은 몽외가 용연에게 이러저러한 말을 건넬 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기대를 했다.
저 몽외가, 이십여 년 동안 그 어떤 후임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던 몽외가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뒀다가는 아까운 인재 한 명을 잃을 것 같았다.
“우 교림, 그만둬.”
낯익은 목소리에 돌아보니 형도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뭘 그만둬? 지금 용연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알아. 몽외 선배님과 만나고 있잖아?”
“만나고 있다고? 저걸 보면서 그런 말이 나와?”
우곤은 형도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 눈이 됐다.
자신보다 용연을 더 아끼던 사람이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여유롭기까지 해 보인 까닭이다.
“저건 우 교림이 생각하는 것하고 달라. 용연이는 지금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기연을 얻는 중이야.”
“기연? 언제 죽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는 저 상황이?”
우곤은 아래를 가리키며 눈썹을 역팔자로 휘었다.
“몽외 선배님이 용연이를 죽일 생각이셨으면 저렇게 나서지도 않았어.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벌레를 눌러 죽이듯 만들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
‘……뭐지?’
우곤은 형도준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했다.
몽외를 저 정도까지 신뢰하고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 년 전, 학림학살 사건 때 동태병을 응징하러 갔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몽외와 형도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우 교림, 단의 체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단을 싫어한다고 단정 짓지 마. 단의 체제가 맞아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의 체제를 거부하고 홀로 성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형도준은 우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형 교림은 어느 쪽이지?”
“나야, 뭐…….”
“뭐?”
“중간? 어느 쪽이든 단을 위한 성장일 테니까.”
형도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고 보니 자신이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곤은 더 묻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
“대교, 이대로 두면 사달이 날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대교.”
곽집은 미간을 모은 채 탁자에 두 손을 올렸고, 등언은 조급한 시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곽집의 말에 힘을 실으려 했다.
두 사람의 앞.
연푸른 모(帽)로 쪽을 덮은 문사 차림의 오십 대 중년인이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턱수염을 매만졌다.
‘몽외 선배가 나섰구나!’
대교 진류는 두 사람 앞이라 진지함을 유지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반가움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몽외.
지금도 ‘몽 교림’이라 부르는 것이 죄송스러운 선배였다.
삼정과 선림들의 결정으로 교림의 첫 번째 서열에 오르긴 했지만, 마음속의 첫 번째 서열은 언제나 몽외였기 때문이다.
“등 교림, 곽 교림, 두 사람은 몽 교림을 뵌 적이 있나?”
“물론 있습니다.”
“예.”
등안과 곽집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자 진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대화는?”
진류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나뭇잎으로 만든 그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
등언이 먼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곽집을 쳐다봤다.
그러자 곽집 역시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내 기억엔 이십오륙 년쯤 된 것 같은데?”
진류는 두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자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뭐가 말입니까, 대교?”
등언은 이십오륙 년이란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몽 교림이 학림 후임과 만나는 것.”
“예?”
“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건가? 그리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몽 교림은 사실 나보다 한참 선배님이기도 하다고. 자네들이 하도 호들갑을 떠니 가 보기는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
말을 마친 진류는 등언과 곽집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의 장난기도 없는 진류의 말에 등언과 곽집은 멍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