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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34화 (34/232)

34화

이군엽의 열 손가락이 용연의 왼쪽 발끝 소양혈부터 오른 손바닥의 노궁혈까지 열네 군데 혈을 점하는데 걸린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상을 안 줄 수가 없구나. 상각(想刻)의 궤로 육첩권 중 일권을 새겨 두었으니 권에 입문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군엽은 용연의 단전과 어깨, 무릎을 살피며 육첩일권의 상각이 잘 새겨졌는지 확인하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각의 궤란, 비전전승 시에 사용되는 수법으로, 가족이나 제자의 몸에 무공 자체를 진기로 새겨 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일회성이나 반영구적으로 전할 수 있어서 일정 경지 이상에 도달한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익히길 원하는 수법이다.

이군엽은 자리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용연을 돌아보곤 세 번째 웃음을 툴썩, 흘렸다.

스스스.

이군엽이 자리를 벗어난 뒤, 용연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상각의 궤로 새겨진 자국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눌렸던 자국조차 없어진 것이다.

***

“정오가 넘었으니 이제 피항 선배 차례쯤 됐겠군.”

용연에게 세신의 과정을 두 번째로 베풀어 준 곽집의 시선이 산 중턱 어딘가를 향했다.

할 일을 마쳤으니 거처로 돌아가야 하는데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가다가 되돌아왔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야. 고작 학림 시험인데 잘 치르고 있는지 궁금해서 돌아오다니…….”

곽집이 혼잣말을 하며 산 중턱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곽 선배, 차례를 바꾸셨습니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등 교림? 왜, 너무 냉정하게 손을 써서 미안한 마음에 잘 있나 확인하러 다시 온 건가?”

곽집은 등언을 보고 반갑게 손을 들어보였다.

바닥에 내려선 등언은 포권을 취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냉정하게 손을 쓰다니요?”

“내가 두 번째였잖은가? 당연히 꼼짝 못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엎드린 채로 고통을 제대로 느끼고 있더군. 후후후.”

“예? 엎드려 있었다고요? 이번 후임이요? 곽 선배께서 일으킨 것이 아니고요?”

등언은 깜짝 놀라 연속해서 질문을 건넸다.

용연이 세신의 첫 번째 과정을 끝낸 뒤 움직였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까닭이다.

“……가만, 등 교림이 그 녀석의 혈을 풀어 준 게 아니었나?”

“당연히 아닙니다. 그랬다가 시험 장소를 벗어나면 큰일이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지금까지 학림 시험을 치르면서 세신의 과정 중에 깨어 있던 사람이 있었나?”

곽집은 확신이 안 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세신의 과정을 거칠 때는 거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기록을 해 둡니까?”

등언 역시 처음 듣는 질문이라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처음 해 본 생각이니 모르지. 정 선배를 찾아가 봐야 하려나?”

“곽 선배, 설마 두 번째 세신의 과정에서도 용연이 깨어 있었다는 겁니까?”

“옷을 줄 때 보니 기절해 있더군. 그런데 등 교림 얘길 듣고 나니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어. 그래서 정 선배에게 세 번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묻고 싶어진 거야.”

곽집은 고개를 산 중턱 쪽으로 돌리며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세신의 과정은 그 자체가 시험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기에 배려 차원에서 혈을 짚어 의식을 잃게 만든 후 진행해 왔다.

그 과정을 맨 정신으로 버텨 냈다면 그야말로 군림단 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진 대교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등 교림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새벽이라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시험이 끝난 뒤에 얼굴을 제대로 보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내 말이.”

곽집이 피식 웃자 등언도 마주 웃으며 동시에 신형을 뽑아 올렸다.

***

“힘들지? 내가…… 가만, 이름을 알려 줬던가?”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코, 얇은 입술, 그리고 마른 체격의 중년인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앞.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온몸이 핏물에 젖은 용연이 머리와 양팔을 늘어뜨린 채 위태위태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한 시진 내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잘리고 잠유기 주입을 받고 또 잘리고 주입받길 반복한 뒤였다.

“피항. 내 이름이다. 질문 하나만 하고 나와의 시간은 끝을 맺자. 네 생각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냐, 아니면 얼마 안 지난 것 같지 않으냐?”

대답 따윈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말투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피항 교림님. 이런 목소리였구나.’

용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상태였으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치른 시험에서 만난 교림들은 모두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얼굴보다는 그들이 준 고통을 기억한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진 만에 목소리를 들려준 피항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 정도가 아니었다.

소리나 느낌 뒤에 이어지는 고통.

눈 감은 채 칼날이 거꾸로 박힌 길을 걷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공포다.

현재 용연의 심정은, 길든 짧든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할 수 없고. 마지막이니 이번엔 어딜 벨지 알려 주마. 어깨다.”

‘또? 이제 그만…….’

움찔.

용연은 생각을 하다 말고 다급히 어깨를 움츠렸다.

팟.

피항의 손가락에서 한 자가량의 은빛 선이 빠져나오더니 허공을 유영하다 용연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

용연의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 어떻게 학림 시험을 치르는 거지?”

피항은 한 시진 내내 백 번 가까운 공격에 단 한 번도 반응하지 못한 용연을 내려다보다 혀를 찼다.

지금까지 꽤 많은 후임을 시험해 봤으나, 이 정도 둔한 감각을 가진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살려야 하기에 다가와 용연의 입을 강제로 벌려 뭔가를 넣어 주곤 전신을 두드렸다.

흘린 피를 빠르게 보충해 주는 영약을 먹인 후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제자리를 찾도록 잠유기가 실린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내 회강(會罡)을 다 받아 낸 후임은 네가 처음이다. 물론 둔한 걸 따져도 역시나 네가 역대 최고일 것 같기도 하다. 하수오도 먹였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한 것 같다. 운이 따른다면 또 보자.”

피항은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마치곤 자리를 떠났다.

하수오 때문인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베인 자리에 딱지가 앉았고, 일각이 더 지나자 상처 입은 자리가 희미하게 변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쿵.

용연의 상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커헉…….”

천만다행으로 입을 벌릴 수 있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 공기를 마구 들이켰다.

그러나 들이켠 숨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몇 호흡이 반복됐다.

불룩.

복부가 살짝 바닥 쪽으로 늘어났다 줄어들며 땀을 배출했다.

히이― 허억, 기이― 헉―.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침과 엉킨 흙이 입으로 달려 들어왔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한 일이란 것을 난생처음 깨닫는 용연이었다.

주륵―.

귀밑에 엉켜 붙어 있던 피딱지가 땀과 섞여 목으로 흘러 내려왔다.

얼굴로, 어깨로, 등으로…….

잘려진 옷자락 사이로 김이 피어났고, 바닥에는 땀에 희석된 핏물이 사방으로 번져 갔으며, 용연의 입에선 여전히 가쁜 호흡이 계속됐다.

움찔. 움찔.

몸은 물 먹은 솜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데 피항에 의해 베어졌던 위치들이 용연의 신경을 건드리며 반응하게 만들었다.

***

“흠…….”

용연의 상태를 지켜보던 우곤의 입에서 묵직한 안도의 한숨이 토해졌다.

이각여가 흘렀음에도 꼼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벌써 달려가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그런 행동은 피항을 무시하는 처사였기에 참아야 했다.

“잘 참아 냈다.”

우곤은 혼잣말로 용연을 격려하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

“……!”

우곤은 한 발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크크크. 저런 놈을 뽑았네? 선임이 누구지?”

긴 그림자가 우곤의 얼굴을 덮으며 다가왔다.

“모, 몽외 선배…….”

우곤은 나타난 자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목젖을 울럭이며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소름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그런 것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최대한 천천히 돌아서서 떨리는 손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인사는 됐고.”

“담영호 학림이 뽑은 후임입니다.”

우곤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했으나 자꾸만 목젖이 울럭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담영호? 아아, 그 선배의 아들?”

“……예.”

“이래서 피는 못 속여. 아주 재미난 놈을 데리고 왔구나. 크크크.”

끼드득.

몽외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우곤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양팔과 양다리는 기형적일 정도로 길었다.

산발한 머리칼이 이마를 덮고 있었지만 웃을 때 살짝 얼굴 양쪽의 광대와 윗니를 모두 드러낸 치아가 보였다.

기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학림 시험에는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저 몽외와 한 공간에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영광스럽고 너무도 부담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십여 년 전의 그날 같았다.

학림 시험을 치르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던 우곤을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던 교림, 몽외가 저기 있었다.

“순서를 바꾼다.”

“……예?”

우곤은 놀란 눈으로 몽외를 쳐다봤다.

학림 시험에 참여할 교림들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대교인 진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맡을 테니, 너는 그만 꺼지라고.”

“……!”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였을 뿐인데 우곤은 숨을 멈추고 다급히 진기로 몸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진기가 몸을 감싸기도 전에 맥이 풀리며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파슷. 파슷.

기의 충돌로 인해 우곤은 자리를 지키기도 힘들었다.

그극― 그그극―.

버티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용화기(龍華氣)!’

우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두 걸음을 물러나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기세만으로 자신을 물러서게 만들 수 있는 고수는 선림들을 제외하곤 눈앞의 몽외가 유일할 것이다.

이십여 년 동안 교림인 사람.

“용연이 마음에 드신 겁니까, 몽 선배님?”

지닌 능력이야 오래전부터 인정받고 있으나,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불편해해서 선림으로 올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다르게 들은 얘기로는, 삼정은 몽외에게 선림 시험을 보라고 권했으나, 몽외 스스로 현 군림단 내에 자신을 시험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던가?

존재 자체가 소문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마음에 들지. 교림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크크크.”

몽외는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리며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우곤은 몽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을 명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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