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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32화 (32/232)

32화

묵 노야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믿는 것과 알면서도 발을 떼지 못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마치 반드시 알아내야 할 일을 끝마치지 못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묵 노야의 몸은 이미 왔던 길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으나, 시선은 뒤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시 온다. 이건 뭔가 이상해. 마치…… 내게 후임을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형도준을 보여 준 것 같단 말이지.’

묵 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학림학살 계획이 실패했으니 당연히 돌아갔어야 하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이곳까지 오게 됐다.

군림단의 후임을 만나야 할 것 같은 촉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형도준을 보게 된 것을 어떻게 우연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돌아가라는 하늘의 뜻이다.

오 년 전, 동태병의 선언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느낌이 강렬하다.

다시 오더라도 지금은 일단 돌아가야 한다.

더욱 군림단의 후임에 대해 궁금해지는 묵 노야였다.

***

[교림 청(請).

장소는 신룡(新龍).

십이시진 중 한 시진씩 배정할 테니 늦지 않게 지도 바람.

대교 진류.]

모두 여덟 개의 비첩이 여덟 마리의 전서구 발에 묶여 하늘을 날았다.

***

휘이익―!

휘파람 소리가 청명한 하늘로 날아가 허공을 지나던 전서구를 불러들였다.

파드득.

전서구가 날개를 접으며 팔뚝에 앉자, 손의 주인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발목에 매달린 쪽지를 풀었다.

“신룡이라. 청해야, 신강이야? 뭐, 어느 쪽이든 살아만 있으면 되지.”

손의 주인, 형도준은 쪽지를 우곤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

“신룡이라며?”

우곤은 형도준이 선심 쓰듯 쪽지를 건네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서갔다.

“우 교림, 내가 너보다 선배니까 먼저 받은 거지. 진 대교께서 우리가 동행하는 줄 어떻게 알…….”

“보고한 거 다 안다. 전서구도 한 마리만 보내라고 했을 테고.”

‘귀신같은 놈.’

형도준은 우곤이 자신의 생각을 다 읽고 있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가르쳐 준 사람으로서 보람을 느낀다.”

“흐흐흐. 기억하는구나? 그때가 언제였더라? 감녕에서 임무 수행할 때였나? 아무튼 그때, 네가…….”

형도준은 말이란 것을 잊고 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장난치며 웃고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우곤은 과하지 않게 받아 주며 형도준이 흥미를 잃지 않게 반응해 주었다.

‘네가 뽑은 후임들의 운이 거기까지였던 거야.’

우곤은 아픈 눈으로 형도준의 등을 쳐다봤다.

형도준에겐 후임이 없다.

네 명의 후임을 뽑았으나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임무 수행 중 어디선가 날아온 창에 등이 찔려 죽었고, 도망치는 자를 붙잡다 함께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고, 옹달샘 물을 마셨다가 독에 중독돼 죽었다.

그리고 오 년 전, 학림학살 사건에서 마지막 후임을 잃었다.

우곤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미간을 모았다.

형도준과 교림 서열 두 번째인 몽외 단둘이서 동태병과 그 세력을 없애 버렸다.

저 정 많은 사람이 정 줄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용연. 잘 성장했으면 좋겠군.’

우곤은 갑자기 용연을 떠올렸다.

형도준이 신이 난 이유가 용연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

안가를 떠나 서쪽으로 삼 일을 내달린 후 멈춰 선 담영호는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산에서 학림 시험을 치를 것이다.”

“학림 시험은 산에서 치르나 보네요.”

용연은 담영호가 가리키는 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혼잣말을 꺼냈다.

“그렇지는 않다. 매번 대교께서 정해 주시는데, 이번엔 산이 된 모양이다.”

“아…….”

“너는 그냥 저 산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준비할 것도 없이 그냥 가는 되는 겁니까?”

“첫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바로 일어나서 움직여라. 그때부터 시험은 시작되니까. 그리고 시험에 필요한 정보는 모두 말해 주었다.”

“……?”

용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담영호에게 들은 정보라곤 그저 하루만 버티면 된다는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다. 하루만 버티면 된다.”

담영호는 이미 했던 말을 힘주어 다시 한번 건넸다.

그러자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용연은 ‘하루’의 의미를 다르게 인식하게 됐다.

“선임, 하루가 지나면…… 선임?”

용연은 하루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담영호를 불렀으나, 언제 몸을 돌려세웠는지 왔던 길을 돌아가는 등이 보였다.

당연히 불러도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제자리에 선 채로 용연은 떠나가는 담영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지난 네 달 동안 수도 없이 봐 왔던 담영호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조금 전처럼 아무리 불러도 돌아봐 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용연 혼자인 것이다.

“그동안 의지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어.”

용연은 호흡을 느리게 조절한 후 돌아서서 시험 장소인 산과 마주했다.

타닥―.

불꽃이 나무에서 떨어졌다가 허공에서 툭, 터졌다.

반나절을 꼬박 달리고서야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서 잠을 청해도 교림들이라면 찾아낼 것이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초입 부근에서 자리를 잡았다.

섣불리 배를 채웠다가는 탈이 날 수 있어 안가에서 가져온 육포로 허기만 벗긴 후 경사면을 평평하게 만든 벽에 등을 기댔다.

옅은 하늘색이 지나가고 옅은 붉음이 밀려온다.

두근.

곧 하늘을 빨갛게 뒤덮을 노을을 떠올리니 심장이 뛰었다.

내일, 첫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이대로는 긴장이 돼서 잠도 못 잘 것 같다.

이럴 때는 움직여야 한다.

일어나 오는 길에 봐 뒀던 개울까지 일다경가량 달려가 물에 빠진 채로 되돌아왔다.

“훅, 훅…….”

젖은 물기가 마를 때까지 주변을 내달렸다.

열기와 공기 마찰로 수분이 날아가면 다시 한번 물에 젖은 채로 돌아오길 두어 번.

하늘은 검게 변했고 밤에 움직이는 새들의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훅― 훅―.

용연은 누운 채로 양손을 뻗어 하늘을 움켜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어깨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아플 때까지 수련은 계속됐고 얼마 뒤 잠에 빠져들었다.

찌르륵― 짹― 짹―.

꿈틀.

새소리에 용연의 귀가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눈알이 마구 돌아갔다.

“아!”

용연은 비명처럼 한마디를 외치며 눈을 떴다.

산에서 첫 닭이 울 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감이 좋군. 괜찮은 반응이야.”

‘누구지?’

용연이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기도 전에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연은 재빨리 눈을 비비고 앞을 쳐다봤다.

그러자 큰 눈과 사각 턱이 보였다. 아니, 움직였다.

“등언. 너를 시험할 첫 교림이다. 자기 전에 충분히 배는 채웠지?”

묻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투였다.

자상한 것도 같았고 무뚝뚝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뇨.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

반문하며 등언의 굵고 진한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그 모습에 용연은 등언의 눈이 큰 것이 아니라 눈썹이 유난히 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속을 채울 수…….”

용연은 말을 끝까지 이어 가지 못했다.

피식.

등언이 역팔자 눈썹을 수평으로 뉘이며 갑자기 웃음을 지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가 더 좋아.”

등언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둥실―.

용연의 몸 전체가 떠오르더니 머리가 등언의 손바닥에 닿았다.

발끝과 등은 수평을 이룬 상태였다.

스와―.

‘윽!’

용연은 무언가에 머리가 닿자마자 몸속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위험하다.

생각은 그랬지만, 몸은 이미 용연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솟구치던 피가 그대로 머리로 몰려들었다.

이대로라면 머리가 터지거나 피를 토할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어?’

분명히 꽉 막힌 벽에다 머리를 들이댔는데 아무런 제재도 없이 통과한 것 같은 느낌.

뒤이어 몰려온 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머리를 통해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진기구나!’

용연은 자신의 머리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플 것이다.”

등언은 말과 함께 구겨진 옷을 쫙 펴듯 용연의 머리에서 시작해 발끝까지 진기를 보냈다.

쩡!

‘컥!’

용연이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까지 부릅떠졌다.

까드득!

목에서부터 시작된 기음은 등을 지나 허리, 골반, 무릎, 발가락까지 이어졌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몸을 지배했다.

주르륵―.

벌어진 용연의 입에서 흐른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음? 대개는 세신(洗身)의 첫 번째 과정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난리를 피우던데, 너는 괜찮은 모양이구나? 좋은 태도다. 좀 더 가 보자꾸나.”

등언은 용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좋아했다.

틱.

‘으? 아……아악!’

미세한 소리가 났다 싶은 순간, 용연의 목 관절에서 시작된 고통이 모든 관절을 분리시키며 발가락 끝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엔 뼈마디가 떨어졌다 붙는 고통이, 다음엔 살갗과 근육의 경계가 찢어졌다 다시 합쳐지는 고통이 계속됐다.

용연의 발이 땅에 닿은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잘 견뎠다. 휘유, 지금 네게 한 이 과정은, 가죽주머니에 바람을 뺀 후 불어넣는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원래는 하나, 셋, 여섯, 열둘 정도의 강도로 서서히 올려야 하는데, 너의 인내력 때문에 처음부터 여섯의 강도로 했다. 잘 견뎠다.”

등언은 막대한 진기를 소모한 탓에 말을 하며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용연은 바닥에 누운 상태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찡―.

등언은 콧등이 시큰거렸다.

지금까지 세 명의 학림 시험에 참여했으나, 용연과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고에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할 줄 아는 후임이라니.

“훌륭하다.”

지금까지 세 번의 학림 시험에 참여했으나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보람이었다.

‘너, 너무 아파요! 말 좀 하게 해 주세요!’

용연은 흐뭇하게 웃는 등언의 사각턱을 노려보며 벌려지지 않는 입을 원망하며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또 보자.”

등언은 용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세웠다.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용연이기에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볼일 끝났으면 몸이라도 풀어 주고 갈 것이지.

용연은 허무한 표정으로 등언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움찔.

일각여가 지났을 때에야 몸이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 끝이 꿈틀거린 것이다.

그리고 양손과 양발에서 동시에 온기가 느껴지더니 몸 안쪽으로 스며들 듯 천천히 퍼졌다.

네 곳에서 시작된 온기는 장기를 감싸며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비슷한 온도였기에 용연은 온기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두고 봤다.

어느 순간.

쫘악!

“……컥!”

용연은 목과 등을 둥글게 구부리며 입부터 최대한 크게 연 뒤 숨을 짧고 강하게 토했다.

그 상태로 몸을 좌로 비틀었다 우로 비튼 뒤 천천히 양손과 무릎을 바닥에 대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뚝. 뚝.

조금 전에 겪었던 세신의 고통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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