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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29화 (29/232)

29화

형도준은 안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는 동안 입가에 점이 난 여인을 수소문하라고 구선 등에게 지시를 했으나, 찾고 있다는 연락만 받은 상태였다.

우뚝.

“쯧. 그 잠깐 사이에 내 이목을 속일 정도의 움직임이라니. 그런 고수가 왜 돕지 않은 건지…….”

절레절레.

형도준은 고개를 내저으며 멈춰 섰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형 교림, 오셨나?”

“음? 이게 누구야? 우 교림이잖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 있다고 들은 것도 같다.”

형도준은 안가로 들어설 때부터 우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으나, 먼저 알은척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들은 게 아니라 봤잖아, 저번에.”

우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랬나? 알다시피 내가 바빠. 근데 좀 전에 뭐라고 했냐? 봤잖아? 내가 니 후배냐?”

“아니. 너가 내 선배지.”

“너? 지금 ‘너’라고 했냐?”

“응.”

“파하! 새삼 느끼는 거지만, 예의를 아주 똥구멍에다 넣어 두고 사는구나, 우곤?”

형도준은 눈을 부라리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우곤을 노려봤다.

“말투가 여전한 걸 보니 잘 지낸 모양이네?”

우곤은 이쯤에서 형도준이 저런 반응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모, 모양이네에? 선배에 대한 예의도 없고, 단의 규율 따윈 개나 줘 버리고, 아주 좋다?”

“아, 맞다! 형 교림, 우리가 학림 시절을 같이 보낸 건 기억나지?”

“…….”

“서열 하나 차이라고 편하게 지내자며 만날 때마다 말을 까던 인간 하나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우곤은 손가락 하나를 머리에 두드리며 인상을 썼다.

“그, 그런 자가 단에 있을 리가 있나…….”

“너야.”

“……뭐?”

“너라고. 조금 빨리 교림에 올라갔다고 만날 때마다 선배 운운하며 지랄 염병하는 인간이.”

“어, 어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너는 만날 때마다 항상 그랬어.”

“왜 그래, 우 교림? 요즘 신경 쓰이는 일 있어?”

형도준은 우곤의 까칠한 반응에 더 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걸 알고 백기를 들었다.

“학림 때 후배였지만 항상 말 까던 선배야, 임무 수행 중에 처맞고 울던 거 생각 안 나?”

“야, 우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형도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팽팽하게 솟았다.

그러자 정자가 흔들리며 곧이라도 터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그긍―.

“이걸로 되겠어? 진 선배님에게 이르려면 조금 더 힘을 내야겠는데?”

뚝.

우곤의 입에서 ‘진 선배’란 말이 나오자마자 형도준의 기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호, 우 교림, 많이 늘었다?”

“너는 많이 줄었는데?”

“…….”

“…….”

형도준과 우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진기를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대결에 들어간 것이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기에 누가 먼저 눈을 감느냐의 싸움이다.

팍!

형도준과 우곤의 중간 정도에서 뭔가가 터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던 두 사람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풉.”

형도준이 먼저 웃었다.

“후후.”

우곤도 웃었다.

“둘, 셋.”

끔뻑.

형도준의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뜨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십여 년을 변함없이 무승부로 만든 대결이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형도준과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연구하고 고민하길 좋아하는 우곤.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서로의 빈자리를 기가 막히게 잘 채워 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고민은 풀었고?”

형도준의 질문에 우곤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받았다.

“망량의 선행 잔영이 사라지질 않아. 그것만 없애면 한 계단 위로 도약할 수 있는데 말이야.”

“잔영? 그…… 망량의 꼬리라 불리는 그 잔영?”

형도준은 우곤의 대답에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래, 그 잔영. 왜?”

“아, 하하하. 그냥. 우 교림의 고민이 금강탄(金剛彈) 쪽인 줄 알았는데 망량의 꼬리를 없앤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자빠져서.”

히죽.

형도준은 탈이라도 만들 듯 안면의 모든 근육을 움직여 우곤의 대답을 비웃어 주었다.

그러자 우곤의 입가가 마구 씰룩였다.

슥―.

형도준이 먼저 손을 올렸다.

척.

우곤은 왼손을 위로, 오른손은 말아 쥔 채 허리춤에 갖다 댔다.

“지금 뭐하는 거야?”

형도준은 들어 올린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우곤을 쳐다봤다.

“시답잖은 기습의 달인 앞에 있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손 내려.”

“너부터 내리면.”

“……네가 안 내리는데, 나라고 내리겠냐?”

형도준은 우곤의 금강탄 자세를 보고 내리려던 손을 그대로 두었다.

“그럼 그대로 있든지.”

“…….”

힐끗.

우곤을 응시하던 형도준의 눈동자가 옆으로 이동했다.

우곤 역시 거의 동시에 눈동자를 움직였다.

“자세 좋네.”

“너도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형도준과 우곤이 자세를 풀며 한마디씩 꺼냈다.

“어? 담 학림!”

형도준이 먼저 고개를 돌리며 담영호를 보고 반겼다.

“형 교림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담영호와 양안은 형도준의 알은척에 정중히 선 채로 포권을 취한 후 다가왔다.

“양 학림은 오랜만이고, 어라? 그놈은?”

형도준은 담영호 옆에 아무도 없자 의아한 표정으로 묻듯이 쳐다봤다.

이곳에 온 이유가 담영호나 양안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용연이기 때문이다.

“용연이는 무리를 해서 쉬게 했습니다.”

“무리? 최단기간 학림이 될 인재에게 뭘 시켰기에 무리를 하게 만들어?”

형도준이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시킨 것이 아니라…….”

“안내해. 어디야? 지금 어디 있어?”

형도준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사방을 둘러봤다.

“최단기간 학림? 그런 말도 있나?”

우곤은 형도준이 두 학림을 곤란하게 몰아붙이자 도와주려 슬쩍 끼어들었다.

“있지! 지금 최단기간 학림은 여기 담 학림이고, 곧 그 기록을 깰 최단기간 학림은 담 학림의 후임인…….”

형도준은 말을 흐리며 담영호를 돌아봤다.

“용연입니다.”

담영호는 웃으며 형도준의 말을 받아 주었다.

“허울이야. 학림 때는 내가 형 교림보다 빨리 올라갔지만, 교림은 형 교림이 나보다 빨리 올라갔다. 노력이 중요하지 순서는 의미 없어.”

“우 교림, 예비 기간 없이 네 달 만에 학림 시험을 치르는 인재야. 자네나 나는 무려 일 년하고도 두 달이 다 되도록 기본삼공도 완성하지 못한 채 시험을 치렀지만, 용연은 벌써 악조궁까지 실전에서 사용했다는 거야. 비교할 걸 하라고.”

“악조궁을 실전에서?”

“그러니 내가 이렇게 직접 보고 싶어 달려온 거지. 자자, 우 교림은 여기 두고 우리끼리 가자고.”

형도준은 서둘러 정자를 내려갔다.

“형 교림!”

우곤이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형도준을 불렀다.

“왜?”

“같이 가.”

“흐흐흐. 궁금하지?”

“난 이미 봤어.”

“누굴?”

“용연이.”

우곤은 일부러 용연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이이…….”

형도준은 눈을 사납게 뜨며 담영호를 돌아봤다.

왜 자신보다 우곤이 먼저 봤느냐는 뜻이다.

“안가에서 지켜야 할 예의를 가르쳐 주신 것이 전부입니다.”

“안가의 예의?”

형도준이 우곤을 돌아봤다.

“나를 양 학림의 후임과 착각할 정도로 눈썰미가 없더라고.”

“잉? 너를 그렇게 젊게 봤다고? 이거 내가 너무 기대를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형도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담영호를 돌아봤으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가 보자고. 학림 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는 그냥저냥 넘겼는데, 형 교림 얘길 들으니 궁금해졌어.”

“그치? 나도 진 대교께서 후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걸 처음 들었…….”

“진 대교께서?”

우곤이 놀란 눈으로 형도준을 쳐다봤다.

“담 학림, 어디라고?”

“서쪽 모옥입니다.”

담영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형도준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양 학림, 왜 그리 조용해?”

우곤이 다가와 진류의 얘길 들으려할 때, 형도준이 양안에게 말을 붙였다.

움찔.

양안은 형도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스물두 살에 본 형도준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십육 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당시에 봤던 형도준의 모습은 뇌리에 새겨진 그대로였다.

“예? 아, 아닙니다, 형 교림님.”

양안은 한 박자 늦게 돌아서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떨어? 우리가 처음 본 게 십오 년 전인가?”

“시, 십육 년입니다.”

“벌써? 현장에서 방방 날뛰던 양 학림을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 근데 이젠 그때의 양 학림은 못 보는 거야?”

“뭣 모르고 그런 것이라…….”

“지금은 뭘 좀 알고?”

“……여전히 잘 모릅니다.”

“아까워. 오 년 전에 살아나나 싶어서 눈여겨봤더니 금방 시들해져서는. 쯧. 동료만 무사하면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은 위쪽 세 분 정도로 두자.”

“……!”

양안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양 학림, 아직도 오 년 전 사건과 관련된 자들을 쫓고 있지?”

“그, 그걸 어떻게 형 교림님이 알고 계십니까?”

양안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치떠졌다.

“진 대교께서 양 학림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모른 척하라고 하더군. 나도 같은 마음이고.”

형도준이 손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끄음…….”

양안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신음 같은 소리를 내기만 했다.

“양 학림, 너무 티 안 내려고 조심하지 마. 그것도 자주 하면 버릇 돼.”

“……!”

양안은 형도준의 한마디에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그런 양안의 어깨에 우곤의 손이 얹혀졌다.

“그런데 양 학림, 후임은 어디다 두고 온 거야? 이럴 때 형 교림에게 눈도장을 찍어 두면 좋지 않나?”

생각이 많아진 것 같으니 잠시 시간 좀 갖고 오라는 배려였다.

“아, 맞습니다. 제가 곧 데리고 오겠습니다.”

양안은 우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이서가 있을 만한 곳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툭. 툭.

우곤이 어깨를 두드려주자 양안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담영호는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갑자기 당황하는 양안의 모습을 보고 이서를 챙기라고 해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음?”

형도준은 방 안으로 들어서다 뭔가를 봤는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담영호는 형도준과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고, 멀쩡한 모습의 용연을 보게 됐다.

“설마 또…….”

담영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닙니다, 선임. 방을 닦고 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용연은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다급히 대답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최단기간 학림 시험을 치를 용연이냐? 네 달 만에 치르는 시험이라지? 대단하다! 선임이 깬 기록을 그 후임이 다시 깨게 되는구나. 앉자, 일단 앉아서 차분히 얘기 좀 해 보자.”

형도준은 용연이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으며 할 말을 쏟아 냈다.

“뭐 해, 형 교림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담영호는 눈짓으로 형도준에게 인사하라는 시늉을 했다.

“요, 용연입니다.”

용연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했다.

“몸이 안 좋다며? 학림 시험 준비하다 다친 건가?”

“다친 것이 아니라…….”

딱!

형도준이 갑자기 엄지와 검지를 튕겨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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