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용연은 일어나 담영호를 배웅하려 했다.
턱.
담영호는 용연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담영호가 밖으로 나가자 용연은 덩그러니 방 안에 홀로 앉아 자신을 바보로 만든 벽을 쳐다봤다.
“너…… 뭐냐?”
용연은 홀린 듯 일어나 벽에다 손을 댔다.
그 상태로 한참을 노려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그럼에도 손은 떼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가 본 것이 거짓말처럼 됐잖아? 너, 도대체 뭐야?”
꾹.
용연은 이를 악물며 손에 진기를 모았다.
***
밖으로 나온 담영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 건너편을 돌아봤다.
용연의 방이 있는 곳이다.
‘정작 물어보고 싶었던 건 묻지도 못했네.’
담영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기절한 용연을 깨우기 위해 잠유기를 주입했다가 불어넣은 진기가 회수되지 않아 놀랐던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용연의 꿈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모습 때문에 잊고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면 물어봐야겠다.
―저 벽이 저를 기절시켰어요!
갑자기 용연의 외침이 떠오른다.
그 진지한 표정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니.
벽은 그저 안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벽일 뿐이었다.
‘녀석의 말을 믿고 곧이곧대로 진기를 주입시켰다니…….’
절레절레.
지금 생각하니 창피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벽은 사물이다.
생물처럼 진기를 주입하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변화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응?’
담영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막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양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 선배?”
“담 학림, 그분이 오셨다.”
양안은 담영호를 확인하자마자 외치며 다가왔다.
양안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형 교림님이 오셨나요?”
“그래, 오셨다. 어서 가자.”
양안은 긴장했는지 목소리를 살짝 떨었다.
“알겠습니다. 용연이를 데리고 바로 갈 테니 먼저 가 계세요.”
담영호는 대답한 후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교림을 만나는 자리기에 벗어 놓은 장포를 입으려는 것이다.
“어? 양 선배, 왜 안 가고 계셨어요?”
옷만 입고 바로 방에서 나오는데 양안이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 혼자 가기 그래서. 담 학림도 알다시피 내가 형 교림과 교류도 없잖나? 혼자 가면 시달리기나 하지.”
양안은 쓰게 웃으며 멋쩍어 했다.
“잘하셨어요. 둘이 같이 가는 게 낫죠. 잠시만요. 용연이를 데리고 나와야 하니……. 용연아, 몸은 좀 어떠냐?”
담영호는 용연의 방 앞으로 가며 기척을 냈다.
당연히 대답하며 나와야 할 용연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꿈틀.
미간을 찌푸린 담영호가 바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입을 열어 소리쳤다.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뭘 봤는지 담영호가 빨려 들어가듯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양안도 서둘러 용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방 앞에 섰을 때였다.
“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피를 토했는지 용연의 입과 옷, 바닥이 온통 붉었다.
담영호는 용연을 부축하는 동시에 등에다 진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담 학림, 이게 뭐야? 용연이가 왜 피를 토하고 쓰러진 거야?”
“…….”
“야, 담 학림!”
“우웅…… 양 학림님, 오셨습니까?”
양안의 목소리 때문인지 담영호의 추궁과혈 덕분인지 용연이 눈을 뜨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그…… 괜찮냐, 용연아?”
양안은 용연에게 한 소리 하려다 말을 돌렸다.
그때, 추궁과혈을 해 주던 담영호가 용연의 등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앉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담영호의 질책이 용연을 향했다.
“선임, 저 벽…….”
“그만!”
담영호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용연의 말을 막았다.
용연은 담영호의 모습에 놀라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나서준 사람이 양안이었다.
“담 학림, 화를 낼 일이 아니잖은가? 다친 사람을 다그치는 건 그만하고 일단 쉬게 해 줘.”
“…….”
양안의 만류에도 담영호의 성난 시선을 거두어질 줄 몰랐다.
분명히 쉬라고 했건만 용연은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뿐만 아니라 다치기까지 했다.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이거 어쩌지?’
울럭.
용연은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속에서 비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다.
목젖을 몇 번이고 눌러 참아보려 했으나 기어코 식도를 타고 넘어오고 말았다.
“우엑!”
용연은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바닥에 떨어진 뭉친 피는 그대로 방바닥을 적셨다.
“아…….”
난감함이 고스란히 묻어난 한마디가 용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속은 개운해졌다.
그러나 눈앞에 들어온 상황은 곧 일어날 참담함을 절절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쉭―.
희끗한 그림자가 보였다 싶은 순간 등으로부터 따듯함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담영호가 빛보다 빠르게 응급조치를 취해 준 것이다.
그러나 담영호의 손은 곧바로 떼어졌다.
“무슨 짓이야, 담 학림? 어서 안정을 시켜 줘야지, 왜 손을 떼?”
양안이 담영호의 행동에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담영호는 양안의 호통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용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인상을 썼다.
“너…….”
“선임, 이건 그냥 기침입니다. 피가 나와서 놀라셨겠지만 몸은…….”
“닥쳐.”
“흡!”
용연이 다급히 입을 오므렸다.
담영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형도준 교림께서 오실지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 아무것도!”
“……예.”
용연은 한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담영호는 양안과 함께 방을 나갔다.
슥슥―.
용연은 자신이 쏟아 낸 피를 닦고 나서 방문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상태로 한참을 멍하게 벽을 바라보다 서서히 용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닿으려고 손을 뻗으면…….”
스륵―.
손이 들렸다.
“축이 되는 위치는 어깨가 아니라 아랫배이고…… 제때 힘을 줘야 끊어 낼 수 있으니 순간적으로…… 흡!”
팍!
허공에서 미약하지만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손이 따라올 위치로 생각을 움직이면…….”
스륵―.
들려진 손을 좌우로 흔들다 천천히 내렸다.
삼제란 것을 배우고 이 년쯤 지났을 때 저절로 외우게 된 순서다. 지금처럼 웅얼거림, 손짓, 상상을 동시에 떠올린 기억이 난다.
당시엔 용연에게 수련 외의 놀이는 없었다.
반복에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 크게 탈이 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삼제를 순서대로 펼치다 갑자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팔다리는 멋대로 뒤틀렸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삼십여 일은 족히 그 상태로 누워 있었던 것 같다.
이따금 깨어날 때가 있었으나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기 위해 저절로 눈이 떠진 것뿐이었다.
깨어나는 게 두려워 꿈만 꾸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꿈에서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수련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머리로 수련을 하고 몸으로 확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모양이다.
상상.
머릿속으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점점 더 빠르고 명확해져 갔다.
당연히 잠을 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삼제란 무공과 대화하며 보냈다. 그러다 보니 깨어났을 때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 됐다.
“그때는 진흙으로 만든 내 몸을 부쉈다가 일일이 꿰매서 다시 붙이곤 했는데…….”
용연의 눈은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끔뻑끔뻑.
이번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을 해야 한다.
저 벽이, 벽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 뭐라고 하지?
우툴두툴 일어난 벽면이 순간적으로 물결처럼 보인다.
“물.”
그래 저 벽은 수면이다.
그렇게 정하자 정말 물 같기도 하다.
피식.
오래전의 놀이를 열여덟 살에 다시 시작하려니 묘하게 부끄러우면서도 재미가 있다.
절레절레.
집중!
속으로 외쳤다.
저 물 안에는 무언가 무시무시한 생물이 살고 있다.
용연은 그런 곳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낚싯줄을, 얇은 데다 약하기까지 한 낚싯줄을 내린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래야 앞서 일어난 두 번의 기이한 현상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저 물 안에 사는 괴물은 용연이 내린 낚싯줄을 물었다가 강제로 끌어올리려 하자 버틴 것이다.
그러다 담영호의 등장으로 두 번 모두 용연 스스로 낚싯줄을 끊은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용연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너희들, 저기서 왔지?”
용연은 자신의 가슴 안쪽이 보이기라도 하듯 쳐다봤다.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근육과 혈관을 자르던 돌기들.
용연이 돌기들을 떠올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꿈틀. 꿈틀.
마치 용연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하하하…….”
용연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괴물들과 그 괴물들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상한 돌기들.
반응까지 느껴 보니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 이야기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선임의 진기가 지나가는 것이 똑똑히 느껴지도록 길을 넓혀 준 것도 너희들이고?”
꿈틀. 꿈틀.
또다시 통증이 느껴진다.
담영호의 진기가 지나가는 흐름을 떠올려서 몸이 반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연은 이미 돌기들의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다른 관점에서 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다.
“……꺼내 줄까?”
물이라고 상상하는 벽속의 괴물에게 한 말이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슥.
용연은 상체를 일으켰다.
두 번의 경험으로 저 괴물을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돌기들은 진기가 잘 흐르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괴물?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괴물을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덤벼야 한다.
용연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벽 앞으로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제 삼차전을 치를 차례다.
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 때문에 다른 생각은 나지 않는다.
벽에 막 손을 땠을 때였다.
움찔.
심장 근처가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짧지만 깊은 통증이 전신을 장악했다.
팟.
벽을 보고 있던 용연의 동공이 확장됐고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칼이 부풀어 오르며 덥수룩하게 만들었다.
스스스―.
돌기들이 만든 기를 서서히 내보내며 눈을 감았다.
용연은 낚시를 한다는 생각으로 내보낸 진기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번에는 담영호가 일찍 돌아오질 않길 진심으로 바라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