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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24화 (24/232)

24화

담영호는 풀 죽어 있는 용연을 쳐다보다 낮게 숨을 뱉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앉아서 자게 된 기간은 오 년쯤 됐다. 학림은 어떤 상황에서도 숙면을 취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그때 생겼거든. 나도 이렇게 자고 싶지 않다.”

“오 년요?”

용연은 오 년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담영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으나, 담영호는 고개만 가볍게 한 번 끄덕인 후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왜 오 년입니까, 선임?

그 전에는 어디서 주무셨는데요?

용연은 마구 떠오르는 질문을 꺼내지 못한 채 눈만 끔뻑대다 볼을 부풀리고 말았다.

괜히 한마디 꺼냈다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곳이 바위 속이나 지하 동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다렸지만 담영호의 눈은 떠질 줄을 몰랐다.

용연은 이내 심드렁해져서 몸을 바닥에 뉘였다.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무공과 전혀 연관이 없는 건 아닐 거야. 저 자세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이 뭘까?’

용연은 눈을 감고서 담영호의 앉은 자세를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히죽.

갑자기 떠오른 황당한 생각에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학림이 되자 담영호가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무공 비급과 무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뽑아들자, 그 안에 담영호처럼 앉아서 잠든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몸 안에 수많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바로 자면서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심법이었던 것이다.

―저도 이제 자면서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됐습니다, 선임!

비급을 들고서 담영호에게 외치자, 담영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 입을 열진 않았다.

히죽.

온몸이 짜릿해지는 상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슷―.

‘응?’

용연의 귓가에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옷자락이 바위에 스치는 소리인가?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

용연은 신경이 쓰여 슬그머니 눈을 떠 담영호가 앉아서 자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담영호가 움직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긁적긁적.

자신을 깨우지 않은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제 그 정도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용연은 손바닥을 겹쳐 머리에 대며 다시 누웠다.

눈 한가득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데 선임은 언제 수련을 하시는 걸까?”

무심코 든 생각이다.

혹시 지금?

자신이 보면 안 되기에 일부러 자리를 피해서 수련을 하는 건가?

용연은 눈을 크게 뜨며 절벽 위쪽을 올려다봤다.

선임의 뒤를 쫓아가 봐?

호기심이 일었으나, 생각을 떠올렸을 때보다 더 빨리 포기했다.

담영호가 마음먹고 움직이는데 자신의 어쭙잖은 창천비로 쫓아갈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누웠다.

그러자 아랫배 쪽이 따뜻해지며 등을 통해 스며들던 한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상상 속의 공간을 창천비로 달려 봤다.

움찔움찔.

왼발과 오른발이 번갈아 가며 반응을 보였다.

반복해서 십여 번 정도 펼치자 마음이 편안해지며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등 쪽에서 ‘파슥’ 하며 돌 부스러지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뭐지?”

용연은 가만히 손을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만져 보았다.

엄지와 검지에 돌 부스러기가 잡혔다.

“이래서 노숙이 싫어.”

용연은 혼잣말과 함께 누운 채로 돌 부스러기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누워 상상으로 만들어 낸 초원을 창천비로 내달리려 할 때였다.

그륵―.

“……!”

용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리가 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벌떡 일어나 등을 댄 바닥을 손으로 쓸 때, 용연의 눈이 반짝였다.

손이 닿은 바닥이 지나치게 평평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랬었나?”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누웠는데 지금 만져보니 명당이 따로 없었다.

두어 번 손바닥이 바닥을 훑자 바닥이 말끔해졌다.

피식.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선명하진 않지만 손으로 만져지는 곡선이 마치 용연 자신의 등을 찍어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영호 때문에 일어났다가 제대로 된 잠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 자리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용연이었다.

창천비의 효용이 등을 통해 발현된 것이란 것을.

***

슷.

담영호가 돌아온 것은 축시(丑時, 새벽 1시―3시)로 접어드는 시각이다.

반 시진가량 자리를 비웠으나 용연은 아무것도 모르는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툭.

담영호는 잘 자는 용연을 보자 괜히 심술이 나서 엉덩이를 발로 차곤 자리에 앉았다.

잠깐이라도 잠에서 깰 줄 알았던 용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둔한 놈.”

담영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벽에 등을 댄 채 눈을 감았다.

고로롱―.

용연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고단함이 느껴지는 코골이에 저절로 담영호의 눈이 떠졌다.

십여 년 전의 자신도 저랬다.

학림이 되기 위해 방적을 따라다니며 고단한 몸을 아무 곳에나 뉘였다.

군림단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삶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삶이다.

일생을 걸고 도전해야 할 자리가 군림단에 있는 까닭이다.

이 대 군림단주.

아직은 요원하기만 한 자리지만, 후임을 뽑으며 약간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이전의 후임들과 용연을 비교하며 깨달은 바가 있다.

군림단원이 될 놈은 진즉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최단기간 학림?

최단기간 교림?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선 담영호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러저러한 기록들은 모든 단원의 최종 목표인 이 대 군림단주가 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학림의 기록을 깼으니 다음은 교림의 기록, 그다음엔 선림의 기록을 깰 거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은 얼마 안 가 깨닫게 됐다.

교림과 선림의 단계는 무공만 강하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교림은 학림 단계에서 배울 수 있는 무공뿐만 아니라 병법, 인용술, 기관토목 등을 잘 연결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선림은 교림 단계에서 더 성장시켜야 한다.

이것을 알아내는 데 십여 년이 걸렸다.

다른 학림들과 비교하면 조금 더 빠를 수는 있으나, 교림이 되는 길을 똑바로 걸었다고는 할 수 없다.

‘방 선배의 충고를 새겼어야 해.’

담영호가 학림이 되던 날, 방적은 한 가지만 잘해선 안 된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반응을 살폈다.

끄덕끄덕.

분명 방적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한마디를 왜 조금 더 빨리 깨닫지 못했는지 후회가 된다.

방적에겐 방적의 방식이 있고,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최단기간 학림인 데다 후임 기간 내내 선임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방 선배, 좋은 후임은 되지 못했지만, 좋은 선임으로 기억되고 싶긴 합니다.’

무공만 익힌다고 학림, 교림, 선림 시험에 통과되진 않는다. 학림은 학림에 맞는 조건이, 교림과 선림은 각각에 맞는 조건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군림단원으로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계가 올라간다고 해야 할까?

담영호가 지난 십여 년 동안 깨달은 이치였다.

용연을 가르치며 더욱 확신을 갖게 된 이치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용연은 과거의 자신과 무척 다른 인성을 지니고 있었다.

선임인 자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녀석인 것이다.

이럴 때, 앞으로의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과 머리에 똑바로 새겨 주어야 한다.

스스스―.

바람이 담영호의 머리칼을 흩트리며 지나갔다.

‘이런…….’

담영호는 머리칼이 흐트러지고서야 용연에 대한 생각을 너무 오래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조금 전까지 구 향주와 분노 가득한 대화를 해 놓고는 그새 까먹었던 것이다.

슥.

담영호는 용연에게 시선을 둔 채 손을 들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담 학림과 무 학림이 싸우는 동안 외연과 은타 식구들이 일대를 포위하고 빠져나가는 자들을 처리했소. 살려 둔 자 중 둘에겐 미행을 붙여 놨으니 어디 짓인지 밝힐 수 있을 거요.

만나고 온 구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번에 움직인 자들은 오 년 전의 무리들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한다.

―담 학림도 알다시피, 오 년 전에 학림학살을 주도했던 자들은 실패 시 전원 자결시켰잖소? 헌데 이번에 투입시킨 자들은 저 혼자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기 바쁘다오.

구선은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풀리지 않는지 얘기하는 내내 인상을 찌푸렸다.

“후우…….”

담영호는 답답함을 모아 숨으로 길게 내뱉었다.

누구보다 오 년 전 학림학살을 주도한 자가 이번에도 사건을 조종하길 바랐다.

여람 학림.

익숙한 곳이라며 담영호가 가야 할 곳과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바꿔 준 선배다.

까득!

담영호의 윗니와 아랫니가 갈리며 소리를 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여람이었을 것이다.

그를 죽인 자는 동태병이다.

선림 한 분이 교림 둘을 데리고 가서 동태병과 그 일당들을 모두 처리했다.

그렇게 학림학살 사건은 끝이 났다.

아니라고, 더 있다고, 동태병에게 그런 짓을 시킨 자가 있을 거라고.

방적을 붙들고 토로했다.

여람의 죽음은 자신 때문이라고, 자신이 갔어야 했다고, 미안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담 학림! 삼정 세 분이 거기까지라고 하셨다.

방적의 한마디로 담영호는 더 고집부릴 수 없었다.

군림단의 최고 의사 결정자인 삼정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년 전, 학림학살을 주도하고 뒤에서는 동태병으로 하여금 일을 벌이도록 사주했던 자들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구선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담영호는 오 년 전 그때와 비슷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

“여깁니까, 선임?”

용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담영호가 멈춰 선 곳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 앞이기 때문이다.

“들어가자.”

담영호는 용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 주다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어? 서, 선……임?”

용연은 깜짝 놀라 담영호가 서 있던 자리로 달려가다 급히 입을 닫았다.

밖에서 볼 땐 전혀 보이지 않던 길이 있었다.

착시처럼 두 개의 벽이 하나로 보였던 것이다.

“이곳이 동쪽 안가(安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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