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용연과 적휘가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파란 바탕에 하얀 구름과 회색 구름이 어지럽게 칠해져 있었다.
적휘는 멀뚱히 하늘을 보다 낮게 숨을 뱉으며 용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용연은 여전히 무슨 상상을 하는지 웃기까지 한다.
그때였다.
“가자, 휘야.”
다행히 무묵이 적휘를 불렀다.
“담 학림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용연, 간다.”
“무 학림님, 또 뵙겠습니다. 적휘, 다시 보자.”
담영호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용연은 무묵에겐 포권을, 적휘에겐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주었다.
“넌 안 갈 거냐?”
담영호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갑니다, 선임!”
기합 들어간 대답이 용연의 입에서 나왔다.
***
“애들 둘이서 방진을 죽였다?”
육십 대 반백의 머리칼을 쪽 지어 올린 노인은 손에 든 쪽지에서 눈을 떼며 놀란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가는 눈매와 매부리코, 얇은 입술과 뾰족한 턱, 약간의 흰 수염이 모두 드러났다.
이마에 일(一) 자가 적힌 검은 복면을 쓴 자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뒤에다 손짓을 했다.
아무도 없던 공간에서 인영 하나가 일어나며 다가왔다.
“학림 둘 모두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늦게 뛰어든 아이가 방진의 철립을 잡고 버티자, 쌍도를 사용하던 아이가 팔을 벴고, 곧이어 주변에 있던 자들이 방진을 찔러 댔습니다.”
다가온 검은 복면인의 이마엔 이(二) 자가 적혀 있었다.
“버텨? 아이 하나 어쩌지 못할 정도의 인물을 데리고 온 건가?”
“늦게 뛰어든 아이 때문입니다.”
“음?”
“방진이 잡아 놓은 분위기를 말 몇 마디로 깨는 걸 봤습니다.”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고?”
묵 노야는 턱수염을 만지며 흥미를 보였다.
“예.”
“흐음. 사형수들은 학림 하나가 날린 륜을 막지 못해서 무기와 몸이 잘린 채 도망치고, 애들을 처리하라고 보낸 놈은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허…… 태 령주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일 자가 적힌 검은 복면인이 나섰다.
“일호, 네가? 학림 둘이 모인 곳으로? 자살할 생각이 아니면 그만둬라. 그리고 이미 가 봐야 죽은 놈 불알 만지기야. 태 령주는 사형수 넷만 풀면 될 줄 알았던 게지.”
묵 노야는 태안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사형수를 여덟이든 넷이든 풀었던 숫자만큼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 년 전에 자신이 시킨 일만 하던 놈이 판단까지 하다니, 주제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반응이 너무 빠르군.’
오 년 전에 비해 배는 빨라진 것 같다.
시작부터 계획이 진행되지 않으니 언짢다.
“명령을…….”
“생각 좀 해 보고.”
묵 노야는 일호의 말을 자르며 숨을 내쉬었다.
그때,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던 새가 아래로 떨어져 내려왔다.
잠시 후, 이마에 삼(三) 자가 새겨진 검은 복면인이 쪽지를 들고 다가왔다.
[주인님, 교림 한 명이 나타나자마자……(중략)…… 칠 령주 태안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료.]
‘교림이 이렇게 빨리 합류한다고?’
쪽지를 쥔 묵 노야의 눈이 커지며 갑자기 고갤 좌측으로 돌렸다.
임료가 태안과 함께 자리 잡았던 곳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야?”
“일호, 너는 지금 당장 공심회(公心會)로 돌아가서 회주님께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고 전해.”
묵 노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당장 말씀이십니까?”
“당장! 교림은 우리들만으론 안 돼. 회주님과 십객(十客)에게 도움을 청해. 어서 가지 않고 뭐해?”
“……!”
일호는 묵 노야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끼자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던 사람이 교림이란 말에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 호를 제외한 나머지에게 명령을 내린다.”
묵 노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호는 자리에서 사라졌고, 숲에 있던 나머지 인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사 호가 명령을 기다립니다.”
“오 호가…….”
“육 호가…….”
이마에 숫자를 새긴 아홉 명의 검은 복면인이 허리를 숙였다.
“이 호는 받은 전서구에 ‘귀이(歸二)’라고 적어서 보내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회로 돌아간다.”
사사삭―.
검은 인영들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 노야는 벽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라, 아이…….’
어떤 교림인지보다 아이들 얘기가 먼저 떠오른다.
방진은 사형수로 사용할 정도는 아니지만 공심회와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런 방진을 아이 둘이서 처리했다?
열 명의 비위(秘衛)를 공심회로 돌려보낸 이유는 교림 때문인데, 생각은 아이들에게 가 있다.
‘왜지?’
우뚝.
묵 노야의 걸음이 멈췄다.
오 년 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에 완벽을 기한 전략 때문이 아니라, 한순간 떠오른 불안함 때문이었다.
태태무장 동태병.
강호 삼대세력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군림단이 사천 땅을 지배하듯 자신 역시 강서 땅을 그렇게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자였다.
강호 삼대세력에선 그런 그를 이용했다.
군림단을 사천 땅에서 몰아내면 사천 땅도 가지라고 한 것이다.
동태병은 고심에 고심을 더한 뒤, 강호 삼대세력보다 군림단과 싸우는 쪽을 택했다.
동태병의 선택을 지지하겠다며 강서의 많은 문파와 고수 들이 모여들었다.
철혈사자맹, 귀암로, 사혈명으로선 손도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철혈사자맹은 어떤 피해를 입어도 복구시킬 수 있는 자금을, 귀암로에선 정보를 포함한 묵 노야와 살수, 사혈명은 산과 강의 길을 끊어 주었다.
저 정도의 지원으로도 학림 다섯밖에는 죽일 수 없었다.
‘다섯 번째 학림을 죽였다는 보고를 받던 날, 동태병이 그런 공표만 안 했으면…….’
묵 노야는 만약이란 말을 떠올리려다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우리는 지금의 여세를 몰아 군림단 자체를 사천 땅에서 지운다!
동태병의 확신 가득한 그 말을 듣는 순간, 묵 노야는 욕이 나오려는 충동을 참아 내며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숨었다.
학림 한 명, 한 명을 죽이기 위해 희생된 인원만 수백이다.
강호 삼대세력이 그 인원을 계속 보충해 주니 동태병은 심각성을 몰랐던 것이다.
그날부터 동태병을 지지했던 강서성의 수많은 문파들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보름.
한참 후에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인원수에 대해 듣게 됐다.
교림 둘이 만들어 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둘이 강서성을 휘젓는 동안 강호 삼대세력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니, 부하들까지 거둬들여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만들었다.
‘강호 삼대세력조차 군림단과는 직접적으로 부딪치길 꺼린다. 그런 곳에서는 어떤 아이들을 키워 내는 거지?’
묵 노야는 선 채로 고심하다 가려고 했던 방향을 흘깃 쳐다본 후 몸을 옆으로 돌렸다.
***
담영호는 무묵과 멀어지고 나서 용연에게 겪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용연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악조궁을 펼쳐서 방진의 주먹을 밀어낸 얘기, 사람들에게 공격할 쪽은 자신과 적휘가 아니라 방진이라고 설득한 얘기, 적휘에게 먼저 올라가 있을 테니 다음엔 학림이 돼서 보자는 얘기를 꾸임 없이 말했다.
씰룩.
담영호의 입가에 주름이 생겼다.
대견해서 웃음이 나왔고 하루 빨리 정식 단원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욕심이 들어 웃었다.
“우리가 지금 어딜 가는지 아냐?”
“대교란 분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닙니까, 선임?”
“대교?”
“이번 임무를 끝내면…….”
“맞다. 분명히 그랬다. 그 전에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서 안가로 먼저 간다.”
“안가요?”
“휴식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 그럼 그런 곳을 놔두고 그동안 일부러 노숙을 하셨다는 건가요, 선임?”
“응.”
“…….”
“막내라 어느 안가를 가도 편히 쉬긴 힘들어.”
“아…….”
용연은 담영호의 한마디에 탄식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담영호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런 위계질서는 군림단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군림단원은 임무도 혼자하고 결정도 혼자 해야 한다.
그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안가에서까지 고달프게 만들 리 없다. 단지, 학림들 스스로 나태해질까 봐 자제하는 것뿐이다.
“서, 선임, 지금 웃었죠?”
“……아니.”
“제가 봤는데요?”
“뭘?”
“선임 웃으시는 거요.”
“내가? 안 웃었는데?”
“절 놀리시는 거죠?”
용연은 볼을 부풀리며 담영호를 쳐다봤다.
“응.”
“예?”
“너 놀리는 거라고. 눈치가 있기는 하네.”
“…….”
용연은 담영호를 멍하니 쳐다봤다.
저런 말을 저렇게 담백한 말투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담영호뿐일 것이다.
척.
용연은 걸음을 옮기는 담영호의 뒤에 대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위에서 노숙하자고? 그것도 나쁘진 않지.”
용연이 치켜올린 엄지 덕분에 노숙 장소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휘이이―.
바람이 적당히 막아 놓은 돌 사이로 들어온다.
용연은 살짝 한기가 느껴져 눈을 뜨자, 앉은 채로 잠이 든 담영호가 보였다.
저 상태로 정말 잠을 자는 것일까?
매번 궁금했으나 지금까지 묻지 못했던 의문이다.
담영호가 창천비를 가르쳐 줄 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최고의 신법은 달리는 동안 내공이 채워지고, 달리는 것 자체가 무공이 된다고 했다.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자는 이유도 그 말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
자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쌓이거나 하는?
묻고 싶었다.
질문하려 입까지 거의 다 벌린 순간, 담영호의 눈이 떠지며 용연을 쳐다봤다.
“할 말 있냐?”
“아…… 이, 있기는 합니다.”
용연의 초점 잃은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뭔데?”
“선임께선 항상 앉아서 주무시던데, 혹시 그것도 신법처럼 내공이 쌓이기 때문입니까?”
“……?”
담영호는 순간적으로 용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최고의 신법은 달리는 동안 내공이 쌓이고 신법 자체만으로도 무공이 될 수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무서운 놈.”
담영호는 용연이 말을 모두 쏟아 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직이 신음처럼 한마디를 뱉었다.
저 엉뚱한 상상력에 진심으로 놀라긴 했으나, 표정을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
“으아! 제, 제 예상이 맞았습니까, 선임?”
용연은 자신이 한 말에 확신을 갖고 눈까지 크게 치켜뜨며 탄성을 터트렸다.
“도대체…….”
담영호는 그런 용연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어떤 심법입니까, 선임? 저도 학림이 되면 그 심법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십시…….”
딱!
“윽!”
담영호에게 달려들 듯이 외치던 용연이 정수리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심법이 있으면 나도 배우고 싶다. 그럼 이렇게 불편하게 자지 않아도 될 테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호기심을 질문으로 푸는 것도 좋지만, 앞으론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찾아봐. 네가 찾아낸 답이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답보다 몇 배는 가치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궁금한 것들을 쌓아 두는 습관도 갖고.”
“……예.”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네가 묻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겠지. 지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