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칠 령주님,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걸 궁금해 하기보다는 사람을 좀 더 투입해서 죽였으면 되지 않습니까?”
임료는 자신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처리했을 일을, 무슨 엄청난 일을 하는 것처럼 꾸며 대는 칠 령주 태안의 말이 어이없었다.
“후후후. 자네 정말 군림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만?”
태안의 표정이 달라졌다.
임료의 반항하듯 쳐다보는 눈빛을 보자 더는 가만두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령주님.”
임료는 태안의 느끼한 표정을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놓치고 있는 거라……. 학림 둘과 시간 보내다 교림이 나타나면 어쩔 생각이지?”
“교림이라고 해 봐야 십 번대 서열이라고 들었는데 같이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요?”
임료는 교림을 특별한 존재처럼 말하는 칠 령주 태안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태안은 혀를 차며 고갤 저었다.
문서만 보고 군림단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머릿속에 담은 여인인 것이다.
“임료, 자네는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모를 걸세. 한 가지만 말해 줄 테니 잘 듣게. 교림이 모습을 드러낸 다는 뜻은, 우리 쪽에서 누굴 보냈건 간에 최대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일세.”
태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래서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
태안은 임료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제게 교림과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임료는 각오가 담긴 눈빛으로 태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태안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신기해하다 기어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풉.”
태안이 듣기엔 최근 들어 접한 그 어떤 농담보다 재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려, 령주님?”
임료는 갑작스러운 태안의 반응에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했다.
“파하하! 이보게, 임료. 학림도 아니고 교림이야. 사형수 몇이 아니라 나 같은 령주 몇이 모여 있어도 일단 도망부터 쳐야 하는 자라고. 자네 혼자, 뭐?”
태안은 웃다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 시선을 접하자 임료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령주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태안의 표정은 바로 풀리며 임료의 전신을 다시 한번 훑었다.
“됐고. 가세. 가서, 술이나 한잔하며 다음 계획을 세워 보자고. 아직 사형수가 넷이나 남았잖아? 회로 돌아가면 다시 채워질 테고.”
태안은 임료의 순종적인 태도에 마음이 급해졌다.
숙소로 돌아가 저 토실거리는 몸 위에서 헐떡이고 싶은 생각이 든 까닭이다.
꿀꺽.
마른침이 자꾸 삼켜졌다.
임료를 부령주로 선택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저 몸이다.
오 년 전의 일을 멀리서나마 지켜봤다는 이유로 령주가 됐다. 이번에도 싸움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숨죽이고 있다가 학림이나 한 명 사냥하고 다시 숨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능한 부하가 아닌 첩처럼 다룰 수 있는 임료가 좋았다.
“찾았다!”
태안이 막 임료와 함께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장난기 담긴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임료였다.
목소리의 주인 외에 조력자가 더 있는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임료는 태안의 앞으로 나서며 양손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비도 두 개가 소매 속에서 나와 손바닥에 붙었다.
“어? 어라?”
태안의 발을 멈추게 한 목소리의 주인, 형도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좌우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뭔가 잘못됐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료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지며 뒤를 돌아봤다.
태안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본 태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땀을 흘린 채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령주님?”
“사, 사형수들은 전부 이, 임 부령주와 함께 저자를 공격해, 어서…… 어서!”
태안은 명령을 내리자마자 몸을 틀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학림 중에 저렇게 생긴 놈은 없었어.’
형도준의 옷깃에는 군림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학림이 아니라면 그 이상의 서열이란 뜻이다.
‘오 년 전, 노야도 교림과 부딪칠 것 같으면 일단 피하고 보셨다. 하필 첫…….’
오싹!
태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틱.
잠갔던 허리띠를 풀었다.
몸을 돌리며 연검으로 베려는 것이다.
태안은 연검을 손에 쥐자마자 힘껏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배에 힘을 주었다.
‘어?’
시선이 여전히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그때,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했다.”
‘나? 지금 나보고 한 말인가? 위, 위험하다. 근데 몸이 왜 말을 안 듣는…….’
팡!
태안의 의식이 귀로 향했다.
귀에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뭔가를 발로 찼다.
‘뭐지?’
태안은 자신보다 먼저 아래로 떨어지는 걸 쳐다봤다.
‘저, 저거 혹시…….’
태안은 천천히 고갤 가슴 안으로 숙여 자신의 하체를 쳐다보다 경악하고 말았다.
허리 아래쪽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
형도준은 태안의 비명 소리에는 눈도 주지 않고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 섰다.
그사이 여자 한 명과 네 명의 무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입가에 점이 있던 그 여자를 잡았어야 해!’
형도준은 임료의 색기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혼자만 살겠다고 절벽에 뛰어들고, 몸이 잘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둔한 자가 오늘 일의 주범일 리 없기 때문이다.
휘이이―.
기감을 최대한 확장시켰음에도 임료 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꾹.
형도준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적어도 단서 하나는 알아냈어야 했다.
오 년 전, 누가 학림들을 죽이도록 지시했는지 알아낼 기회를 어이없게 날려 버린 것이다.
***
‘저, 저자는 뭐야?’
임료는 아직도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명령을 내린 태안이 절벽으로 떨어진 직후, 형도준의 신형이 갑자기 길어진다 싶더니 진득한 액체처럼 보이며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 광경은 잊을 수가 없다.
‘교림 한 명의 움직임이 어떻게 하오십랑(下午十狼)급일 수가 있는 거지?’
이 년 전, 배수(扒手, 소매치기)들이 기녀들의 영역까지 넘봐서 나선 적이 있는데, 배수들의 머리가 무슨 수를 썼는지 십랑 중 한 명인 은형수(隱形手) 이탄을 데리고 나타났다.
임료는 상대가 상대인 만큼 비도 열두 자루를 꺼내 한성비류폭(寒星飛流瀑)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때, 이탄은 오로지 움직임 하나로 피해 내는 신기를 보여 주었다. 바로 조금 전에 봤던 형도준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당시의 충격이 기억난 것이다.
형도준은 자신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십 번대 서열이 저 정도면 한 자리 서열들은 어느 정도라는 거야?’
덜덜덜―.
몸의 떨림이 아직도 멈추지 않는다.
―료야, 여기엔 은하소수(銀河素手)의 구결과 수련법이 적혀 있어. 이것만 익히면 이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열세 살의 임료가 받아들인 첫 남자이자, 지난 십칠 년 동안 자신을 키워 준 주인, 묵 노야가 해 준 말이다.
‘주인님은 어디 계시지? 주인님을 찾아야 해.’
임료는 갑자기 묵 노야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졌다.
묵 노야는 임료가 더 강해지고 싶을 때마다 찾아오게 만들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옆자리를 내준다고.
‘갈증 나.’
묵 노야를 떠올리자 입안이 말라 왔다.
십칠 년 동안 길들여진 현상이다.
묵 노야의 입에서 ‘허락한다’는 말을 듣기 전엔 결코 풀리지 않는 증상.
암시와 세뇌의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반응이다.
‘허락, 허락을 받아야 해.’
―료야, 나는 네가 필요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찾아와라.
묵 노야는 근처에 있다.
***
무인들은 담영호와 무묵의 지휘에 따라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몇몇 무인이 떠나기 전에 용연과 적휘를 찾아와 자신들의 문파에서 보낸 대표들의 복수를 하게 해 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넸다.
“둘 다 학림이 되겠지?”
무묵이 용연과 적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다섯이 모두 올라가야죠.”
담영호는 아직도 누군가가 지켜볼 거라 여겨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다섯? 아아, 나머지 후임들?”
“예. 구 향주에게 들으니 다들 날뛰고 싶어 난리도 아니라네요.”
“다 네 후임 때문이지.”
“용연이가 왜요?”
“일전에 만났을 때 나머지 네 명이 네 후임 때문에 자극받았거든.”
“좋은 일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섯 놈 모두 정식 단원이 돼서 오 년 동안 멈춰 있던 계획이 다시 시작됐으면 한다.”
무묵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담영호를 돌아봤다.
담영호 역시 기대감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십구 인으로 구성된 군림단.
몇 명이 모자란 선림, 교림, 학림이 아닌, 모든 자리가 채워진 군림단.
다섯 명의 학림만 죽임을 당하지 않았어도 이 대 군림단주의 배출도 꿈은 아니었다.
“오 년 전처럼 단을 흔들려는 거겠죠?”
“실수하는 거지. 단은 이미 오 년 전의 단이 아니니까.”
무묵의 턱이 불룩해졌다.
“열아홉 번째 교림이 대교를 맡을 때와 열 번째 교림이 대교를 맡을 때는 다르죠.”
“다르지. 놈들도 곧 알게 될 거야.”
‘백지선검(白指線劍).’
담영호는 대교 진류가 익힌 무공을 떠올렸다.
현 군림단 최고수인 현승 선림의 천강담도(天罡擔刀)에 유일하게 필적할 만한 무공이 바로 백지선검이기 때문이다.
진류는 선림으로 올라갈 마지막 한 계단을 앞두고 대교를 맡았다.
학림 다섯 명의 죽음이 진류를 얼마나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보여 준 것이다.
‘나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진류가 대교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떠올린 질문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바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그래서 진류를 존경한다.
“무슨 얘길 저렇게 심각하게 하시는 거지?”
용연은 담영호와 무묵이 굳은 얼굴을 풀지 않자 적휘를 돌아봤다.
“두 분만이 아는 얘기겠지. 우리도 정식 단원이 되면 낄 수 있을 테고.”
적휘는 두 학림이 나누는 진지한 대화를 보며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언제고 자신도 저런 모습으로 설 것이다.
“보기 좋다. 적휘, 우리도 다음에 만날 때는 선임 두 분처럼 저렇게 서서 얘길 나눌 수 있겠지?”
“물론!”
적휘는 용연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벌써부터 여기가 두근댄다.”
용연은 심장에 손을 대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용연의 동공에서 시작된 빛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착각이다.
알면서도 옆에서 지켜보는 적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선임처럼 되고 싶다면서 어딜 보는 거냐, 용연!’
꿈틀.
적휘는 인상을 쓰며 용연을 노려봤다.
용연이 심장에 손을 댄 채 자신도 아니고, 선임들도 아닌 하늘을 올려다본 까닭이다.
자신과 선임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다.
“용연, 군림단은 땅에 있어.”
“알아.”
“근데 왜 하늘을 보냐?”
“그냥. 꿈꿀 때 다 저길 보잖아?”
용연은 당연하다는 듯 적휘를 돌아봤다.
“꿈?”
“응. 꿈.”
용연이 다시 하늘로 고갤 들자 적휘도 따라서 시선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