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용연은 덕건과 벽삼이 싸우는 것을 확인하며 아한문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탁―.
이제는 왼발이 땅을 딛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이 장 거리를 훌쩍 뛰어넘자마자 다시 ‘다탁’ 소리를 내며 더 많은 거리를 좁혔다.
아한문도들은 싸움에만 신경 쓰느라 용연이 다가가는 뒤쪽으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용연은 가장 뒤쪽에 있는 아한문도를 지나자마자 잰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기 있다.’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벽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쪽을 쳐다봤다.
숨을 몰아쉬는 덕건과 장철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벽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깨가 마구 들썩인다.
“준비해라.”
‘역시 다혈질이야.’
용연은 벽삼이 우려하던 일을 벌이려는 것을 깨닫고 심호흡을 했다.
“어? 문주님과 장철이 동시에 쓰러졌다!”
누군가의 탄성에 아한문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해 돌아갔다.
“이이…… 저 잡것들이 문주님의 몸에 상처를 냈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냐!”
벽삼은 덕건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 뚜껑이 열려서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부문주님. 구벽아 놈들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찢어발기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명령만…….”
벽삼 주위의 사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 소리씩 했다.
덕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벽삼은 이를 악다물어 턱 근육을 불룩하게 만든 후 손을 들었다.
“모두…….”
“그대로 계세요.”
뒤쪽에서 젊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 놈이 내 말을 잘라!”
벽삼이 뒤로 돌아서며 으르렁거렸다.
척.
“접니다.”
용연은 당당하게 손까지 들었다.
“응? 네놈은…….”
벽삼은 용연을 보자마자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덕건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던 애송이임을 한눈에 알아본 까닭이다.
“군림단에서 싸움의 승패를 가릴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
벽삼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서 용연을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아직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곳으로 몰려가면 군림단의 결정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오해는 만들지 마세요.”
“지랄……, 애당초 나는 군림단이고 뭐고 믿지 않았어. 문주님이 잘못되면…… 구벽아 새끼들 손을 들어 준 군림단도 각오해야 해.”
“하아…… 그럼 당신 혼자 하세요. 왜 가만히 있는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려고 그래요?”
“누가? 누가 죽어? 나 벽삼이 있는데 감히 누가!”
벽삼이 눈을 부릅뜨며 용연에게 달려들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이었으나, 벽삼보다 강한 탁추, 기과, 무부와 싸워 본 용연에겐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쉬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용연의 눈으로 세 줄기 빛이 할퀴듯 다가왔다.
그러나 용연은 벽삼의 어깨가 뒤로 밀려나는 순간 몸을 뒤로 뺀 뒤였다.
“어? 피해?”
“다들 물러나세요. 곧 군림단원이 승패를 알려…… 읏차.”
용연은 다시 달려든 벽삼의 공격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드릴 겁니다. 괜히 반발했다가 이분처럼 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용연은 벽삼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선 뒤 오른 손바닥을 편 채 겨눴다.
이틀 전, 객점에서 성공시켰던 악조궁을 펼치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희생은 의미 없다.
악조궁을 성공시켜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
슥.
오른손을 편 채로 들었다.
그 상태에서 시선을 벽삼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을 창문이라 여기고…… 흡!’
움찔.
손가락을 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지와 중지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건데?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큭!”
용연을 향해 다가오던 벽삼이 갑자기 가슴을 쥐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무, 무슨…….”
“다, 당신 뭐야?”
“설마…….”
벽삼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아한문도들은 용연에게서 떨어졌다.
‘됐어, 정말로 됐어!’
용연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손등을 쳐다봤다.
무려 세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 악조궁을 성공시킨 것이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말도 안 나올 정도의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러나 성공한 것과 악조궁의 강도와는 무관했던 모양이다.
“뭘 던진 거냐?”
벽삼이 일어난 채로 용연을 노려봤다.
용연은 악조궁을 성공시켰다는 기쁨도 잠시, 벽삼과 대치한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
용연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벽삼의 뒤쪽에서 누군가 일어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덕건과 장철 중 누군가 일어난 것이다.
“결정이 난 모양이네요.”
용연은 손을 들어 벽삼의 뒤쪽을 가리켰다.
벽삼이 고개를 돌리자, 다른 아한문도들도 일제히 고갤 돌렸다.
“이, 이기셨다!”
“문주님이 구벽아 장철을 밟으셨다!”
아한문도들은 탕문평야를 가득 채울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때, 환호성을 한순간에 뚝 끊게 만드는 폭음이 건너편에서 터져 나왔다.
콰콰쾅!
“아…….”
용연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구벽아 쪽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뭉개 버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나는 원칙대로 했고, 너는 최선을 다했다.”
담영호는 툭, 지나가듯 한마디를 건넸다.
용연이 탕문평야를 벗어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용연은 대답을 망설이다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 때문에 아한문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네 능력을 벗어난 일을 해낸 것이다.”
“구벽아 쪽은…… 거기도 벽삼 부문주 같은 사람이 있었을 줄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에헤이, 용 소형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평화롭게 해결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네. 때론 한쪽을 눌러 주기도 하고 때론 양쪽을 모두 누르기도 해야 한다오.”
구선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용연을 위해서라기보다 담영호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런가요?”
용연은 구선의 말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런, 용 소형제는 아직 정식 단원도 아닌데 도덕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건가? 너무 빨라도 좋은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민낯을 드러내야 하는 건가?”
구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펴더니 낮게 숨을 토해 낸 후 말을 이어 갔다.
“용 소형제 같은 성품의 인재를 만난 기념으로 하는 말이니 너무 나쁘게만 듣지 않았음 하네.”
“……?”
용연은 구선답지 않게 서두를 길게 깔자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구벽아는 내가 외연 식구들과 해체시켰네.”
“예?”
“담 단원과는 무관한 일이란 말이네.”
“선임…….”
담영호를 돌아보는 용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히 담영호가 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담영호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용 소형제, 담 담원은 모르는 일이니 물어봐야 소용없네. 아한문과 구벽아가 내건 조건은, 진 쪽을 해체시켜 달라는 것이었네.”
“…….”
용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구선을 돌아봤다.
구선의 말만 들으면 군림단이 마치 장사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 까닭이다.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말을 끝까지 들어 주게. 군림단은 증인이 돼 주는 것으로 끝이고, 나머지 조건은 우리 외연의 일이네. 먹고살아야 하잖나?”
구선은 말을 하고 나자 스스로 속물이라 고백한 것이 머쓱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담영호의 옆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아…….”
악어와 악어새.
군림단은 명예를, 외연 등은 실리를.
용연은 담영호와 나란히 걸어가는 구선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용연의 앞에서 항상 웃음 짓던 사람의 어깨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무겁게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구 향주님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무거울 수도 있겠다…….’
구선의 뒷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다.
구벽아가 사라져야 외연 등이 유지된다.
용연은 조금 전에 담영호가 해 준 말을 기억해 냈다.
―나는 원칙대로 했고, 너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명쾌할 수 없는 말이잖은가?
담영호의 말대로 용연은 알고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주제에 보지도 못한 부분까지 챙기려하다니…….’
절레절레.
용연은 자신의 좁아터진 시야를 창피해하며 담영호와 구선의 뒤를 따랐다.
“담 단원, 내게 해 주지 않은 얘기가 있지 않소?”
담영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구선은 슬며시 먼저 입을 열었다.
“익혔더군요. 그것도 제대로.”
담영호는 구선이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었다.
“허!”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확히 상대의 가슴에 악조궁을 적중시켰어요.”
“정말 그 악조궁이 맞나요?”
구선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가 뒤쪽에서 용연이 다가오는 소리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외연 식구들을 전부 동원해야 해. 용 소형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모두 갖고 있어야 돼. 그것이 뭐든 간에…….’
구선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십여 일 만에 악조궁을 펼친 군림단원은 군림단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런 단원이 교림이 되고 선림이 된다면 외연의 비중이 은타나 고람보다 높아질 것은 당연하다.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용연은 벌써 담영호보다 빠른 학림 도전 자격을 가졌고, 최단 시일 내에 악조궁을 펼친 사람이 됐다.
두 가지나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된 것이다.
***
푸드덕―.
전서구가 담영호의 손을 떠났다.
아한문과 구벽아의 싸움은 아한문의 승리로 끝났다는 내용을 적어서 보냈다.
구선은 외연의 업무를 처리하러 돌아가야 해서 중간에 헤어졌다.
날아가는 전서구를 지켜보던 담영호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 앉아 있던 용연은 일어나 담영호에게 다가갔다.
“선임, 무슨…….”
담영호의 분위기가 워낙 진지해서 용연은 쉬이 말을 붙이지 못하고 같은 방향에 대고 포권을 취했다.
“너는 굳이 따라 할 것 없다. 내 선임이었던 방 선배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뿐이까.”
“아! 선임의 선임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면 저도 하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 주십시오.”
용연의 표정이 금방 들떴다.
뭔가 대를 잇는 느낌이랄까?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든지.”
담영호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방적이 이 얘길 들으면 자신을 놀릴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
안 좋은 예감이지만, 용연이 앞으로 정식 단원이 된다면 이런 의례 하나쯤 갖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단의 공식 임무는 끝났고…….’
담영호는 적당한 위치를 골라 바위에 등을 대며 용연을 쳐다봤다.
“선임, 앞쪽은 탁 트여 강이 보이고, 뒤쪽은 바위가 바람을 막아 주는 장소네요. 노숙하기 딱 좋습니다.”
용연이 웃으며 담영호의 아래쪽에 앉았다.
임무를 끝내서 그런지 표정이 몹시 밝다.
‘내가 대교께 날린 전서구에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도 모르고…….’
담영호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서구에는 임무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용연의 할아버지, 용잠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다는 말을 보냈기 때문이다.
“밖에서 자는 건 불편하지 않냐?”
“어릴 때부터 잠자리를 가릴 형편이 안 돼서 아무 곳에서나 잘 잡니다.”
“씻는 건?”
“…….”
용연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담영호를 쳐다봤다.
“알았으니, 자라.”
담영호는 용연을 보지도 않은 채 말을 꺼냈다.
“……예.”
씨익.
용연은 담영호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 것을 봤다.